메뉴 건너뛰기

close

베이징 시탕의 십자가와 오성홍기.
 베이징 시탕의 십자가와 오성홍기.
ⓒ 김소연

관련사진보기


나: 졸업설계를 성당으로 하고 싶다고? 넌 종교가 있니?
W: 아뇨.
나: 그럼 성당에서 어떤 활동이 일어나는지, 그래서 어떤 공간이 필요한지 알고 있어?
W: 나는 성당의 특별한 분위기가 좋아요.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서 다양한 행사도 하고, 결혼식도 하고....
나: 미사는? 고해는? 사제관은? 그런 걸 본 적이 있어?
W: 아뇨. 결혼식은 본 적이 있는데....

자유주제인 졸업설계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멀티콤플렉스나 커뮤니티 센터, 복합문화시설을 했다. 그런데 W는 건축학과 5년 동안 한 번도 다뤄본 적이 없는 성당을 하겠단다. 게다가 입으로는 성당이라 말하고 머리로는 이벤트 공간을 그리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집회시설이라는 공통점은 있다. 하지만 집회의 목적이나 내용이 다르다. 성당 분위기의 예식장과 성당은 엄연히 다르다.

중국어로 성당은 천주교당(天主教堂), 이미 그 말 속에 사전적인 의미가 분명한데도 W에겐 생활에서 경험한 의미가 먼저였다. 처음엔 어이가 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중국에서라면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칭다오 구시가지만 해도 독일점령기에 세워진 기독교당(1908~1910)과 국민당 통치기의 천주교당(1930~1934) 앞은 언제나 결혼사진 촬영으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대신 본당 출입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중국은 종교가 자유로운 국가... 단 포교 발각되면 추방"

내가 여행을 다녀본 다른 지역도 별반 차이는 없었다. 고풍스런 성당의 첨탑과 십자가 아래에서 낮에는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젊은 남녀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밤에는 중년들이 몰려 나와 요란한 음악을 틀어놓고 사교춤을 추었다. 그럴만한 광장이 없는 성당이라면 아예 입구에 철문이 막고 서 있었다. 심지어 성당 입구 벽면에 결혼식 광고와 전화번호가 인쇄된 현수막이 걸려 있는 곳도 있었다. 그런 장면을 사회주의 중국에서 일상적으로 봐온 사람이라면, W처럼 성당을 경건한 장소보다는 활기 넘치는 이벤트 공간으로 먼저 떠올릴 것이다.

"중국은 종교가 자유로운 국가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종교를 존중합니다. 중국에서 여러분은 성당이든 교회든 마음대로 다녀도 됩니다. 단, 중국인에게 포교를 해서는 안 됩니다. 발각되면 여러분은 추방됩니다. 추방되면, 다시는 중국에 올 수 없습니다."

내가 잠시 칭화대학교에서 중국어를 배울 때 오리엔테이션에서 학교 관계자가 했던 말이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이 종교를 허용한다고? 그들이 타도하려 했던 '인민의 아편'을 존중한다고? 그러면서도 포교는 안 된다? 추방에 재입국이 안 될 정도면 엄청난 죄라는 말인데 앞뒤가 맞는 이야기인가?

실제로 중국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종교 활동은 정부가 통제와 관리를 한다. 특히 외세의 간섭을 철저히 배격한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사회주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토지를 소유해 왔기 때문에 계급투쟁의 대상인 대지주나 다름이 없고 성직자는 반공주의자이다. 여기에 서구 열강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서양의 종교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사례도 한몫을 한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1950년 삼자애국운동(三自爱国运动)을 제창하고 종교 강령으로 삼았다. 삼자(三自)란 스스로 교회를 다스린다는 '자치(自治)', 경제적인 자립을 의미하는 '자양(自養)', 중국인 스스로 복음을 전파한다는 '자전(自傳)'을 말한다. 당시 정부는 '자전(自傳)'을 빌미로 외국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자치(自治)'를 내세워 종교별 애국회를 설립하였다. 1957년에 정부 주도로 세워진 '중국 천주교 애국회'의 선언문을 보면 애국회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바티칸은 미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세계를 위하여 일하며 사회주의 제도를 원수로 여긴다. 따라서 바티칸에서 오는 명령은 그것이 정치적인 것인지 종교적인 것인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하며, 종교 형식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그런 명령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애국은 천직이므로 (바티칸을 포함해) 어떤 사람이라도 우리나라를 반대하면 우리도 그를 반대할 것이다." (출처: 김원철, "애국회, 불가피한 역사적 산물인가?", 평화신문, 2008. 11. 30)

그 후 중국은 교황의 고유 권한인 주교 임명권을 스스로 행사하면서 바티칸과 결별하게 되었다. 정부와 애국회의 방침을 거부한 성직자들은 감옥이나 사상노동개조 수용소로 끌려가고, 신자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가정교회' 형태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문화대혁명 때는 그마저도 불가능했고 애국회 활동도 중단되었다. 개혁개방이 되고서야 종교인들이 석방되고 종교 활동도 서서히 살아났지만, 어디까지나 재건된 애국회 테두리 안에서 허용되었다. 중국은 여전히 스스로 주교를 선출한다. 그 한계 때문에 중국 정부와 바티칸의 관계는 진전이 없다.

중국의 기독교 신자 수, 중국 정부가 긴장할 만하다

간혹 중국 뉴스를 보면 '애국교회'니 '지하교회'니 하는 말이 나온다. 종교탄압 기사에는 어김없이 '지하교회'나 '가정교회'가 따라 다닌다. 그 차이가 뭘까? 중국에서는 모든 예배장소를 정부에 등록해야 한다. 애국교회는 등록된 공식 교회이고, 지하교회는 등록되지 않은 비공식 교회다. 비공식 교회는 정부와 애국회의 방침을 거부한다.

2013년 3월 22일 <연합뉴스>에 의하면 중국 관제 교회 소속 신자는 약 1800만 명에서 3천만 명이고, 가정교회(지하교회, 지하성당)에 다니는 신자는 4500만 명에서 6천여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등록 신자보다 미등록 신자가 더 많은 셈이다. 어쨌든 그 둘을 합치면 총 신자수는 6300만 명에서 9천만 명이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원은 8천만 명이다.

기독교 신자 수뿐만 아니라 중국에 입국하는 외국인 수, 그들과 중국인들의 경제 문화적인 교류와 SNS의 파급력을 고려하면 중국 정부가 긴장할 만하다. 글로벌 시대에 애국을 전제로 한 자치, 자양, 자전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내가 칭다오에서 목격한 외국인의 종교 활동은 두 종류였다. 개신교 신자였던 미국인은 가정교회에 다닌다고 했다. 그녀는 시내 식당에서 스스럼없이 식사 전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녀는 온갖 화제로 수다를 떨면서도 종교 이야기만큼은 입을 다물었다. 중국에서 10년을 산 그녀를 보면서 나는 새삼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의 무게를 느꼈다.

그런데 한국인은 좀 달랐다. '교회 오세요, 성당 오세요' 스스럼없이 권했다. 한국인끼리이니 중국인에 대한 포교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들은 가정교회 신자들이 아니었다. 칭다오에는 장로교, 감리교 등 여러 교파가 있고, 바자회도 공개적으로 열렸다. 어떤 교회는 차량을 운행할 만큼 규모가 있고 운영도 안정적이었다.

순복음교회는 칭다오 시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존재감을 드러냈다. 가톨릭 신자들은 칭다오의 역사 보존 건축인 천주교당에서 주일마다 한국어 미사를 가졌다. 표 나지 않게 가정교회에 다니는 다른 외국인과 달랐다. 그 차이점에 대하여 한 외국인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지난 20년간 칭다오는 중국에서 한국기업이 가장 많이 진출한 곳이야. 지금은 이런 저런 규제로 한국 기업이 떠나고 있지만, 한국에 대한 경제적인 필요성은 여전할 거야. 그러니 칭다오 정부는 그 목적 때문에라도 한국인의 종교 활동을 덜 압박하겠지. 또 하나, 물론 이건 나의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인은 절실함과 진지함보다는 친목단체처럼 교회 활동을 하는 것 같아. 어쩌면 중국 정부가 볼 때 이런 모습이 덜 위험하게 보일 거야."

'나이롱 신자'가 많다고 꼬집는 걸까. 드러내놓고 활동하는 한국 교회는 중국의 관제 시스템에 포섭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걸까. 당시 나는 어느 종교 단체와도 교류가 없었던 터라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었다. 가끔은 밖에서 보는 나의 눈에도 몇몇 한국인의 종교 활동이 이익단체나 사교클럽처럼 보일 때가 있긴 했다. 하지만 외국이라면 좀 특수한 상황이 아닐까. 낯선 타국에서 저 높은 곳만 우러러 볼 것이 아니라 서로 옆에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외로움을 달래는 것도 이웃 사랑일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한국인 신자들이 중국 정부가 정한 틀 안에서 공개적인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외신의 외국인 선교사가 잡혀갔다는 소식에 가정교회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선교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문이 늘 잠겨 있는 예배당... 베이탕 본당 꽉 채운 중국인들

베이징 베이탕에서 미사를 기다리는 사람들.
 베이징 베이탕에서 미사를 기다리는 사람들.
ⓒ 김소연

관련사진보기


그럼에도 내가 만난 일반 중국인들은 중국이 종교가 자유로운 국가라고 했다. 그 예로 누구나 원하면 교회나 성당에 갈 수 있고, 서점에서 마음대로 성서를 살 수 있고, 학교 도서관에서도 성서를 읽고 공부할 수 있단다. 또 이슬람 지역마다 이슬람 사원이 있고, 곳곳에 불교와 도교 사원이 있어서 자유롭게 종교 활동을 할 수 있단다.

그럼 왜 예배당 문은 항상 잠겨 있냐고 질문해 보았다. 그 대답은 대부분의 중국 교회가 상근자가 따로 있지 않고 자원봉사로 운영을 하기 때문이란다. 다들 직업이 있으니 예배 시간 외에는 관리 차원에서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언뜻 일리 있는 말인 듯싶지만, 나는 아직 불교와 도교 사원이 통제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사실 내 주변의 중국인들은 모두 종교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교직원에다 공산당원이었다. 그 신분에 종교를 가지면 직장을 잃게 된다.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몰래 기독교를 믿는 공산당원도 있다니 진실은 알 수 없다.

2014년 10월 국경절 연휴기간에 나는 베이징 후통을 답사하면서 베이징의 역사적인 4대 성당을 둘러보았다. 1655년에 세워진 동탕(东堂)은 왕푸징(王府井)에 있어서 여행객들로 붐볐다. 밤이 되면 동탕 광장 반은 무리지어 춤을 추는 중국인들로 채워졌다. 1650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난탕(南堂)은 예전에도 가봤지만 이번에도 여행객 두세 명만 보일 뿐 쓸쓸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다른 성당과 달리 난탕에는 개방 시간과 미사 시간, 예비자 교리 시간까지 알려주는 네온사인 안내판이 있었다.

특이한 것은 매일 아침 6시마다 라틴어 미사가 있고, 주중 미사 중 가장 늦은 시각이 아침 7시 15분에 시작된다. 그것이 세 번째 미사이니 미사 시간은 30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일요일에도 중국어 미사는 아침 8시 30분이 마지막이고 그 이후에 세 차례의 영어 미사가 있다. 또한 내가 방문한 시간이 개방시간인데도 외부 공간만 개방되고 본당 문은 잠겨 있었다.

이쯤에서 나는 나름대로 정리를 했다. 언어와 국가별 커뮤니티 문제도 있겠지만, 역시 듣던 대로 같은 종교를 가져도 중국인과 외국인은 섞일 수가 없구나, 어쩌면 내가 올 때마다 느끼는 난탕의 썰렁한 분위기야말로 네온사인의 내용이 전시용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말이다. 나는 애국회 소속 사제가 오전 6시에 텅 빈 성당에서 홀로 라틴어를 읊조리는 장면과 아침잠이 없는 노인 몇 명으로 채워진 7시 15분의 중국어 미사를 상상하며 난탕을 떠났다.

그 상상이 깨진 것은 베이탕(北堂)에서였다. 큰 길가에 있는 다른 성당들과 달리 베이탕은 주거지가 몰려 있는 샛길에 있었다. 그런데도 방문객이 많았고 온통 활짝 열린 분위기였다. 1703년에 세워진 고딕식 베이탕에는 드물게도 성물 판매소가 있었고 신부의 이름이 문패처럼 걸린 사제관도 있었다. 가톨릭 소식지를 무료로 나눠주는 사람들도 보였다. 중국어 미사 시간이 저녁에도 있었고, 아직 네 시간이나 남아 있는데도 본당 안이 훤히 보일 정도로 문이 열려 있었다.

그 안에서 아무런 제지없이 사진을 찍는 관광객과 묵주 기도를 하는 중국인들이 보였다. 더 놀라운 것은 교육실에서 서양 여성이 중국인들에게 중국어로 성가와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본당 뒷문 입구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진이 들어간 달력과 신자 알림판이 있었다. 불붙은 호기심 때문에 나는 중국인들 사이에 슬쩍 끼어 미사에 참석했다. 나야 중국인과 다를 바 없는 외모지만, 드문드문 보이는 서양인은 눈에 확 띄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십자가와 오성홍기' 오늘날 중국 교회의 모습

베이징 4대 성당.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동탕, 시탕, 난탕, 베이탕.
 베이징 4대 성당.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동탕, 시탕, 난탕, 베이탕.
ⓒ 김소연

관련사진보기


가장 놀라운 것은 어느 순간에 베이탕 본당을 꽉 채운 중국인들이었다. 미사 내용은 한국과 거의 같았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었다. 본당에 들어올 때, 자리에 앉기 전에, 영성체 시간 내내, 그들은 아주 경건하게 무릎을 꿇었다. 기도서나 성가 책 없이도 기도문을 줄줄 외우고 열렬히 합창을 했다. 헌금할 때는 헌금함 쪽으로 나가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기도를 했다. 그동안에 자원 봉사자들이 잠자리채 모양의 헌금 주머니가 달린 긴 막대를 들고 다니면서 헌금을 받았다. 정부에 등록된 성당이든, 애국회 소속의 사제가 집전하든, 신자들이 내뿜는 분위기는 묵직하고 뜨겁고 전통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시탕(西堂)은 관광지 분위기의 동탕과 내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던 베이탕이 애매하게 혼합된 느낌이었다. 시탕은 하루 단 한 차례 미사만 있는데, 나는 일부러 일요일 미사 시간에 맞춰갔다. 시탕의 신자들은 내가 한국인이라고 말해도 주보를 건네며 미사 참석을 환영했다. 1723년에 건축된 본당은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서양인은 딱 한 명 보였다. 미사 분위기는 베이탕과 비슷했다.

그런데 미사가 끝나자마자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급하게 들어왔다. 본당 밖에는 신랑 신부를 태운 웨딩카가 있었다. 결혼식 하객들은 성당 밖에서 하나 둘씩 들어오고 있었다. 미사를 마친 신자들은 그들을 건성건성 보며 지나쳤고, 차분했던 성당 안이 복작복작해졌다. 그제야 나는 2013년 시탕 성당 철문에 붙여져 있던 결혼식 광고가 생각났다. 거리에 나온 나는 성당을 뒤돌아보았다. 십자가와 오성홍기가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성당 관계자들이 사용한다던, 아치 창문이 있는 건물 지붕에 붉은 오성홍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십자가와 오성홍기, 그 한 장면에 오늘날 중국 교회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불현듯 W가 생각났다. 중국에서 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성당 설계를 하겠다던 W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성당다운 성당을 설계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대신 그가 새로 선택한 것은 멀티콤플렉스였다. 요즘 중국에는 대형 건설회사와 부동산업체가 앞 다투어 멀티콤플렉스를 짓고 있다. 5성급 호텔, 쇼핑센터, 식당가, 영화관, 사무실, 아파트, 고급 피트니스 센터... 돈이 될 만한 기능들이 모여 있는 곳이고, 씀씀이가 커진 중국인들이 몰려드는 장소이다.

그곳 매장 입구에 금빛 번쩍이는 차이선예(财神爷, 재물의 신)를 볼 때마다 나는 불교와 도교 사원, 공자나 삼국지 영웅의 사당이 떠오른다. 어른 손가락 두께만한 중국 향이 내뿜는 연기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어도, 남녀노소 모두 지극정성으로 절을 하고 소원을 빈다. 서양 문화에 푹 빠져 사는 바링허우(1980년 이후 태어난 중국의 젊은 세대)도, 교회 앞에서 신나게 사교춤을 추는 사람들도, 그곳에서만큼은 진지해진다.

그곳에서 열심히 절을 하고 향을 피웠다고 해서 잡혀가는 사람은 없다. 무엇을 비는지 다들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감하는 현세의 성공과 부, 그 욕망이 전시되는 공간이 멀티콤플렉스이다. 엄청난 돈이 흐르는 재물신의 사원이다. 그러니 W가 설계한 멀티콤플렉스는 여러 기능이 복합된 상업건축일까, 재물신을 숭배하는 종교건축일까, 아니면 그 둘 다일까.


태그:#중국종교, #중국기독교, #베이징 성당, #칭다오대학생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막이 좋다. 길이 없지만,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되니까.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