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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제목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국에서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이다. 나는 그 길에서 고향 출신의 한 순결한 파르티잔을 만났고, 그분이 위만군의 총탄에 불꽃처럼 산화한 북만주 깊은 산골짜기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하현달

 

마침내 청봉령 산봉우리에 하현달이 솟았다. 세 사람은 그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허형식은 잠자리에서 반쯤 몸을 일으켜 팔을 괸 채 하염없이 달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달밤이 참 좋군."

 

그는 예삿날답지 않게 먼 남쪽 고향을 그리워하고, 가족 생각을 했다. 집안의 버팀목 부인 김점숙(1910년생으로 본명은 김점증)도 보고 싶었지만, 12살 난 아들 창룡이와 10살 난 딸 하주가 가장 보고 싶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희생이 되더라도 남은 가족은 고향집으로 돌아가 편히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허형식이 살았던 구미 임은동 고향집은 바로 앞에 낙동강이 흘렀다. 그는 어린 시절 사시사철 그 낙동강에서 놀았다. 봄에는 강가에서 피라미나 붕어를 잡다가 그게 싫어지면 갯밭의 밀밭에서 밀을 뽑아다가 '밀사리'를 해먹었고, 여름날에는 강에서 멱을 감거나 모래톱에서 갯밭 감자를 서리하여 구워 먹었다. 가을에는 강둑에서 '콩사리'를 했고, 겨울에는 강이 꽁꽁 얼면 썰매를 탔다. 낙동강은 그에게 사시사철 놀이터였다.

 

허형식은 그 강마을에서 지는 저녁놀을 잊을 수 없다. 해가 질 무렵 온통 하늘이 새빨갛게 물들 때 바라보는 금오산의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었다. 그때 금오산 능선은 마치 사람의 모습으로, 보통 사람이 아닌 부처와 같은 성인의 모습이었다.

 

허형식의 고조 할아버지 허돈(許暾)은 원래 김해에서 살았다. 그는 건어물 장사로 남해에서 물건을 사서 돛단배에 실었다. 그리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울 도매상에게 넘기는 상인이었다. 그 뱃길은 김해 옆 포구인 구포를 떠나 물금, 남지, 고령, 임은, 해평을 지나 낙동에 선착한 뒤 거기서부터 육로로 서울에 이른다고 했다.

 

금오산의 낙조

 

어느 하루, 허돈 일행은 돛단배로 낙동강을 거슬러 가다가 구미 임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풍랑을 만났다. 그들은 도저히 배를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수가 없었다. 허돈은 돛단배를 강가에 묶어둔 뒤, 멀리 등불이 켜진 집을 찾아가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아침을 맞이하자 날씨는 화창하게 갰다.

 

허돈은 강으로 돌아가며 그곳 일대를 둘러보니 명당이었다. 갑자기 김해에서 이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싶었다. 그 뒤 허돈은 두어 차례 더 그곳을 지나치면서 금오산의 산세와 낙조를 보고, 큰 인물이 태어날 명당으로 여겼다. 김해로 돌아간 뒤 허돈은 족친(族親, 일가붙이)들을 설득하자 네 가구가 호응하여 함께 임은동에다 터를 닦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허돈의 가족이 배를 타고 서울로 가다가 구미 임은동을 지날 무렵, 그의 딸이 갑자기 복통을 일으켰다. 허돈은 하는 수 없이 강가에 배를 댄 뒤 인근 인동 장씨(仁同張氏) 의원을 찾아갔다. 의원의 처방에 딸은 병이 나았지만, 규중처녀가 외간의 진료를 받은 것은 당시 반가의 법도로 허물이었다. 마침 그 장씨에게 아들이 있어 그와 혼인을 시켰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김해 허씨 허돈 족친 네 가구는 구미 임은동에 정착하게 되고, 허돈은 임은 허씨(林隱許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저도 언제 그곳에 가보고 싶구먼요."

 

왕조경도 달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본이 망하고 중국과 조선이 해방되면 우리 같이 가 보세. 그때 내 고향에 가면 소를 잡아 오늘 먹은 멧돼지 구이를 대신 갚지."

"그런 게 아니라, 군장님이 하도 고향을 자랑하시기에 구경하고 싶어 그런 겁니다."

"아무튼, 좋소. 우리 다 같이 합심하여 일본을 중국에서 조선에서 몰아낸 뒤 서로 내왕합시다."

"좋습니다. 일본은 중·조 두 나라의 '철천지원수'지요."

 

소련으로 월경치 않은 까닭

 

세 사람은 잠자리에 들었다. 진운상은 곧 잠이 들었지만 허형식은 그 밤 따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몸을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였다. 왕조경도 말로만 전해 들었던 허형식 군장을 옆자리에 모시고 있자니 감격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 왕조경은 슬그머니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허형식의 다리와 발을 주물러 드렸다. 허형식은 아주 시원해 했다. 잠시 후 허형식이 말했다.

 

"왕 동지, 고맙소. 이제 그만 두시오."

"이렇게 다리와 발을 주물면 피로도 풀리지요. 그런데 허 군장님! 다른 간부들은 다들 중·소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넘어갔는데 왜 군장님은 가지 않았습니까?"

"……."

 

허형식은 잠자코 답이 없다가 한참 후 말했다.

 

"그건 내 자존심 때문이오."

"……."

"우리 '임은 허씨' 일가들은 고향집에서 일제에 쫓겨났소. 그래서 압록강을 건넜고, 서간도 남만에서도 다시 그들에게 쫓겨 여기(북만)까지 왔소. 여기서 다시 소련으로 국경을 넘어가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소."

"그래도 여기 있으면 목숨이 위험하지 않습니까?"

"목숨, 난 이미 항일빨치산이 된 날로 하늘에 맡겼소."

"그래도 허 군장 같으신 분은 당분간 몸을 피한 뒤 끝까지 살아남아 왜적을 무찔러야지요."

"고맙소. 하지만…."

 

허형식은 말을 아꼈다. 그는 혼자 생각했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기껏 60~70년 정도다. 이 길지 않은 인생을 깨끗이 살지 못하고,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 양심을 팔고, 조국과 인민을 배반하며, 그들의 사냥개가 된다면 이 어찌 사내대장부라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조상에 대한 불효요, 내 고향 구미 금오산 기슭에서 태어난 충절의 선조에 대한 배신이요, 조국에 대한 불충이다.

 

허형식은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다시 소련으로 넘어가 그들 도움으로 몸을 피한 뒤 해방을 맞는다면 그들의 요구를 거절치 못하는, 또 다른 외세에 놀아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그렇다면 조선 백성들은 진정한 해방을 맞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제 힘으로 살지 못하면, 남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어.'

 

허형식은 마음속으로 씁쓸히 뇌까렸다.

 


일제의 삼광작전

 

1910년 일본은 조선을 삼키고도 그들 성에 차지 않았다. 그들의 야욕은 중국 대륙까지 뻗쳤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고의로 만주사변을 일으켜 동북 삼성을 장악하고, 이듬해 창춘에다 괴뢰 만주국을 세웠다. 그러고도 일본의 야욕은 그칠 줄 몰라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도발하여 중국 대륙을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 잠식해 갔다.

 

일제는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만주지역의 항일세력을 말살한다는 '만주국 치안숙정계획'을 마련했다. 그런 다음 관동군을 대대적으로 증강하여 항일무장 세력과 그들 근거지에 대한 대토벌 작전을 펼쳤다. 그들은 '삼광작전(三光作戰)'이라 하여, 항일 근거지와 항일 부대원에 대하여 '모조리 죽이고(殺光)', '모조리 불사르고(燒光)', '모조리 빼앗는(槍光)' 혹독한 잔학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일제의 흉악무도한 대토벌 작전은 동북항일연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지도자들의 피살과 피검, 투항 등 그 뿌리조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1938년 한 해 동안 북만에서 일제에 귀순한 항일 대원이 무려 27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1938년 3만여 명에 이르던 동북항일연군의 병력은 1940년 5월에 이르자 1400여 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런 정황에 이르자, 중국공산당 북만·길동·동남만성위의 일부 간부들은 1930년대 말부터 소련을 왕래하며 원조를 요청했다. 이들은 극동 소련 하바로프스크에서 두 차례 회의를 열었다. 그 회의에서 남아있는 항일 역량을 보존하고, 앞날을 대비코자 항일연군 부대들을 소련 경내로 피신시키기로 결론을 내렸다.

 

독·소 전쟁으로 후방 극동의 치안이 매우 염려스러웠던 소련 측으로서도 제 발로 월경하겠다는 동북항일연군이 반가웠다. 그 언젠가는 극동의 판권을 두고 일본과 한 판 붙을 소련이기에 그때 그들을 아주 요긴하게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 무렵 동북항일연군의 소련 월경은 중·소 양측에 모두 이익이 되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윈-윈' 게임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내 중국공산당 성위에서는 1940년 가을부터 동북에 남아있는 항일연군부대들을 점차 소련 경내로 도피시켰다.

 

그리하여 연해주 보로실로프 근처에 있는 남(B) 야영에는 김일성, 안길(安吉), 이청(李靑) 등이, 하바로브스크 근처의 북(A) 야영에는 하진화(河振華), 원봉산(袁鳳山), 곽영귀(郭永貴), 왕효명(王效明) 등이 이동했다. 이들을 따라 중·조 항일연군대원과 간부들이 몰려갔다.

 

허형식도 중공당이나, 당신의 평생 동지 김책으로부터 소련으로 월경할 것을 여러 차례 종용 받았다. 하지만 허형식은 끝내 동북을 떠나지 않았고, 줄곧 동북 유격 근거지와 인민들을 지키며 보호했다. 허형식은 그의 양심상 도저히 동북의 인민을 버려둔 채 소련으로 월경하는 것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게 그의 양심이요, 자존심이었다.

 

산에 나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우지 마라

 

허형식 일족은 1908년 당숙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순국으로, 일제와 그 밀정들의 등쌀에 고향 조선 구미를 떠나 만주로 망명했다. 이제 또 다시 만주를 떠나 낯설고 물선 소련 땅으로, 그것도 만주 땅 수백만의 동포를 일제 사냥개들에게 그대로 두고 당신 목숨을 부지하고자 국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난 동북의 인민을 버리고, 소련으로 월경할 수 없었소."

"역시 제가 짐작한 대로입니다. 논어 자한 편에 보면 '날씨가 추워진 후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거창한 명분이 아니라, 내 마음속 작은 양심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소."

"그게 바로 공자의 말씀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는 허 군장의 언행에 감동한 나머지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엎드려 큰 절을 했다.

 

"그만 됐소. 나도 이러다가 슬그머니 소련으로 넘어갈지 모르지 않소."

"지금까지 동북에서 저희를 지켜주신 것만도 절을 열 번 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허형식도 일어나 답례를 하고는 달을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다. 갑자기 먼저 일제 사냥개들에게 희생된 조상지(趙尙志) 동지가 생각났다. 그는 참으로 용맹스런 선배 군장이었다.

 

가슴 쥐고 나무 밑에 쓰러졌다 혁명군

가슴에서 흐르는 피 푸른 들을 적신다

 

머나 멀리 고향산천에 부모형제 다 버리고

홀로 선 나무 밑에 한을 품고 쓰러졌다

 

산에 나는 까마귀야 시체보고 울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정신 살아있다

- '빨치산 추도가' 중에서

 

그 노래가 끝나자 왕조경이 화답하듯 노래를 불렀다.

 

국토가 갈라지고 천하가 울리네.

대포의 굉음소리는 제국주의가 약소민족을 침략하고 착취하는 상징일세.

나라가 없는데 가정이 어찌 존재하랴.

평화란 찾아볼 수가 없구나.

암흑과 광명,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투쟁으로 결정하세.

일어나라 중·조 인민들아!

단꿈에서 벗어나 총과 피로 전진하세.

세상의 가장 큰 원수는 일본

약탈과 방화, 강간과 모욕으로 나라와 민족을 멸하려 한다네.

조선과 합병하고 중국까지 삼키려는 야만과 야욕,

피맺힌 원한으로 적과 싸워 구축하자.

단결하라, 중·조 민중이여! ….

- '중·조인민연합가' 중에서

 

허형식도 왕조경의 선창에 따라 주먹을 불끈 쥐고 그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노랫소리는 어둠을 타고 청봉령 밀림 속으로 안개처럼 자욱이 스며들었다. 북만 청봉령 소릉하 계곡의 밤은 그렇게 스멀스멀 깊어갔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작품은 동북아역사재단 장세윤 연구위원의 <허형식 연구> <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 연세대 신주백 교수의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 허은 여사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중국동포사학자 서명훈, 김우종 선생의 저서 및 증언, 기타 동북에서 발간된 여러 문헌과 임은 허씨 문중의 허벽, 허호 선생 등 여러분의 도움과 자문으로 집필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태그:#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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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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