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들꽃> 해제

제목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국에서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이다. 나는 그 길에서 고향 출신의 한 순결한 파르티잔을 만났고, 그분이 위만군의 총탄에 불꽃처럼 산화한 북만주 깊은 산골짜기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최후의 만찬

 

허형식 군장은 왕조경과 진운상이 저녁밥을 짓는 것을 바라보다가 그도 개울물에 손을 닦고 밥 짓는 일을 거들었다. 어린 시절 그는 자기 집 계집종 춘옥이의 밥 짓는 일을 거드는 일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고, 그러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얼마나 혼이 났던가.

 

"군장님은 가만히 계시라요."

"나도 밥 짓는 것이 즐겁소."

 

허형식은 그때를 생각하며 싱긋 웃었다. 빨치산들은 상하 구분이 없이 식량은 각자 챙겼다. 그들은 늘 양쪽 어깨에다가 식량 주머니와 탄알 주머니를 X자로 둘러매고 다녔다. 빨치산 생활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허형식도 자기 식량 주머니에서 알곡 한 줌을 꺼내 밥 짓는 데 이미 보탰다.

 

세 사람은 계곡 옆에서 돌멩이를 괴어놓고 항고(반합)에 밥을 지었다. 왕조경은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하늘같이 우러러보던 허 군장과 함께 밥을 짓다니... 그는 배낭에서 장서린이 허 군장에게 특별히 선물로 준 멧돼지고기를 꺼냈다. 그는 모닥불에 아주 익숙한 솜씨로 멧돼지 고기를 구웠다.

 

"우리 부대장님이 허 군장님에게 특별히 드린 겁니다."

"고맙소."

 

허 군장은 왕조경이 잘 구운 멧돼지고기를 주머니 칼을 꺼내 삼등분하여 진운상과 왕조경에게도 똑같이 나눠줬다.

 

"아닙니다. 군장님이 다 드시라요."

"다 드십시오."

 

진운상과 왕조경은 말했다.

 

"먹는 데는 상하가 없소. 혼자 다 먹다가는 배탈도 나고..."

 

세 사람은 밥 지은 불에 둘러앉아 멧돼지구이와 함께 저녁밥을 맛있게 들었다.

 

"장 부대장 동지 덕분에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푸짐한 만찬이었소. 돌아가서 장 동지에게 나의 고마운 마음을 전해 주시오."

"그러겠습니다. 군장님!"

 

왕조경이 고개 숙여 예를 드리며 말했다. 

 

"뱃속이 놀라겠소. 늘 생식을 하거나 푸성귀만 먹다가 멧돼지고기가 들어오니까."

"그럴 때도 있어야지요. 저희 부대는 산중 숯막으로 깊은 골짜기이기에 이따금 멧돼지가 덫에 걸리지요. 그걸 잡아 참나무 연기로 훈제하여 갈무리한 뒤 대원들의 생일이나 귀한 손님이 올 때는 조금씩 꺼내 먹습니다."

 

왕조경이 대꾸했다.

 

"아무튼 내 평생 가장 맛있는 멧돼지구이였소."

"저도 그렇습니다."

 

잠자코 먹기만 하던 진운상이 말했다. 

 

세 사람은 청봉령 산기슭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개울에서 설거지를 깨끗이 한 뒤 그 자리에서 옷을 벗고 몸을 닦았다. 밤 개울물이 몹시 찼다. 그날은 음력 6월 21일로 그때까지 달은 뜨지 않았다.


하룻밤을 자도

 

 

허형식이 옷을 입으며 말했다.

 

"오늘 밤은 우리 세 사람 떨어져서 자지 말고 나란히 잡시다."

"군장님이 불편하실 텐데..."

 

"무슨, 그렇게 해요. 와, 이런 말도 있잖소.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왕 동지와는 초면인데, 밥까지 같이 먹고... 하룻밤 잠까지 자는 건 대단한 인연이오."

 

두 사람은 허 군장의 제의에 그대로 따랐다. 왕조경은 다시 감동했다. 역시 허형식 군장은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그가 풍문으로 들은바, 허형식 군장은 동북 제일의 빨치산으로, 그의 용맹성과 전투력은 북만에서 제일이라고 전해 들었다. 그런 허 군장을 그날 곁에서 뵈니까, 6척 큰 키에 눈썹이 짙으며 이목구비가 뚜렷한 매우 잘 생긴 인물, 그리고 부하를 대하는 인품과 그 태도에 왕조경은 그만 홀딱 반했다. 조금 전 멱 감을 때 훔쳐보니까 거시기도 일품이었다. 역시 소문대로 허 군장은 풍채도 좋고, 그 인품이 훌륭하다는 것을 느꼈다.

 

허 군장은 <손자병법>이나 <육도삼략> 등 중국의 전통 병법에도 매우 능한 무장으로, 나관중의 <삼국지>는 통달하고 있었다. 또 그는 의술에도 뛰어나 처방전도 잘 썼다. 당신 아버지 시산(是山) 허필(許苾)은 한학자요 의원이었으며, 그가 존경하며 따랐던 큰집 사촌 형 일창(一蒼) 허발(許坺) 역시 한학자요 의원이었다.

 

시산과 일창은 만주로 가기 전 구미에서도, 만주에서도 한의원으로 독립지사들의 군자금과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해방 후 일창은 만주에서 돌아와 서울 북창동에서 일창약국을 경영한 명의였다. 이렇듯 허형식은 의원 집안 태생이었기에 어깨너머 배운 의술로 항일 유격전 중에도 많은 부하들을 살려냈다고, 후일 그의 평생 항일 동지 김책은 회고했다. 

 

허 군장은 조선인이었지만 한어(중국어)도 매우 능숙했다. 왕조경은 그런 허 군장을 곁에서 지켜보며 속으로 뇌까렸다.

 

'당신은 조선인이지만, 우리 항일연군 군장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흠모합니다.'

 

세 사람은 이미 평평하게 다져 놓은 숙영지에 홑이불을 깔고 덮으며 나란히 누웠다. 허형식이 가운데 눕고, 그 좌우에 진운상과 왕조경이 누웠다. 그때까지도 하현달은 뜨지 않았다. 하지만 여름밤 북만 하늘의 별은 잘 익은 석류처럼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별이 참 아름답군!"

 

허형식은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감탄하여 말했다. 그는 어린 시절 여름이면 구미 임은동 고향 집 마당 평상에서 하늘의 별을 헤아리다가 잠들곤 했다. 그럴 때면 은하수가 금오산 현월봉 위로 흘렀다. 허형식은 문득 어린 시절을 되새김질했다.

 

 

허형식은 그날 따라 춘옥이가 거듭 생각이 났다. 자기보다 한 살 위인 그는 '도련님'이라 부르며 엄청 따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루어질 수 없는 풋사랑'으로 여겨지면서도 끝내 자기가 그를 구하지 못한 게 당신 잘못 같기도, 그것은 어른들이 말하는 운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춘옥이가 허형식을 항일의 길로 인도한 요인이기도 했다.

 

허 군장의 고향

 

"정말 은하수의 별들이 금방 쏟아질 것만 같구먼요."

 

왕조경도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에 허형식은 현실로 돌아왔다.

 

"내 고향보다 이곳 북만은 북극이 가까운 탓인지 북극성도, 북두칠성도 더 밝은 것 같소."

"아, 네."

 

그 말을 받아 왕조경은 허 군장에 대한 궁금한 점을 물었다.

 

"군장님, 고향은 어디신가요?"

 


허형식은 한참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그는 그때까지 춘옥이의 잔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내 고향? 여기서 상당히 머오... 조선 남쪽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 264번지가 내 고향 집이오."

"아주 고향 집 주소를 정확하게 외우십니다."

 

"조국 해방이 늦어 행여 고향산천이 변해 고향 집을 못 찾을까 주소를 여러 번 되뇌니까 아주 머릿속 깊이 새겨졌소."

"그 구미란 곳이 한성과는 멉니까?"

 

왕조경은 허형식을 말을 되받아 물었다.

 

"그럼. 한성에서 한 6백 리쯤 떨어진 남쪽이오. 그곳에 금오산이라는 높은 산이 있고, 그 앞에 넓은 평야가 펼쳐지고, 그 가운데로 낙동강이라는 큰 강이 흐르고 있소."

"아주 살기 좋은 고장인 것 같습니다."

 

"그럼, 내 고향마을은 산남수북(山南水北)으로 명당 마을이지요. 거기다가 예로부터 금오산 정기를 받고 큰 인물이 난다고, 내 고장 일대는 여러 곳 사람들이 몰려들었소. 김해에 사시던 내 고조할아버지도 돛단배를 타고 그곳을 지나다가 그 일대 산수경치에 반해 정착했을 정도로."

"아, 네에."

 

왕조경은 감탄을 연발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이 '들꽃'은 주 2회 연재로 매주 월, 목요일에 실릴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작품은 동북아역사재단 장세윤 연구위원의 <허형식 연구> 및 <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 연세대 신주백 교수의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 허은 여사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중국동포사학자 서명훈, 김우종 선생의 저서 및 증언, 기타 동북에서 발간된 여러 문헌과 임은 허씨 문중의 허벽, 허호 선생 등 여러분의 도움으로 집필하고 있음을 밝힌다.


태그:#들꽃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