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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훈민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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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중간고사가 코앞이다. 아이들 역시 시험 준비에 죽을 맛일 테지만, 교사들도 문제 내느라 분주하기는 매한가지다. 더욱이 다섯 개 중에 하나를 고르는 기존의 선다형 문제와 함께 서술형 문제를 30% 이상 출제하도록 의무화돼 있어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단답형이라면 모를까, 답을 문장으로 요구하는 서술형은 아이들에게나 교사에게나 꽤 부담스럽다.

수업 중 "생각해서 써 봐라"는 말을 제일 싫어하는 아이들이니 서술형 문제가 달가울 리 없다. 그렇다면 교사들은 왜 싫어할까. 언뜻 하나의 답과 네 개의 오답을 일일이 찾아 적는 번거로움이 없으니 훨씬 수월할 것 같지만, 채점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난 1학기 때는 한 학년 전체 아이들 답안지를 채점하느라 눈이 빠질 뻔했다. 며칠 동안 답안지와 씨름을 해야 했다.

'암호' 같은 아이들 답안지, '해독' 시간 오래 걸린다

미리 제시한 기준에 따라 채점하는 게 뭐 그리 번거로울까 싶겠지만, 아이들 답안지 곳곳이 생각지도 못한 '지뢰밭'인 까닭이다. 우선 글씨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악필 정도를 넘어 판독할 수 없는 답안지가 적지 않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 이른바 '엄지족'들이 태반인 탓일 텐데, 수행평가 삼아 공책 검사라도 할라치면 이게 낙서장인지, 공책인지 헛갈릴 지경이다.

맞춤법이 틀리는 건 더 큰 문제다.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 힘든 괴발개발 답안지는 그나마 많지 않아 다행이지만, 맞춤법의 경우에는 제대로 쓴 답이 더 적을 정도로 심각하다. 국어 과목 시험이 아닌 만큼 굳이 맞춤법을 채점 기준에 포함하지도 않고 의미만 맞으면 정답 처리해주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채점하면서 명색이 고등학생들인데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하다.

지난 1학기 때 부득이 정답 처리했던 사례를 잠깐 소개한다. 서술형 답안 중에 '왜소하다'를 '외소하다'로, '전자 결제'를 '전자 결재'로, '자기 계발'을 '자기 개발'로, '재무 설계'를 '제무 설계'로 써도 그냥 정답으로 인정했다. 이것들을 모두 오답 처리하게 되면, 서술형에서 0점짜리 아이들이 속출하고 "이게 국어 시험이냐"는 반발이 아이들은 물론 학부모들로부터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과목을 배우든 그 기본은 우리글과 우리말이라는 생각에, 고민 끝에 이번에는 채점 기준에 맞춤법 조항을 삽입하기로 했다. 미리 기준을 통보하면서 맞춤법에 서툰 아이들과 자녀의 성적에 민감한 학부모들에게 '양해를 구하기 위해' 얼마 전 겪었던 황당한 경험을 들려줬다. 공감하다 보면 시험과 채점에 대한 신뢰도 얻을 수 있고, 국어에 대한 무관심도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 여겼다.

며칠 전 집 근처 찜질방에 갔을 때다. 승강기 안쪽 벽에 걸린 안내문이 눈에 띄었다. 큼지막하게 적힌 글귀인즉슨 이랬다.

"귀중품은 카운터에 '맞겨' 주시기 바랍니다.
Please, check your valuables at the front desk."

외국인들이 자주 찾는 것 같지도 않은데, 친절하게도(?) 안내문 아래에 영문이 함께 적혀있었다. 번역한 영문은 오탈자 하나 없이 정확한데, 정작 우리글 맞춤법은 틀려 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려다가, 오지랖 넓게 일부러 카운터에 가서 틀리게 적은 부분을 수정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솔직히 "너나 잘하세요"라는 대답을 들을까 봐 조금 두렵기는 했다. 다만 돈이 들거나 손이 많이 가는 것도 아닌 데다 아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순간 나름 '꼰대 같은' 사명감 같은 게 느껴졌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답변에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손님, 대체 뭐가 틀렸다는 건데요?"

단지 틀린 맞춤법을 교정하려는 것뿐인데, 초면에 느닷없는 '지적질'이 돼버려 순간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번거롭게 해드렸다면, 저로 인해 마음이 불편하셨다면 용서해 달라며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바로 옆 다른 안내판에서도 잘못된 게 보였다. "지나친 휴대전화 사용을 삼가합시다" 그러나 차마 그것을 또 지적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낯 뜨거운 언쟁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맞겨'가 틀렸다는 걸 모르는 아이는 없었지만, 이번에는 '읽는 게' 문제였다. 마 아래의 받침이 'ㅈ'이 아니라 'ㅌ'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느냐며 하나같이 낄낄댔지만, 많은 아이가 '티읕'이 아닌 '티긑'으로 읽었다. 그뿐 아니다. 'ㅋ'을 '키옄'으로, 'ㅎ'을 '히응'으로 발음하는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한글 자음을 칠판에 적고 따라 읽는데,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고등학교가 아닌 초등학교 교실로 여겼음직하다.

'삼가합시다'가 잘못된 표현이라는 건, 외려 아는 아이들이 드물었다. '삼갑시다'가 올바른 표현이라고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낯설어했다. 되레 "선생님이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니냐"며 되물었고, 몇몇 아이들은 바로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더니 '위대한 발견'이라며 놀라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의미만 서로 통하면 되지, 맞춤법이 뭐 그리 중요하냐"며 반문하는 아이도 있었다. 여태껏 생활하면서 단 한 번도 문제되거나 불편했던 적이 없다면서 말이다.

우리도 잘 모르는 우리말, 외국인이 비웃는다

몇 해 전 함께 근무했던 원어민 선생님이 한국어 공부가 정말 힘들다며 하소연했다. 보통 외국인들이 특히 한국어를 배우기 어려워 한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들은 대개 확연히 다른 문장 구조와 변화무쌍한 동사와 형용사를 익히기 어렵고, 한자를 모르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든다.

그러나 그는 조금 다른 이유를 댔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은 물론 함께 근무하는 동료 교사와 자신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조차 같은 글자를 두고 발음이 다 달라 어리둥절하다고 했다. '빚이 많다'를 '비시 많다'고 말하는가 하면, '포도밭에 가자'는 말을 '포도바세 가자'로 발음하고, 숫제 '싣고'라는 발음을 두고는 한국인들끼리 '싣꼬'가 맞네, '실코'가 맞네 하며 티격태격하는 걸 본 적도 있단다.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발음을 두고, 처음에는 사투리인 줄 알았단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들조차 한국어에 대한 정확한 발음을 학교에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는 말을 듣고 고개가 끄덕여졌다고 했다. 틀렸다고 굳이 지적해주는 이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다 보니 사람마다 발음이 '자유분방해진'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외국인인 자신이 웬만한 한국인들보다 국어사전을 훨씬 더 많이 펼쳐봤을 거라며 조롱하듯 말했다. '넓다'를 '널따'로, '밟다'를 '밥따'로 배웠다는 그는, '넙따'거나 '발따'로 대충 발음하는 한국인들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기 어렵다고 했다. 외국인이 한국인들의 부정확한 한국어 발음을 지적하고 교정해주는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더욱이 그는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한국 상품 중 한국어 이름을 붙인 걸 거의 본 적이 없다며 무척 놀라워했다. 당시 내 자동차 이름의 뜻이 뭐냐고 묻는 과정에서 꺼낸 이야기인데, 정작 나는 그 점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내수용과 수출용의 이름이 다르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도, 내수용조차 왜 영어이거나 국적 불명의 이름뿐인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던 거다.

수업 내내 아이들은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해 무관심한 현실을 반성했다는 듯 연신 머리를 주억거렸다. 나아가 자기 옷에 쓰인 브랜드 이름과 학용품에 적힌 디자인들이 하나같이 영어 일색이고, TV 광고도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이름에서도 우리말과 우리글이 홀대받고 있다면서 맞장구쳤다. "한국어가 영어에 잡아먹힐 판"이라며 우려하는 아이도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그렇잖아도 공부할 내용이 많아 힘들다며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을 아이들이다. 그런데, 수업 한 시간 만에 이구동성 맞춤법이 틀리면 오답 처리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맞춤법뿐만 아니라 이참에 아예 띄어쓰기조차 채점 기준에 반영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다들 시험공부를 하기 전에 맞춤법부터 익혀야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공교롭게도 한글날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태그:#한글날, #맞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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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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