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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버스 시간에 늦을 뻔했다.

메리다의 밤 골목길이 너무나 눈부셨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 울퉁불퉁 차와 사람이 같이 다니기에는 비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오래된 비틀 한 대가 라이트를 켜고 서 있다. 낮은 주택의 처마 아래에는 가로등 불빛이 반짝이고 가끔 원주민 복장을 한 여인들이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지나간다. 마치 요정의 정원처럼 고요한 골목길. 수백 년 전 이곳을 지나갔을 바람 냄새가 지금 내 코끝을 간질이는 기분이었다.

울퉁불퉁한 돌 바닥과 비틀이 마치 시간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딱 들어맞는다.
▲ 해가 진 메리다의 골목길 울퉁불퉁한 돌 바닥과 비틀이 마치 시간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딱 들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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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 속에 잠든 고대 마야 도시

기절이라고 해도 좋았다. 치첸이트사에서 돌아오자마자 팔렝케로 가는 야간버스를 타고 9시간 내내 죽은 듯 잠들었다. 차라리 버스가 이대로 영원히 달리기를 바랄 정도였다. 피로가 덜 깬 상태로 도착했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터미널에서 나와 가장 먼저 눈에 띈 숙소에 아무렇게나 짐을 던져두고, 바로 떠나는 투어 차량을 수배했다. 비수기라 그런지 손님도 없는 숙소에서 파리만 쫓고 있던 청년은 내가 숙박과 투어를 동시에 요구하자 무척이나 반가운 표정이었다. 7시 반에 숙소에 도착해 30분 뒤인 8시, 유적지로 떠나는 차량에 올랐다.

창문도 열리지 않는 봉고차에 15명이 꽉 들어찼다. 세계 3대 마야 유적 중 하나라는 팔렝케 유적까지는 겨우 차로 20분.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는 온통 숲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250년 전 스페인 선교사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팔렝케는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정글 속에 잠들어 있었다. 정글 숲 사이로 반듯하게 닦인 시멘트 길이 끝나고, 발끝에 습기를 머금은 잡초가 닿는다 싶을 때 잠들어 있던 고대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짝 흐린 하늘과 젖은 아침 공기 사이로 밀려드는 습한 향기가 미묘하게 공간의 흐름을 비틀었다. 그 틈 사이로 어디선가 금방이라도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마야인들이 뛰쳐나올 것 같았다.

팔렝케라는 이름은 원래 지명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이웃 마을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팔렝케 주변은 멕시코에서도 많은 강수량을 자랑하는 지역으로 유적은 정글 속에 감춰져 있다.
▲ 팔렝케 유적 팔렝케라는 이름은 원래 지명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이웃 마을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팔렝케 주변은 멕시코에서도 많은 강수량을 자랑하는 지역으로 유적은 정글 속에 감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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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마야 문명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인가 있다는 것은 감지해 왔다. 유카탄 반도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자 했던 스페인 신부들도 알고 있었고, 마야인들을 침략했던 스페인 군대도 기록을 남겨놓았다.

그 기록은 수십 년째 먼지만 쌓여 있었다. 당시 후세 사람들에게 그 기록은 단지 '이상한 나라'에 대한 표현에 불과했을 것이다. 지도에도 등장하지 않는, 폐허가 된 팔렝케의 등장과 함께 그 '이상한 나라'는 현실이 되었다. 나는 마치 허리춤에 채찍을 차고 담뱃대를 꼬나문 인디아나 존스가 된 기분으로 첫 번째 계단을 올랐다.

보기에도 아찔한 경사의 계단은 습기에 젖어 미끈거리기까지 했다. 뾰족한 신전의 측면에는 마야인이 조각한 해골 장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부로 들어가는 좁은 문 속은 온통 축축하다. 이곳에서 발견됐다는 파칼 왕의 석관은 박물관에 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아서인지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마저 들었다. 주위를 둘러싼 정글 깊은 곳 어디선가 원숭이 울음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에 놀라 달아나는 새들의 날갯짓이 눈앞을 가른다.

파칼 대왕은 팔렝케의 중심부에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축했는데, 3250 평방미터의 대지 위에 세워진 높이 30미터의 이 신전은 팔렝케의 영적인 심장부다.
▲ 파칼 왕의 무덤이 발견된 비문의 신전(Temple of the Inscriptions) 파칼 대왕은 팔렝케의 중심부에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축했는데, 3250 평방미터의 대지 위에 세워진 높이 30미터의 이 신전은 팔렝케의 영적인 심장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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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밖에 발굴되지 않은 미지의 마야

숲 속 너머에 있는 옛 궁전에 도착했다. 한쪽에는 붕괴된 아치형 구조물의 잔해가 세월의 깊이만큼 굵은 나무뿌리와 얽혀 있고, 이끼에 덮인 언덕 위로 높은 탑이 솟아 있다. 석벽들은 마치 거대한 홍수에 휩쓸리기라도 한 것처럼 부서져 있다. 여기에 사람이 살았음을 증명하듯 사람의 형상이 조각돼 있었다.

7세기 마야를 통치했던 파칼 왕의 명령으로 지은 이 궁전에는 동양식 탑도 등장한다. 석기시대의 사람이었던 그들에겐 바위를 캐거나 자를 금속 도구도, 언덕으로 바위를 나를 바퀴도 없었다. 오로지 사람의 힘만으로 이 같은 건물을 지은 것이다.

지금은 폐허가 된 엘 팔라시오는 약 5세기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 파칼 왕의 궁전, 엘 팔라시오(El Palacio) 지금은 폐허가 된 엘 팔라시오는 약 5세기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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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와 궁전외에도 크고 작은 돌탑들이 정글 여기저기 솟아있는 팔렝케의 풍경을 내려다 보고 있으면 인디아나 존스가 된 기분을 맛볼 수 있다.
▲ 팔렝케의 전경 피라미드와 궁전외에도 크고 작은 돌탑들이 정글 여기저기 솟아있는 팔렝케의 풍경을 내려다 보고 있으면 인디아나 존스가 된 기분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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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궁전 내부에는 모든 계단이 모이는 야외 마당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어김없이 끔찍한 사람 공양 의식이 거행됐다. 팔렝케를 지어 자신의 권력을 과시했던 파칼 왕은 마야의 통치자로서 전쟁 포로들을 이곳에서 죽여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그들은 '피의 의식'을 통해서만 깨달음에 도달하는 동시에 신과 교감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도시 아래로 수로를 지어 농토를 개간할 만큼 비상한 두뇌를 지녔던 팔렝케의 마야인들 역시 신에 대한 맹목적 신뢰는 여전했던 셈이다.

높은 언덕에 올라 팔렝케의 모습을 발아래 펼쳐 놓으니 그 모습이 장관이다. 염탐이라도 하듯 매달린 덩굴 식물들 사이로 솟은 건물들은 잃어버린 도시를 찾으러 온 18세기 스페인 탐험가가 첫발을 내디뎠던 그 순간을 상상하게 한다.

팔렝케의 유적지는 아직도 발굴이 끝나지 않았다. 고작 약 5%만 발굴했을 뿐이다. 당장 옆으로 흐르는 개울가를 넘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면, 아직도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품은 석벽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마야의 시대는 끝났지만 마야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구 위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는 정글로 뽑히는 이곳 치아파스 산기슭. 바로 이곳에 잠든 고대 도시 팔렝케는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품은 채 누군가의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다.

정글 속에는 아직도 팔렝케 유적의 95%가 비밀을 지닌 채 잠들어 있다.
▲ 팔렝케를 둘러 싼 정글 정글 속에는 아직도 팔렝케 유적의 95%가 비밀을 지닌 채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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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 여행정보
과테말라의 티칼(Tikal), 온두라스의 코판(Copan)과 함께 3대 마야유적지로 불리는 팔렝케(Palenque)는 이제 겨우 5퍼센트 정도 발굴된 세계 최대 규모의 마야도시다. 이 유적지 하나가 팔렝케 도시 전체를 먹여 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팔렝케 시내 중심가에 유적지로 가는 승합차를 쉽게 탈 수 있지만,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팔렝케 유적과 미솔하(Misol-Ha) 폭포, 아구아 아술(Agua Azul) 계곡을 묶어서 하루에 다녀오는 1일 투어를 신청한다. 매일 아침 8시 출발하는 투어 차량을 타고 오전을 팔렝케 유적에서 보낸 뒤, 오후에 폭포와 계곡에 들러 더위를 흘려보내는 일정이다.

일일이 차를 찾아 타지 않아도 돼 여러모로 편리하며, 투어가 끝나는 저녁 시간에 맞춰서 다음 도시로 떠나는 야간버스를 탈 수도 있다. 팔렝케 유적의 입구에는 유적지에서 발굴된 각종 조각상과 무엇보다 파칼 왕의 석관을 전시하고 있으니 절대 놓치지 말자. 아래는 유적지의 입장료와 투어 비용(2013년 1월 기준). 단, 1일 투어에 입장료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팔렝케 유적 입장료 :57페소(한화 5000원)

1일 투어비 : 150페소(한화 1만 4000원)

좀 더 자세한 팔렝케 유적 투어 정보는 블로그를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6396732



태그:#팔렝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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