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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 동안 남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박타푸르 마을. 당나귀가 많은 마을이다.
 박타푸르 마을. 당나귀가 많은 마을이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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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가 다 돼서야 길을 나섰다(관련기사 : 600달러 털리고도 웃는 이 남자, 정말 '이해불가'). 일찌감치 마을을 떠난 트레커들은 세 시간 거리만큼 앞서 걷고 있겠지. 느리게 가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멈추는 걸 두려워하라던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만. 이건 느려도 너무 느린건가.

더스틴과 단둘이, 뚜벅뚜벅. 설산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설산 대신 푸른 여름 나무들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해발 700m에서 5700m까지 아우르는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 광범위한 고도를 스쳐 가는 탓에 히말라야의 사계절을 모두 볼 수 있다고 하더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아마 여름인가 보다.

설산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설산 대신 푸른 여름 나무들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해발 700m에서 5700m까지 아우르는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 광범위한 고도를 스쳐 가는 탓에, 히말라야의 사계절을 모두 볼 수 있다고 하더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아마, 여름인가 보다.
 설산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설산 대신 푸른 여름 나무들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해발 700m에서 5700m까지 아우르는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 광범위한 고도를 스쳐 가는 탓에, 히말라야의 사계절을 모두 볼 수 있다고 하더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아마, 여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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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타푸르 가는 길.
 박타푸르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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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한참 밑자락이라 그런지 산세가 험하지는 않다. 히말라야의 여름 길을 쉬엄쉬엄. 네 시간 정도 걸으니 마을에 가까워졌다. 마을과 나 사이, 돌무더기 급경사가 등장했다. 이것만 넘으면 마을이다. 아늑한 산장. 영광의 샤워. 따뜻한 저녁밥. 마을에 닿으면 누릴 수 있을 호사를 떠올리며 허겁지겁 길을 올랐다.

"오!"


더스틴의 탄성. 설산이라도 나왔나? 오! 돌무더기 정상 앞으로, 느닷없는 거대한 평야 지대가 등장했다. 산 중턱 평야 지대. '딸' 마을이다.

'호수'라는 뜻의 네팔어 '딸'. 딸은 예전엔 호수였던 지역으로, 물을 메꾸어 마을을 형성한 곳이라고 한다. 평야 지대를 둘러싼 푸른 산 아래로, 이곳저곳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어렸을 때 골목 아이들과 뛰어놀다 딱 이맘때쯤. 해가 저물어가는 오후 5시쯤. 집집이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밥솥이 칙칙폭폭 하고 울던, 그때의 푸근한 느낌이 떠오른다. 그 시절은 어느새 옛날이 되었나. 오늘도 수고했다고, 밥 짓는 히말라야의 작은 마을이 우리를 푸근히 맞이한다.

마을 길에 들어서니 브렛이 우리를 반긴다. 프랑스 일행과 함께 오후 2시쯤 도착했다며, 머물고 있는 숙소로 우리를 안내했다. 마당 한쪽에 앉은 포와 조세프, 람은 이미 카드 게임이 한창이다. 어제 만난 사이인데. 오랜 시간을 함께한 정겨운 동지처럼, 반갑고 또 반갑다.

'호수'라는 뜻의 네팔어 '딸'. 딸은 예전엔 호수였던 지역으로, 물을 메꾸어 마을을 형성한 곳이라고 한다.
 '호수'라는 뜻의 네팔어 '딸'. 딸은 예전엔 호수였던 지역으로, 물을 메꾸어 마을을 형성한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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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마을 가는 길의 풍경
 딸 마을 가는 길의 풍경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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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발이 늦으면 습관이 그렇게 굳어지나 보다. 다음날도 우리가 꼴찌다. 마당에 해가 가득 들어선 오전 9시 반이 돼서야 길을 나섰다. 일찍 출발해야 선선한 날씨에 걸을 수 있고, 해가 다 뜨기 전이라 구름도 덜 껴서 경치도 좋고…. 일찌감치 나서야 하는 이유는 무수히 많지만, 아직 우리의 게으름을 털어내기엔 역부족이다.

조세프와 포, 그리고 그들의 가이드 람은 8시간이 걸리는 차메 마을까지 간다며, 우리가 일어나기도 전에 길을 나섰다. 우리가 가이드를 데리고 왔다면 어땠을까. 8시간 걷자고 하면 에이. 뭘 그렇게 많이. 7시에 출발해야 한다고 하면 에이. 뭘 그렇게 일찍, 하며 말을 더럽게도 안 들었겠지. 우리 같이 말도 안 듣고 게으른 트레커들을 데리고 다녔다면 람도 참 피곤했을 거야. 9시 반이 돼서야 길을 나서는 게으름뱅이 두 마리를 데리고, 하루에 8시간을 걸을 순 없잖아.

우리는 4시간 거리인 바가지르찹까지만 가기로 했다. 역시나 많이 힘들지 않은 산행이다. 슬슬 걸어 바가르찹에 도착. 조금 욕심이 생긴다. 다음 마을까지 가기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걷다가 잠시 뒤를 돌았는데. 가슴이 철렁. 히말라야에 올라 처음 마주하는 설산. 마나출루다.

바가르찹을 벗어나 다나큐로 가는 길. 하얀 마나출루 봉우리가 우리 뒤로 나타났다.
 바가르찹을 벗어나 다나큐로 가는 길. 하얀 마나출루 봉우리가 우리 뒤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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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세는 험하지 않지만, 아슬아슬한 절벽길을 따라 걷는 길이 많다.
 산세는 험하지 않지만, 아슬아슬한 절벽길을 따라 걷는 길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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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멋있다. 그렇지."
"응…. 그냥. 그냥. 와…."


하얗고 거대한 봉우리. 열 걸음만 다가가면 만질 수 있을 것 같다. 등 뒤에 선 마나출루의 모습을 보려, 자꾸만 고개를 돌린다. 앞으로 갈수록 조금씩 멀어지는 마나출루 탓에, 느렸던 발걸음이 더 느려진다.

"더 올라가면 더 멋진 설산이 나올까?"
"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말도 안 되는 그 일이, 다음 마을 다나큐에서 벌어졌다. 우리의 배경을 가득 메운 마나출루의 봉우리 맞은편. 커다란 설산들이 등장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조금씩 발을 뗄 때마다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오는 하얀 봉우리들.

다나큐에서 짐을 풀까. 일단 차를 한잔하자. 이렇게 멋진 설산을 두고 느긋이 앉아 차를 한잔하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지. 커다란 컵에 가득 담긴 따뜻한 홍차를 호호 불어 마신다. 히말라야의 하루는 이렇게 요약된다. 아침에 일어나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선다. 2시간 정도 걷고 차 한잔. 다시 두 시간 정도 걷고 점심과 차 한잔.

오후 3시, 4시경 도착한 마을에 짐을 풀고, 전 마을에서 만났던, 혹은 새롭게 만난 트레커들과 저녁 식사를 한다. 카드 게임과 수다로 시간을 채우며 밤 9시를 기다리다 잠이 든다. 걷고, 쉬고, 풍경에 감탄하다,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잠드는. 단순하고 풍요로운 생활이다.

트레킹을 하다가 마시는 차 한잔은 큰 기쁨이다. 달달하고 따뜻한 홍차 한 잔에, 세상 어느 찻집에도 없을 멋진 풍경까지.
 트레킹을 하다가 마시는 차 한잔은 큰 기쁨이다. 달달하고 따뜻한 홍차 한 잔에, 세상 어느 찻집에도 없을 멋진 풍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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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하루. 걷고, 쉬고, 풍경에 감탄하다,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잠드는. 단순하고 풍요로운 생활이다.
 히말라야의 하루. 걷고, 쉬고, 풍경에 감탄하다,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잠드는. 단순하고 풍요로운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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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끈한 차를 몸속에 부어내고 있으려니, 눈에 익은 체코 커플이 마을로 들어오는 게 보인다. 마나출루의 설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걷는 그들. 우리도 저런 모습이었겠지.

"산장에 저희랑 함께 있던 커플 기억나세요? 같이 온 체코 친구들이에요. 어제 막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한 친구 한 명을 마중하러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갔어요. 우리는 천천히 가고, 그 친구들은 이제 도착한 친구와 함께 속도를 내서 걷기로 했어요. 핸드폰도 없고 인터넷도 안 되지만, 서로 속도를 조절해서 가다 보면 언젠간 만날 거니까."


천천히 가야 하는 체코 커플은 다나큐에서 머물겠다고 했다. 우리는 한 시간 거리인 띠망까지 간다. 어제 누군가에게서 슬쩍, 띠망의 전망이 좋다는 소리를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경치가 더 나아진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주워 들은 소식을 믿어보기로 한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길에 자주 등장하는 현수교. 사람만 지나가는 건 아니다. 당나귀 행렬이 지나갈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다리를 건넜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길에 자주 등장하는 현수교. 사람만 지나가는 건 아니다. 당나귀 행렬이 지나갈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다리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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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없는 수많은 폭포. 차갑게 내리붓는 폭포를 맞으며 걸어야 할 때도 있다.
 이름도 없는 수많은 폭포. 차갑게 내리붓는 폭포를 맞으며 걸어야 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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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큐가 멀어질수록, 띠망이 가까워질수록, 설산의 전경은 더 극적으로 펼쳐졌다. 바가르찹에서부터 우리를 따라온 마나출루는 아직 우리 뒤에, 묵묵히 서 있다. 오른편으로는 이름 모를 산이 묵직하게 우리를 내려다본다. 우리가 가는 길 앞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하얀 설산. 마나출루보다 실제 크기는 작겠지만, 지척에 있기에 믿을 수 없이 크고 아름답다.

파노라마로 펼쳐진 차가운 설산의 풍경. 그 중앙에는, 그래, 이곳은 현실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듯, 봄 같은 계곡이 흐르고 초록의 나무와 분홍색 꽃들이 널려 있다. 어제는 그제보다, 오늘은 어제보다 멋지다. 이런 믿을 수 없는 광경들이, 산 위로 갈수록 더 아름답게 펼쳐지겠지. 그러다 하산을 할 때 즈음에는, 다시 지상의 경치들과 조금씩 비슷해져 가겠지. 그래도 어쩐지, 아쉽고 슬프진 않을 것 같다.

띠망에 닿았나 보다. 작은 식당이 두 개 보인다. 이제 그만 가고 싶은데, 산장은 어디 없나. 마을 초입에는 항상 한두 개 정도의 숙소들이 들어서 있다. 여러 개의 숙소 중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잡고 싶다면, 20여 분 정도를 더 걸어 마을의 중앙으로 가는 것이 좋다. 띠망도 그럴 테지만, 힘이 빠져 이제 그만 가련다.

띠망 산장에서 본 설경
 띠망 산장에서 본 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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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묵을, 작은 나무방.
 우리가 묵을, 작은 나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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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식당에 방이 있나 싶어 물었다. 차가운 공기에 볼이 빨개진, 수줍은 얼굴의 젊은 아주머니가 부엌에서 나왔다. 식당 옆으로 나란히 난 세 개의 나무문. 이곳이 방인가 보다. 아주머니가 중앙으로 난 방문을 열었다. 네팔 신문으로 사방을 도배해 놓은 작은 나무 방이다.

조용하고 아늑하다. 따뜻하게 씻으라며, 방금 끓여 김이 폴폴 나는 물을 양철 대야 한가득 담아다 주신다. 아주머니처럼 볼이 빨간 조그만 여자아이가 부엌에서 뛰어나왔다. 아이가 뛸 때마다, 양 갈래로 묶은 아이의 검은 머리도 하늘 위로 폴짝폴짝 뛰었다. 나를 발견한 아이가 동그랗고 검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아담한 식당 건물 뒤에는 웅장한 설산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설산의 하얀 얼굴이 저무는 석양에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핑크빛 설산 앞에 선 작은 아이. 설산을 보고 자랐을 아이의 두 볼. 참 빨갛다. 예쁘다.

설산을 보고 자랐을 아이의 두 볼. 참 빨갛다. 예쁘다.
 설산을 보고 자랐을 아이의 두 볼. 참 빨갛다.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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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 테라스에서 다시 한 번, 차 한잔.
 산장 테라스에서 다시 한 번, 차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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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품으로 달려가는 아이의 뒤를 따랐다. 저녁 준비가 다 되었다. 어두운 부엌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히말라야 산 속에서 보내는 또 다른 밤. 오늘은 산장 가족과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다. 다른 트레커들은 아마도, 숙소가 몰려 있는 마을의 중심지에서 짐을 풀었겠지.

지난 3일과는 다른 밤이다. 설레는 자기소개도, 밤을 지새우는 카드 게임도 없다. 끝나지 않을 여행 이야기도 없다. 여행자들과 함께 보내는 시끌벅적한 히말라야의 밤도 좋지만, 오늘 밤도 더없이 좋다. 조용한 이곳에서, 볼이 빨간 아주머니가 해 주시는 집 밥을 먹으며, 설산을 핑크색으로 물들이다 이내 저버리는 해를 보며, 그렇게 마무리하는 하루.  

그나저나 이곳의 달밧(네팔식 백반). 지금까지 먹은 달밧 중 최고다.

띠망의 작은 산장
 띠망의 작은 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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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망의 밤. 작은 산장 뒤로, 해가 저물어들었다.
 띠망의 밤. 작은 산장 뒤로, 해가 저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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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히말라야 , #띠망, #안나푸르나, #다나큐, #바가르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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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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