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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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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돈 입금됐어."
"무슨 말이에요?"
"보증금 말이야. 전에 살던 ○○ 아파트 있잖아. 몇 달 전에 그곳 회사 명의로 된 통장을 찾아냈거든."

2004년 10월에 결혼했다. 결혼하기 전 3년 정도를 15평짜리 아파트에서 살았다. 이른바 '몽당연필 아파트'로 불리던, 한 동짜리 소규모 임대아파트였다. '몽당연필'은 지방 중소도시 외곽 들판 한 가운데 서 있는 임대아파트를 가리켰다. 홀로 우뚝 서 있는 모습이 연필을 꽂아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몽당연필 아파트의 전성기는 2000년대를 전후로 한 때가 아닌가 한다. 우후죽순 생겨난 것은 1990년대 중반경부터였다. 그 배경에 국민주택기금과 각 지역의 수많은 건설업자가 있었다. 그들은 국민주택기금을 눈 먼 돈쯤으로 여겼다. 기금을 빌려 아파트를 세워 올리는 일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때였다.

부도 임대아파트 속출... 설마 했는데 내가 살던 곳까지

오래 되지 않아 여기저기 적신호가 켜졌다. 부도 임대아파트가 속출했다. 사람들이 외면하기 시작했다. 부도와 외면이 연달아 이어졌다.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한 업자가 다른 지역에 세운 아파트까지 부도 여파에 휘말리게 되는 일이 생겼다. 부도 열풍은 쓰나미처럼 전국을 휩쓸었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막연히 여겼다. 하지만 부도는 갑작스레 찾아왔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사를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세상 물정 어두운 풋내기 교사였다. 그것들이 아파트 부도를 예고하는 자연스런 과정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침내 소문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부도 이야기를 들은 입주민들이 술렁거렸다. 그즈음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임대 보증금으로 맡긴 돈은 천만 원.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저축한 돈을 보태 시내에 있는 또 다른 임대아파트에 신혼 살림을 차릴 계획이었다.

조바심이 일었다. 과연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을 마치기는 했다. 그 전에 양가 상견례를 마치고 결혼식 날짜가 잡힐 즈음 아내 될 이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때 느낀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똑바로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자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를 차버리면 어떻게 하나.

나는 못 받는 돈을 대신해 대출을 받겠다고 했다. 아내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비상금으로 준비해 둔 돈이 조금 있으니 그걸 쓰자고 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한 푼 두 푼 장모님께 맡겨 저축해 놓은 돈이라고 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럴수록 내게 수모(?)를 안긴 아파트 회사가 미워졌다.

부도가 기정사실화하자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이사 나오는 일부터 힘들었다. 결혼 날짜가 임박해 오면서 일차로 이사를 해야 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2년마다 자동으로 연장되는 계약서 상의 조건 때문이었다. 자동 연장된 계약 기간이 2004년 5월 즈음에 끝났다.

그해 10월로 결혼 날짜가 잡힌 것은 7월 경이었다. 그런데 그 5월과 7월 사이에 또 다시 두 번째 자동 계약이 이루어졌다. 새 집을 정하고 이사를 결심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나는 관리사무소에 들러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했다. 관리사무소장은 아파트 건축회사 사장의 친동생이었다. 제법 친분도 있었다. 보증금을 돌려받는 데 큰 문제가 없으리라 여겼다. 때와 조건에 맞춰 전입신고도 했고 확정일자도 받아 놨다.

하지만 관리사무소장은 새 입주민이 들어오기 전에는 보증금을 돌려 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이미 열 집 정도가 빈집으로 있었다. 부도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하면서 채 100가구가 되지 않는 전체 가구 중 10퍼센트 이상의 집이 빈 상태였다.

눈 앞이 깜깜... 이러다 돈을 떼이는구나

우리 집은 그 열 집 중 관리사무소에 공식적으로 이사를 통보한 뒤 보증금 반환을 요구한 세 번째 집이었다. 혹여 회사에서 보증금을 내주더라도 내 앞으로 있는 두 사람에게 먼저 지급해야 한다면서 알려 준 정보였다. 그나마 지금은 그 어떤 집도 나가지 않고 있어서 보증금을 주기가 힘들다고 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러다 돈을 떼이는구나 싶었다. 법원 근처의 한 법무사 사무실을 찾았다. 대한법률구조공단 사무실에도 들렀다. 상담을 종합해 보니 아직 완전히 이사 나오지 않은 것으로 이웃들에게 인지시키고, 법원에 일정한 서류 신청을 한 뒤 이삿짐을 빼야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듯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갈수록 태산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 모든 절차가 뜻대로 착착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보증금 천만 원을 모두 받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2004년 11월, 결혼한 지 한 달 정도 지난 때였다. 그 사이에도 아파트관리비와 임대료고지서는 꼬박꼬박 나왔다. 일단은 완납했다. 그때그때 내지 않으면 나중에 보증금을 돌려받게 될 때 차감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런데 보증금을 전혀 돌려받지 못하게 된다면? 살지도 않는 집인데 관리비와 임대료를 성실히 납부한 '바보'가 될 성싶었다.

무슨 수를 내야 했다. 아내도 성화였다. 그렇게 계속 돈만 내고 말 것이냐면서 다그칠 때가 많았다. 인터넷에 도움을 청했다. 자초지종을 정리한 글을 한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 올렸다. 지급명령 신청을 하라는 조언이 들어왔다.

인터넷과 법률구조공단 도움을 빌려 서류를 작성해 법원에 제출했다. 별것 아니었지만 무척 힘들었다. 양식에 맞춰 내용을 채워넣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자료를 찾거나 이곳저곳을 오가며 들이는 시간도 만만찮았다. 귀찮아서라도 포기하거나, 적지 않은 돈을 들여 변호사나 법무사를 사는 이유를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몇 주 뒤 법원에서 지급명령 결정문이 날아왔다. 관리사무소에 사본을 보냈다. 돌려받지 못한 보증금을 금방이라도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회사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관리사무소장은 아예 나를 만나주려 하지도 않았다. 애먼 관리사무소 여직원에게만 따졌으나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기대감이 지나쳤을까. 실망과 조바심이 크게 일었다. 맥이 풀렸다. 지급명령이 내려졌다고 해서 회사가 금방 돈을 내 주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지급명령은 보증금을 지급하라는 명령일 뿐이었다. 어떤 돈으로 지급을 어떻게 하라는 등과 관련해서는 그 어떤 법적 효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 돈이 없다며 버티더라도 그 어떤 현실적인 강제력을 낼 수 없는 종잇장일 뿐이었다.

회사 명의 통장이나 부동산을 찾아라

다시 법무사 사무실과 법률구조공단을 찾아 다녔다. 변호사를 하는 친구와 주변 지인들에게도 조언을 구했다. 그렇게 발품을 팔며 알아 보니 가장 확실한 방법 한 가지가 나왔다. 회사 명의로 된 통장이나 부동산 등 재산을 특정해 그것을 상대로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 신청을 하는 일이었다.

압류 및 추심명령의 근거가 되는 지급명령 결정본이 있었다. 절차대로만 처리되면 보증금을 충분히 돌려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재산을 찾을 것인가. 어느 은행에 통장이 개설되어 있고, 어디에 땅이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나. 가장 확실하다고 여긴 방법이 실은 가장 어렵고, 심지어는 불가능한 방법 같았다.

그렇다고 가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수시로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들락거렸다. 우는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귀찮게 굴면 다른 사람보다 먼저 보증금을 받게 되지 않을까 싶은 삿된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오가다 회사 명의의 통장이라도 슬쩍 마주치면 좋겠다 싶은 마음도 내심 있었다.

2006년 어느 봄날 저녁이었다. 여느 때처럼 '몽당연필'을 찾아갔다. 퇴근 길이라 몸이 젖은 솜처럼 묵직했다. 하지만 이미 습관처럼 길들여진 몸이 나를 그곳으로 몰았다. 살던 집은 여전히 빈 채로였다. 그 전까진 차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1층 현관이 보이는 주차장에서 안쪽만 흘깃거리다 가곤 했다. 웬일이었을까. 그날은 문득 11층에 있는 집에 올라가 보고 싶었다.

차를 주차장 한켠에 세웠다. 현관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심결에 눈길이 게시판을 향했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그 다음 달부터 관리비와 임대료 입금 통장이 바뀌니 그곳으로 납부하라는 안내문 한 장이 걸려 있었다. 본능에 이끌린 듯 몸을 후닥닥 차로 돌렸다. 펜과 종이를 꺼내 왔다. 누가 볼세라 서둘러 계좌번호를 적었다.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로 그다음 날부터 서류를 준비했다. 또 며칠간 골머리를 썩였다. 아파트 회사를 채무자로 하고, 관리비와 임대료 입금 통장을 개설한 ○○ 은행을 제3채무자로 하는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 신청서를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서류 작성하는 일이 더 복잡했다. 지급명령 신청서와는 '격'이 달랐다.

인터넷과 법률구조공단 사무실을 다시 들락거렸다. 법원 민원 창구에도 가 조언을 구했다. 지연손해금(보증금에 대한 이자)과 송달료 등이 포함된 청구채권 금액, 압류 및 추심할 채권 표시 등 지금 돌아보면 사소해 보이는 항목들 하나하나가 다 어려웠다. 생경한 법률 용어들이 주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컸던 것 같다.

돈 받아내기가 이렇게 어려울 수가

꼼꼼하게 들인 정성 덕분이었을까. 신청서를 낸 뒤 몇 달 뒤에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 결정본을 손에 쥐게 되었다. 2006년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렇게 압류 및 추심명령 결정을 받아도 돈을 쉽사리 받아낼 수 없다는 얘길 들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 될 수 있다고도 했다. 먼저 압류 신청을 한 다른 채권자들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결정문 정본과 인감증명서, 신분증 등을 가지고 ○○ 은행의 한 지점을 향했다. 그 전부터 거래하던 은행이었다. 창구 여직원에게 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서류를 보여 주었다. 여직원은 난처해했다. 자기 맘대로 할 수 없다고 했다.

뒤쪽에 앉아 우리 얘길 듣고 있던 과장이 다가왔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지역 본점에 확인 받은 뒤에야 처리할 수 있다고 했다. 곧이 들리지 않았다. 법원 판결이 있지 않느냐고 따졌지만 고개만 저었다. 본점 확인이니 뭐니 했지만 통장을 개설한 고객(아파트 회사) 눈치를 보는 듯했다.

대판 싸움이라도 벌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을 성싶었다. 하릴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직장 동료 한 명에게 하소연했다. 그가 민원을 이용해 보라고 조언했다. 마침 ○○ 은행은 정부 부처가 관장하고 있던 금융기관이었다. 그날 오후 곧장 그 정부 부처 홈페이지에 접속해 민원 창을 열었다.

난생 처음 써 본 민원의 힘은 대단했다. 다음 날 오전, 휴대전화에 낯선 전화번호가 찍혔다. 발신인은 예의 정부 부처의 민원 담당 공무원이었다. 전날 내가 올린 민원을 모두 처리했다고 했다. 그는 해당 지점의 일 처리 방식에 대해서도 정중하게 사과했다. 지역 본점에 지점 직원들이 내 일을 처리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하라고 이야기해 놓았다는 말도 전해 주었다.

믿기지 않았다. 민원 처리 속도도 그렇거니와 일을 확실하게 매조지는 일 처리 방식이 놀라웠다. 미심쩍은 마음은 퇴근 후에도 가시지 않았다. ○○ 은행 창구에 가서 서류를 내놓았을 때에야 의심이 풀렸다. 바로 이틀 전 고개만 젓던 과장이 손수 돈을 챙겨 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보증금의 절반에 가까운 400여만 원의 돈을 돌려받았다. 장장 2년여 만의 일이었다.

가진 사람에게는 '껌값'에 불과하겠지만

그 몇 년 뒤 아파트는 경매에 들어갔다. 주택공사가 낙찰을 받았다. 나를 포함해 이사를 나온 많은 임차인이 배당금을 받았다. 2009년 6월경 배당기일통지서를 받았다. 배당금이 통장에 입금되었을 때는 7월경이었다. 처음 입주 시점부터 계산하면, 보증금 천만 원을 돌려받는 데 거의 10년이 걸린 셈이다. 이사를 나온 때로부터 해도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돈 몇십만 원조차도 서민들에게는 생사를 좌우하는 큰 돈이 될 수 있다. 집주인에게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으로 70만 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서울 송파의 세 모녀에게서처럼 말이다. 몇백만 원이나 몇천만 원임에랴. 천만 원의 돈을 돌려받기 위해 장장 5년여간 마음을 졸이고 동분서주한 시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씁쓸함이 가슴을 채웠다.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을 법에 호소하고서야 간신히 받아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영문도 모르고 돈을 떼인 채 길거리에 나앉게 된 이들이 얼마나 될까. 나처럼, 돌려받아야 할 돈을 제때 돌려받지 못한 채 긴 시간과 많은 품을 들인 후에야 간신히 돌려받는 이들은 또 얼마나 있을까. 가진 사람들에게는 몇백만 원이나 몇천만 원이 '껌값'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서민들은 그조차 온전히 건사하는 데 온갖 수단과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 10대 강국이라는 대한민국이 무색하기만 하다.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응모 글입니다.



태그:#임대아파트, #지급명령,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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