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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고조선 건국 4347주년이다. 그래서 개천절인 10월 3일 4346주년 경축식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다. 이외에도 '개천절 대제'가 서울 종로구 사직동 단군성전에서 개최되며,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및 상설공연장에서 '개천대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8·15 광복절을 '광복절과 함께 건국절'로 하려는 법률안을 여당 의원들이 상정해 놓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우리나라를 세운 날을 1948년 8월 15일로 하려는 것이다.

국가는 국토와 국민, 주권(국권)이 있어야 하며, 국가를 이끌어가는 왕조(정부)의 국호(국명)가 있게 마련이다. 국호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선(고조선)-고구려-백제-신라-고려 등의 명칭이 다를 수 있고, 주권 형태는 국가의 흥망성세에 따른다.

근대 우리나라 국호의 변천을 살펴보면, 1897년 10월 12일 광무황제는 어전회의 끝에 조선을 '대한(大韓)'이라 했다. 이후 1910년 8월 29일 주권을 일제에 빼앗기게 됐다. 그리고 1919년 3·1만세의거 이후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이 그 해 4월 13일 중국 상하이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망명정부를 수립한다. 종래의 '대한'을 시민이 세운 나라(민국)이니, 새로운 공화국이 탄생하여 일제와 투쟁을 벌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국회는 정부수립에 앞서 1948년 7월 12일 헌법 제정을 하고, 그 전문(前文)에서 "유구(悠久)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승계하여, 이제 민주 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하여 이승만 정부수립을 '독립국가의 재건'으로 규정했다. 또 '관보'의 연호를 '대한민국 30년'으로 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기점을 임시정부가 출범한 날인 1919년 4월 13일로 했다. 게다가 그 해 9월 25일 대한민국 법률 제4호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라고 하여, 우리나라의 뿌리를 고조선으로 하였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그 해 12월 2일 법률 제775호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서력기원으로 한다"고 하여, 단기는 사라지고, 서기가 우리나라 연호인양 사용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난데없이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 운운하다가 학자는 물론, 많은 시민들의 반발에 부딪쳐서 그 뜻을 굽히기도 했다. 최근에는 그 망령이 되살아난 정도가 아니고 법률로 정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고조선' 조작, 일제 강점기 '단군신화' 조작에 이어, 대한민국 시대에 '대한민국' 조작에 들어간 것이니, 어처구니가 없다.

필자는 '고조선 역사 조작'과 '단군신화 조작과 처참한 현실'이란 제목으로 두 편의 글을 써 보았다.

고조선 역사 조작

<세종실록지리지>의 평안도 평양부 조에 실려 있는 <단군고기(檀君古記)>의 내용은 천제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태백산 신단수(神檀樹)라는 성소(聖所)에 강림하여 홍익인간의 이념을 바탕으로 개국하였으며, 부여·고구려 등의 시조가 단군의 혈통임을 밝혔다.

고조선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단군고기>와 <신지비사>가 있고, 책 이름으로 보아 고조선 역사서로 추정할 수 있는 것으로는 <배달유기>, 안함로·원동중의 <삼성기>, 표훈(表訓)의 <삼성밀기>, <조대기> 등이 있다.

특히 『신지비사』와 『배달유기』는 고조선 건국사화와 관련이 깊은 내용이 담겨 있던 책으로 조선 초기까지 전승되어 오다가 서운관(書雲觀)에 보관하고 있었다.

조선은 개국 직후 『고려사』를 편찬했다가 다시 고쳐서 종래의 자주적인 내용을 제후국에 맞도록 편찬하고, 특히 충렬왕 이후 사적을 완전히 고쳤다.

본격적인 역사 조작은 세조 때 이루어졌다. 1457년 세조는 역사서를 편찬한다는 명목으로 고기류(古記類)를 수거하면서, 개인이나 사찰에서 소장해 오던 역사서를 모조리 수거하여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 편찬에 활용하거나 폐기하였다.

8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조선비사』·『대변설』·『조대기』·『주남일사기』·『지공기』, 표훈(表訓)의 『삼성밀기』, 안함로(安含老)·원동중(元董仲)의 『삼성기』, 『도증기』·『지리성모』·『하사량훈』, 문태(文泰)·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이 쓴 『수찬기소』의 1백여 권, 『동천록』·『마슬록』·『통천록』·『호중록』·『지화록』·『도선한도참기』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 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라. (진상을) 자원하는 자는 서책을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하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3년 5월 26일)

그 후 예종은 고서를 바친 자나 숨긴 것을 고발한 자에게 품계를 2등급 올려주거나 큰 상을 주겠다고 하면서, '고서를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엄명을 내려 또 고서를 수거하였다. 조선판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있었다.

"『주남일사기』·『지공기』, 표훈의 『천사(天詞)』·『삼성밀기』, 『도증기』·『지리성모』·『하사량훈』, 문태·왕거인·설업 3인의 기록 1백여 권과 『호중록』·『지화록』·『명경수』 및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 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을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하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에 속히 유시하라." (『조선왕조실록』. 예종 원년 9월 18일)

이어 성종 15년(1484년)에 『동국통감』이 편찬되었는데, 고조선에 관한 것은 겨우 50여 자로 된 한문으로 불과 30여 년 전인 단종 2년(1454년)에 편찬한 『세종실록지리지』 내용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 내용도 단군의 건국과정과 역사를 엄청나게 축소, 조작하였다.

동방에는 처음에 군장(君長)이 없었다. 신인(神人)이 있어 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세워 임금으로 삼으니 이분이 단군이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으니 요임금 무진년이다. 처음에 평양에 도읍을 하였다가 나중에 백악(白岳)으로 천도하였다. 상(商) 무정 8년 을미년 아사달산(阿斯達山)으로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

『삼국유사』는 고려시대에 간행된 것은 발견되지 않고, 완본으로는 『삼국사』와 같이 조선 중종 7년(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이 중간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중간본보다 50여 년 앞서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단군고기』에서 인용했다고 명시했는데, 『삼국유사』 중간본에는 '고기(古記)'라고 하여 책 이름도 밝히지 않고 얼버무린 채 『위서(魏書)』의 내용을 그 첫머리에 수록하였다. 이는 『단군고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단군 이름부터 지명까지 한자가 다른 것으로 바꾸었으니, 완전히 창작 수준이었다.

『단군고기(檀君古記)』

단종 2년(1454년) 『세종실록지리지』가 편찬되었는데, 여기에는 단군의 조선 건국사화(建國史話)가 실렸다. 시기적으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고려 때 나왔기에 이들 책의 내용을 상당히 수용했을 것으로 예단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단군고기』에서 가져 왔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고조선과 부여·동부여, 고구려 건국사화가 함께 실려 있어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분량이 많고, 구체적이다. 『단군고기』에 고조선 외 많은 국호가 함께 등장하는 것은 단군의 혈통이 이들 나라에 이어졌음을 밝힌 것이었다. 즉 단군의 자손인 해부루가 동부여를 세웠고, 부여 해모수의 아들 추모(주몽)이 고구려를 세워 나라를 이어갔음을 밝힌 것이었다.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이 서자(庶子)가 있었으니, 이름이 웅(雄)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조선,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단군이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이를 곧 동부여 왕이라고 이른다. 단군이 당요(唐堯)와 더불어 같은 날에 임금이 되고, 우(禹)가 도산회의(塗山會議)를 할 때 태자(太子)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나라를 누린 지 1천38년 만인 상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이하 생략)

환인은 상제(上帝:천제)이고, 그의 아들 환웅은 단웅천왕이라 하였으며, 단군은 환웅의 아들이 아니라 환인의 손녀(단웅천왕의 딸)와 단수신이 혼인하여 탄생하였다고 하였다.

단군이 건국한 지 2천여 년 후 고조선은 위만의 쿠데타에 이어 내부 분열로 멸망하지만, 국호 '조선' 대신 크고 작은 70여 개국의 이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부여, 고구려 등에 의해 한의 군현을 물리치면서 고대국가로 성장하여 오늘날 북경을 포함한 화북지방 동쪽으로부터 만주, 연해주 일대에 걸치는 고구려를 건설하게 되었으며, 요동지방과 한반도 압록강 하류에서부터 서남부 지역에 자리 잡은 마한과 그 뒤를 이은 백제, 한반도 동남부에 자리한 신라, 오늘날 경상도 중남부(전성기에는 전북지역 포함) 지역의 가야 등으로 발전해 오면서 외세에 맞서 왔다.

이처럼 명백한 역사적 진실이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려 있고, 『사기』, 『한서』 등 중국사서에 부여·고구려 등의 역사도 명백히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의 뿌리는 고조선이라는 것과 이미 고조선 건국절이 '개천절(開天節)'(우리나라 건국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며, '역사적 진실은 법으로 창조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단군신화' 조작, 그 처참한 현실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이태룡은 (사단법인) 의병정신선양중앙회 부설 의병연구소장입니다.



태그:#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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