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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같이 한적한 시간을 가져본다는 이장호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의장과 정진순 여사가 담장 길을 걷고 있다.
 오랜만에 같이 한적한 시간을 가져본다는 이장호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의장과 정진순 여사가 담장 길을 걷고 있다.
ⓒ 김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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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 소고기 수입으로 5만 원 하던 새끼돼지 한 마리가 2천 원까지 떨어져 장사꾼은 닭 한 마리와 바꾸자고 달려들었다. 또 소값을 개값으로 만들어 버린 정치를 보면서 농산물이 제값을 받기 위해서는 조직이 생겨야겠다는 것을 깨닫고 농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아직도 제값 못 받는 농축산물, 농사꾼을 보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언제쯤 오려는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농사만 짓다가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부의장까지 맡아 할 정도로 농민회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이장호씨. 1939년생인 그는 충남 공주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유구읍 문금리 용수골에서 벼농사와 밭작물, 버섯을 재배하고 있다. 군 복무와 3년간의 서울 생활을 제외하고는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1988년 전국농민회가 발족하자 1989년부터 공주농민회 초대 회장, 충남도연맹 의장,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의장(1996~98년), 민주주의민족통일 대전충남연합 의장, 제2대 일일명예농림부장관, 동학농민전쟁우금티기념사업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용수골 주민들은 마을 입구에 공적비까지 세워서 그를 기리고 있다. 가을 햇볕이 따뜻한 지난 1일 이장호 전 전농 부의장을 만나 일문일답을 했다.

"농사, 예전보다 더 힘들어졌다"

이장호 전 전농 충남도연맹 의장.
 이장호 전 전농 충남도연맹 의장.
ⓒ 김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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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농사를 짓고 계신가요.
"40년 넘게 농사를 짓고 있다. 노력만 따지자면 옛날이 힘들었다. 그런데 생산비와 비교하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서 마음고생은 지금이 더 심하고 힘들다. 옛날에는 쌀 한 말이면 인부 4명을 얻었는데 지금은 2명도 사지 못할 정도로 농촌이 힘들어졌다."

- 이곳 용수골은 오지 중에 오지다. 이런 곳에서 농민운동을 하게 된 동기는?
"동학혁명의 전봉준 장군을 존경한다. 전두환 시절 소값이 '개값'으로 치달으면서 고통을 당하다가 돼지 파동까지 겪었다. 그리고 1988년에 농민이 뭉치지 않으면 농업의 미래는 없다는 생각에 뛰어들었다. 그러면서 공주농민회 초대 회장을 맡아 100명 정도의 회원을 만들었다."

- 당시 정치권에서 구애는 없었나요.
"정치권에서 제의가 들어와서 농민들의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어려운 시기에 정치에 뛰어들면 안 되어서 그랬는지 58/42 정도로 반대가 많아서 농민회에만 전념했다. 이후에도 많은 사람이 정치로 끌어들이려 노력했으나 완강하게 거부했다. 조직에 계신 분들 중에서 '정치를 하지 말라'는 조언을 여럿 하셨는데 조직을 배신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다. 농민 운동은 개인의 이익보다는 국민의 먹거리를 위한 것으로, 초야에 묻혀서 살기로 마음을 닫았다."

- 지금은 교통과 통신 수단이 좋다. 당시 농민들의 뜻을 어떻게 모았나요.
"운동은 부지런해야 한다. 스마트폰 100번 날리는 것보다는 한 번 찾아가서 만나고 함께 하자고 진실로서 마음을 나눠야 한다. 정당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당시에는 발품을 팔아서 사람을 만나고 마음으로 듣고 나누면서 희망을 심어줬던 것 같다."

"한 달 휴대폰 요금이 쌀 한 가마니... 죗값 받을 것"

- 전농 충남도연맹 의장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요.
"집으로 들를 시간이 없어 농사일하러 나갈 때 바꿔 입을 옷을 가지고 가 일하다가 냇가에서 대충 씻고서 나갔다. 집에서 한 번 나오면 20~30일이 지나야 돌아올 정도로 전국을 다니고 농민들을 만났다. 그래서 아내(정진순)가 신랑을 밖으로 나돌게 한다고 어머니 아버지에게 시달림을 많이 당했던 것으로 안다.  

1991년도쯤으로 기억하는데 쌀 적재 투쟁을 했다. 추운 겨울에 공주 산성동 판잣집 2층에서 40여 명이 이불도 부족한 상태에서 밥해 먹으면서 싸웠다. 정부에 수매량 늘리고 수매가격 올려 달라고  요구했다. 공무원들 퇴근 시간에는 경운기에 깃발 꽂고 시내를 돌았다. 그렇게 한 달간 투쟁하면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연합의장 때는 우금치 문화패와 각 시군을 돌면서 마당극을 하면서 통일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1996년 전농 부의장 때는 의료보험 통합과 수매가를 놓고 땅끝 마을에서 수원까지 9박 10일간 걸었다.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면서도 완주를 했다. 더울 때 걷고 추울 때는 농성하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 당시 기억에 남은 사람이 있다면?
"투옥과 수배로 고초를 겪었던 이승우 의장이다. 가까운 집을 두고도 수배 때문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갇혀 살았다. 초대 전농 의장인 권종대 의장도 기억에 남는다. 권 의장이 국회의원 나오려고 한 적이 있는데 조직에서 반대해서 포기했다. 같이 고생했던 사람이 하도 많아서 다 꼽으려면 날밤을 새워야 할 것이다."

- 가족은 어떻게 되시나요?
"딸 4명에 아들이 2명이다. 부모님 모시고 살면서 6남매를 키웠다. 셋째 딸이 경남제약 충남지회의 유일한 여성 노조지회장인데 동지가 생겼다는 생각에 많이 응원했다. 막내아들은 대학 다니면서 운동을 해서 든든하고 믿음직했다. 두 아들도 농업을 했으면 했는데 아들들이 말을 듣지 않아서 포기했다."

- 마지막으로 정부에 바란다면?
"가정이 화목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다. 예전과 비교하면 더 잘 먹고 잘 살게 됐는데 부유층 사람들도 행복지수가 낮다. OECD 국가 중 출산율이 제일 낮다는 것을 보니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

정부는 쌀개방하면 직불금 늘린다고 하는데 생산비 보장과 수매가를 올리면 되는데 왜 안 해주는지 모르겠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다. 정당한 것을 농민에게 베푸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 아닌가. 정부에서 농민에게 가는 혜택이 얼마인데라며 농민을 원망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게 했다. 요즘은 휴대전화 한 달 요금으로 쌀 한 가마니가 들어가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공장은 이익을 보면서 장사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데 농민은 생산원가도 나오지 않게 막는다. 100대 재벌 외에는 다들 거지로 만든 불공평한 세상이다. 농민은 뼈 빠지게 농사를 지으면서도 농협, 새마을금고 등에 땅을 저당 잡히고 빚쟁이가 됐다.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들이 상대적으로 약자인 농사꾼을 짓밟고 있는데 언젠가는 죗값을 받을 것이다."


태그:#이장호, #농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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