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메리다의 연인들

칸쿤 치첸이트사에서 출발한 버스는 메리다(Merida)라고 하는 낯선 도시에 도착했다.

멕시코 남부인 유카탄의 주도라고는 하지만 정보가 전혀 없이 피곤했던 나는 그저 공원이나 어슬렁거리며 여름의 밤바람을 즐기고 떠날 생각이었다. 그렇게 공원 옆길에 있는 거리 장터에서 타코 몇 개로 끼니를 때우고 길을 나서려던 순간, 나는 굉장한 풍경과 마주쳤다.

아름다운 건물과 정원으로 유명한 메리다의 밤은 언제나 음악이 흐른다. 거리의 타코를 손에 들고 그 선율에 흐느적거리는 사람들을 보는 일만큼 낭만적인 것도 없다.
▲ 메리다의 밤 풍경 아름다운 건물과 정원으로 유명한 메리다의 밤은 언제나 음악이 흐른다. 거리의 타코를 손에 들고 그 선율에 흐느적거리는 사람들을 보는 일만큼 낭만적인 것도 없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처음에는 관광객이 많은 도시에서 으레 벌어지는 거리의 연주회겠거니 싶었다. 악기를 든 사람들이 하나씩 무대 위로 올라와 합주를 시작한다. 어디에서 어떻게 박수를 쳐야 할지 몰라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는데 갑자기 무대 정면의 조명들이 하나둘씩 꺼지더니 무대 위의 것만 남게 되었다.

그러자 누가 등을 떠밀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이 손을 맞잡고 거리로 나선다. 조금씩 스텝을 밟으며 몸을 움직이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거리로 나서 홀린 사람들처럼 흐느적거린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잠시 지켜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나 보다. 앞에 앉아 가만히 구경을 하고 있던 한 아주머니가 내 바짓단을 잡아당긴다. 아마도 그 때 나는, 사랑이 끝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치첸이트사에서 지천에 있는 대도시 메리다의 밤은 수많은 연인들로 넘쳐 그렇게 대단했다.

이상한 나라로 통하는 수중동굴

"형님, 메리다에 가면 쿠자마 세노테에 꼭 가세요. 그런 데가 또 없습니다."

굳이 '님'자를 붙여가며 나를 부르던 황이 떠나던 날 그런 말을 남겼다. 그러겠노라 대답은 했지만, 당시만 해도 세노테가 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인신공양을 하는 풍습이 있던 마야인들이 산 제물을 바쳤던 물 웅덩이로 알려진 세노테(Cenote)는 유카탄 전역에 3천여 군데에 달한다. 땅을 파서 물이 나오면 어김없이 제물을 바쳤던 것이다. 하나하나 이름을 붙일 수 없으나 개중에도 유명세를 타는 곳이 있으니, 그 중에 하나가 메리다 근교의 작은 마을 쿠자마 근처에 있는 쿠자마 세노테(Cuzama Cenote)다.

아프리카마냥 앞 유리에 행선지가 덕지덕지 붙은 콜렉티보(현지의 주민들이 대중교통으로 이용하는 승합차)를 타고, 쿠자마까지 간 것은 좋았으나 세노테로 가는 길은 전혀 모르는 채였다.

머리 가득 짐을 올려든 여인이 손가락으로 인력거나 다름없는 삼륜차를 가리켜 그쪽으로 가보니, 그는 다짜고짜 돈부터 내라며 어디론가 나를 데려다 주었다. 돌로 대충 쌓아 올린 담벼락 사이로 난 조그만 길이 마치 제주도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린 곳에는 낡아 빠진 선로 위에 어색하게 자리잡은 작은 마차가 있었다.

세노테까지 가기 위해선, 외딴 마을 쿠사마에 도착한 뒤에도 낡은 선로를 따라 만들어진 마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한다.
▲ 세노테 쿠사마로 가는 길 세노테까지 가기 위해선, 외딴 마을 쿠사마에 도착한 뒤에도 낡은 선로를 따라 만들어진 마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한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세노테로 가는 길이냐고 물으니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던 한 남자는 그 길로 걸어가려는 내 앞을 자꾸만 막아 섰다. 그럴 수 없다며.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다 움직이긴 하는지 의심스러운 이 마차가 세노테로 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임을 깨달은 나는 뒤늦게 도착한 스페인 커플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드디어 도착한 첫 번째 세노테는 생각보다는 탁 트인 공간이었다. 무너져 내린 듯한 바닥과 넝쿨 사이로 나있는 철제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시원하고 청량한 공기가 몸을 감싸 살짝 추운 느낌마저 들었다. 마치 무인도에 숨겨진 우물 같은 샘 가운데에 햇빛이 비치며 묘한 색깔을 만드는데, 그 모습이 꼭 영화 속 장면 같다.

쿠사마에는 총 3개의 세노테가 있는데 뒤로 갈수록 점점 더 깊고 어두워진다. 사진은 첫번째로 도착하는 세노테.
▲ 세노테 쿠사마(Cenote Cuzama) 쿠사마에는 총 3개의 세노테가 있는데 뒤로 갈수록 점점 더 깊고 어두워진다. 사진은 첫번째로 도착하는 세노테.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처음 발견되었을 때 바닥에서 꽤 많은 유골들이 있었다는 세노테의 바닥은 투명하다 못해 푸르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바닥으로 향하게 하고 잠영을 해보지만 숨이 찰 때까지 잠수를 해도 바닥까지는 여전히 한참이다. 생각보다 깊은 깊이에 놀란 누군가는 몸을 담그자 마자 화들짝 난간을 부여잡고 다시 육지로 올라섰다.

세노테의 물은 생각보다 깊지만 그 신비로운 빛깔을 보면 뛰어들지 않을 수 없다. 기묘하게 생긴 천장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수면에 닿으면, 신비스러운 푸른 빛이 더 강렬해진다.
▲ 지하동굴에서 수영을 세노테의 물은 생각보다 깊지만 그 신비로운 빛깔을 보면 뛰어들지 않을 수 없다. 기묘하게 생긴 천장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수면에 닿으면, 신비스러운 푸른 빛이 더 강렬해진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다시 마차를 달려 도착한 두 번째 세노테는 조금 더 깊숙한 음지였다. 빛이 닿는 면적이 첫 번째에 비하면 5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그 덕분에 그저 고인 물이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도 없는 그 풍경이 자꾸만 마음을 도드라지게 한다.

열대의 햇빛을 받고도 전혀 뜨거워지지 않는 세노테에 몸을 담그니 차가운 물기가 머릿속에 고였다 사라지는 묘한 기분이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이 미스터리한 우물 풍경은 자연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알 수 없는 정신이다. 그리고 마침내 세 번째 세노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점입가경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쿠사마의 세번째 세노테는 더욱더 땅 속 깊숙이 있어 좁은 구멍으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야만 볼 수 있는데, 그 느낌이 꼭 이상한 나라로 빨려드는 것만 같다.
▲ 세노테로 가는 구멍 쿠사마의 세번째 세노테는 더욱더 땅 속 깊숙이 있어 좁은 구멍으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야만 볼 수 있는데, 그 느낌이 꼭 이상한 나라로 빨려드는 것만 같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이번에는 땅굴을 파고 기어 내려가야 한다.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만한 구멍에 긴 사다리가 세워져 있는데 내려갈 때는 마치 두 번 다시 해를 보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곳이 발견이 된 것도 신기하고, 수천 년이 지나도록 이렇게나 깨끗한 지하수가 흐른다는 사실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얇게 꿈틀거리는 그 물빛을, 이 신비로움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만히 선 채로 사진만 100여 장을 찍었지만 그 어떤 것도 이 기이한 광경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아직 아무도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너무 심각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있어서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 했다.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낀 나는 그제야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그저 고인 물이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도 없는 풍경이지만, 열대의 햇빛을 받고도 전혀 뜨거워지지 않는 세노테의 차가운 물에 머리를 담그는 것만으로도 신비스러운 힘을 얻는 듯한 기분이 든다.
▲ 쿠사마의 세노테 그저 고인 물이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도 없는 풍경이지만, 열대의 햇빛을 받고도 전혀 뜨거워지지 않는 세노테의 차가운 물에 머리를 담그는 것만으로도 신비스러운 힘을 얻는 듯한 기분이 든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마침내 누군가가 세노테로 뛰어들었고 뒤를 따르려는 찰나, 나는 눈부신 광경을 보았다. 동굴 가운데에 뚫린 구멍으로 촉수처럼 드리워진 나무 넝쿨을 바라보던 남자의 모습. 그도 아마 그 엄청난 풍경에 압도되어 더 가까이 가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빛이 내리쬐는 둘레에 모여 서로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이 햇빛이 진짜라는 것을. 우리가 수천 년 전부터 이어 내려온 물줄기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을.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저 구멍을 다시 올라가면, 내가 알던 그 세계가 맞긴 한 걸까? 마차는 아직 그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까? 어쩌면 나는 하얀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가는 구멍에 빠져 버린 건 아닐까.

간략여행정보
유카탄 전역에는 천 개가 넘는 세노테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쿠자마 세노테 만큼 잘 보존된 곳은 드물다. 유일한 흠이라면, 메리다에서부터 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우선 메리다에서 수시로 출발하는 콜렉티보(승합차)를 타고 1시간을 달려 쿠자마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한 뒤, 내린 곳에 있는 삼륜차를 이용해 다시 마차 승차장까지 10분여를 가야 한다. 세노테로 가는 마차는 4인용이며, 혼자 타면 4인분의 돈을 모두 내야 하니 성수기가 아니라면 일행을 만들어서 가는 것이 좋다.(1인당 1만5000원 정도)

마차는 네 명이 모일 때마다 출발하는데, 총 3군데의 세노테를 들러 각각 30~40분 정차하며, 총 3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한편 세노테는 물이 매우 깊기 때문에 스노클 장비나 구명조끼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된다.

좀 더 자세한 세노테 여행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6389482



태그:#세노테 쿠사마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