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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처벌이 합헌이라고 결정했고 대법원도 종교적 신념에 따른 입영 거부행위가 병역법에서 처벌 예외사유로 규정한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한 바 있다. … 유엔자유권규약위원회가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라는 권고안을 제시했다고 해도 이것이 법률적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 7월 9일 대법원 판결문 중 일부

대한민국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는 아직도 처벌 대상이다. 2013년 6월 기준 최근 10년간 종교와 개인의 신념에 따라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언한 사람만 6090명에 달하지만,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단은 여전히 확고하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들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프랑스의 사례를 한 번 보자.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상당수 등장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 후였다. 사실 이는 영국의 독립노동당(Independant Labour Party)과 연결된 영국 평화주의자 그룹과 미국의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한 것에 비해 한 발 늦은 셈이다.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겠다'는 열의로 기꺼이 전쟁에 참여했던 프랑스인들은 상상도 못했던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뒤 전쟁의 비리, 비인간성에 대한 혐오, 회의를 느끼게 된다.

프랑스는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을 겪고 또 다시 인도차이나 전쟁, 알제리 전쟁을 겪는다. 1954년에 시작된 알제리 전쟁은 1830년부터 프랑스 식민지로 놓여 있던 알제리의 독립을 목적으로 한 전쟁이기에 '알제리 독립전쟁', '반식민지 전쟁'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정치적 위기에 놓이게 되고 샤를르 드 골의 등장과 함께 프랑스 제 4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제 5공화국이 설치된다.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 독립 전쟁을 무마하기 위해 군대를 이용해 강경진압을 한다. 드 골은 결국 '알제리인이 원하는 대로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결정하게 되는데, 일부 군대가 이 결정에 공개적으로 대항하게 된다. 그러나 이 대항 세력은 정부에 의해 바로 진압되고 1962년 3월 18일 에비앙(Evian) 협약에서 알제리의 독립이 선포된다.

알제리 전쟁에 징병된 수많은 프랑스 젊은이들

 루이 르코엥 동상
 루이 르코엥 동상
ⓒ 위키피디아공동저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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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군복무를 해야 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알제리 전쟁에 징병돼거나 이미 군복무를 마친 젊은이들도 재징집돼 알제리 전쟁에 보내졌다. 자식이 둘 이상 되거나 형제 중에서 이미 한 명이 알제리에 파견 되었을 경우에만 재징집에서 빠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반식민주의자들이 독립을 주장하는 알제리 인들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며 전쟁 참가를 거부했다. 결국 알제리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양심적 병역 거부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군대에 들어간 사람들 중 탈영하는 이들이 발생했다. 당시 군부 발표에 의하면 탈영자의 수가 4천명에 달했는데, 여기엔 특별한 정치적 이유가 없는 자들도 포함됐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1960년 9월 5일, 프랑스 지식인들이 엥수미시옹(insoumission, 불복종이라는 뜻의 단어인데, 여기서 불복종은 군입대를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을 정당화하는 성명서를 공개적으로 발표한다.

이 성명서에는 사르트르, 시몬느 드 보브와르, 투뤼포 등을 포함한 문인과 예술인, 지식인 121명이 서명을 한다. 그 이후 발표된 제2성명서에 다시 새로운 246명의 지식인들이 서명을 한다. 이들을 곱게 보지 않은 프랑스 정부는 이들을 배척하기 시작했고, 이 성명서에 서명한 교사나 교수들 중엔 갑자기 직업을 잃은 이들도 있었다. 또 배우들 중엔 라디오-텔레비전 등 국가의 보조를 받고 있는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없게 된 이들도 있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Objecteur de conscience)의 출현

이렇게 양심적 병역 거부 인식이 사회적으로 널리 퍼졌지만, 프랑스 정부가 이들을 법으로 인정하지 않아, 입영 거부자들은 계속 감옥으로 향해야만 했다. 프랑스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법적으로 인정되기까지는 루이 르코엥(Louis Lecoin, 1888~1971)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기초 교육밖에 받지 못한 루이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인쇄소 교정 일을 하게 된다. 1910년 10월, 군대 초병이었던 그는 철도 파업을 진압하라는 명령에 불복함으로써 '군내에서의 불복종'이라는 이유로 6개월의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1912년 제대 후 파리로 올라와 아나키스트-코뮈니스트 연합의 비서가 되고 1912년 반군부주의 포스터를 붙였다는 이유로 1912년 11월 다시 5년 형을 받게 된다.

이후 평화주의자, 반군부주의로 평생을 산 루이는 프랑스 20세기 가장 유명한 아나키스트 중의 하나가 되었는데, 프랑스에서 블랑키(Blanqui, 19세기 사회적 혁명가) 이후로 오직 자신의 신념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한 사람으로 역사는 기억한다.

1958년 루이는 자유(Liberté)라는 신문을 만들어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응원한다. 소설가 알베르 카뮈도 여기에 가담한다. 그러나 루이는 프랑스 정부가 1962년 6월 1일까지 양심적 병역 거부를 법정화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자 1962년 6월 22일간의 단식을 벌인다. 74세라는 노령에 말이다.

이후 정부 비판 신문으로 유명한 <카나르 앙세네(Canard enchaîné)>가 <이보시요! 어르신네들! 루이 르코엥을 죽게 할 것이오?>라는 기사를 올렸고, 이에 다른 주요 언론들도 가담하면서 이슈로 떠오르게 됐다. 결국 루이는 강제로 병원에 후송됐다.

6월 21일 당시 퐁피두 국무총리는 양심적 병역 거부를 법으로 채택하겠다고 재차 약속했다. 그러나 1963년 8월이 되어도 법이 채택되지 않자 루이는 다시 단식투쟁을 선언한다. 프랑스 정부는 결국 12월 23일 양심적 병역 거부를 법으로 채택했고, 이로 인해 감옥에 갇혀있던 병역 거부자들이 해방된다. 루이 르코엥은 1964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게 되지만 마르틴 루터 킹에게 상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 자신을 후보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의 친구이기도 한 소설가 베르나르 클라벨(Bernard Clavel)은 루이를 간디와 마르틴 루터 킹에 버금가는 인물로 보고 있다. 일생을 전쟁이 없는 세계를 위해 몸을 바친 그는 1954년 당시 외무부 장관인 피에르 망데 프랑스(Pierre Mendès France)에게 군대를 해체할 것을 요청하는 등 정의와 평화가 아닌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1966년 루이에 의해 창설된 평화주의 연합(L'Union pacifiste)은 1968년 MCAA (Mouvement contre l'armement atomique, 원자무기 반대운동)에 가담하고, 1976년 라르작 고원에 위치한 군용 기지 확장 반대 운동에도 가담했다. 또한 1996년 3월 30일 GSSA (Groupe pour une Suisse sans armee, 군대가 없는 스위스를 위한 그룹)가 스위스 베른에서 주관한 군대 없는 유럽 통합 창설에 참가하는 등 아직도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다.

1996년 5월 28일 당시 대통령인 작크 시라크가 "군복무 제도를 없애겠다"고 발표하기 전까지 프랑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군대에 가는 대신 대체 복무제를 선택했다. 군 생활 1년 대신 대체복무제를 선택할 경우, 2년 동안 병원 보조나 고령자·장애인 도우미로 일하거나 농업이나 환경 보호 차원에서 근무를 하거나 해외에 나가 불어 교습을 하는 등의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2001년 11월 30일 부터 프랑스에선 군복무가 없어졌고 직업 군인으로 대체되었다. 현재 유럽에서는 벨기에,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위스, 독일 등 많은 국가들이 징병제 대신에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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