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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리고 그림자~ 그대 눈동자... 사랑은~ 나의 천국~ 사랑은 나의 지옥..."

패티 김의 <빛과 그림자>를 아침부터 흥얼거렸다. 나는 느닷없이 노래가 튀어나오는, 고장 난 주크박스가 될 때가 있다. 노래는 동요부터 트로트까지, 장르 불문이다. 한 곡을 완창하는 것도 아니다. 한두 소절 뜬금없이 노래가 나오다가 멈췄다가를 반복한다. 음과 박자가 참 지질히도 안 맞는 노래를 자동으로 부른다.

그럴 때는 내가 어떤 이미지에 강렬하게 사로잡혔을 때다. 그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떠오른 과거의 한 사건, 현재 빠져 있는 생각, 눈앞의 풍경... 대중없다. 여하튼 그것이 연상 작용을 일으켜 노래를 불러낸다. 그러면 난 고장 난 주크박스가 된다. 오늘은 <빛과 그림자>였다.

 호두
 호두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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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떨어진 감나무 이파리를 쓸었다. 장대로 호두도 털었다. 한 양동이 넘게 수확했다. 대문 밖 마당에 서 있는 호두나무다. 밑동부터 몸통이 반으로 짝 갈라진 나무, 속이 텅 빈 반쪽 나무... 그 호두나무 가지에 해마다 호두가 달린다.

"캬악~ 퇘! 캬악~ 퇘!"

아랫집 아저씨의 가래침 뱉는 소리가 올라왔다. 나는 호두껍데기를 까서 널고, 마당에서 풀을 뽑고 있었다.

"캬악~ 퇘!"

그때, 내게서 불현듯 "사랑은~ 나의 행복~ 사랑은 나의 불행~ 빛과 그리고 그림자~"가 작은 소리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일찍 감이랑 잎이 떨어진 감나무와 생명력 강한 호두나무.
 일찍 감이랑 잎이 떨어진 감나무와 생명력 강한 호두나무.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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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서 떠드는 소리가 서로 들리는 마을

지형이 가파른 지리산 산촌마을이라 윗집과 아랫집의 좁은 대지는 축대로 나뉘어져 있다. 담장이랄 만한 것도 없다. 옆집도 아주 가깝다. 그러니 마당에서 떠드는 소리는 내남없이 이집 저집으로 오고갔다. 아예 한 집인 것처럼 말이다.

나는 얼른 호미를 들고 뒤꼍으로 자리를 옮겼다.

"캬악~ 퇘!"

거기까지 생생하게 따라왔다. 가래침이 끈적끈적 뒷목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내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빛과 그리고 그림자~"

뒤꼍 작은 언덕에는 쑥부쟁이랑 구절초 꽃이 무리무리 만발했다. 나는 지난 해 늦가을, 구절초가 지고 노란 산국이 자욱하게 폈을 때 집을 떠났다. 멀리 여행을 갔었다. 가끔 들러 쉬어가라고, 서울에 있는 제이에게 집을 부탁하고 훌훌 떠났다.

여행 중에도 산골마을이 내내 그립고 궁금했다. 때마다 마당에서는 꽃이 피고 지고 있을까? 마을 한글 교실의 할머니들은 한글이 얼마나 늘었을까?

"오메! 꽃이 우리 선상님 맨키롬 이쁘네!"

오며가며 마당을 들여다보시던 동네 할머니들도 문득문득 떠올랐다.

"감자, 고추 같은 거나 심지, 땅 아깝게 먹지도 못하는 꽃을 거시기 허게 심었댜?"

타박 놓던 할머니도 떠올랐다. 그 당시 나는 한련화 한 송이를 따다 입에 넣고 말했었다. 한련화는 먹을 수 있는 꽃이었다.

"할머니, 저는 이렇게 꽃을 먹고 살아요."
"이? 그럼 시방, 꽃이 많응께 배는 안 골컷구먼."

할머니도 나도 깔깔대며 웃었다.

집으로 돌아온 지 두 달 됐다. 떠난 지 9개월 만이었다. 집 떠나 '개고생' 엄청 하고 11kg이나 살이 쪽 빠져 돌아왔다. 멋지게 돌아오기 위해 떠난 사람처럼 새카맣게 탔다.

진종일 딱새랑 참새가 마당으로 날아들어 지저귀고, 지리산 자락을 배경으로 물까치 떼가 날아다닌다. 공기는 더 없이 맑았다. 세상에 내 집 같은 곳은 없었다.

집에 오자마자 눅눅한 방에 군불부터 지폈다. 툇마루에서 진치고 살던 길고양이들의 털을 쓸어냈다. 거미줄도 걷어냈다. 뒤꼍 처마에 지은 말벌집은 무서워서 손을 안 댔다. 그리고 두 달여 여행했던 필리핀의 팔라완 여행기를 쓰면서 틈틈이 풀을 뽑았다. 손가락만큼 굵은 지렁이가 징글징글 꿈틀거리고 민달팽이가 기어 다니는 꽃밭에서 모기가 극성맞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방아, 끈끈이대나물, 봄맞이 등 몇 가지 다년생 화초들이 꽃밭에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뿌리며 꽃대조차 아예 사라졌다. 제이가 봄에 두어 번 집에 들려 풀을 뽑았다고 하더니... 매사 꼼꼼한 그가 실력 발휘를 한 거였다. 꽃인지 풀인지 분간 못하고 깔끔하게! 나는 제이에게 풀을 뽑아줘 고맙다고 해야 할지, 뽑아 낸 꽃들을 물어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래침 뱉는 소리가 그쳤다. 가래가 끓어 늘 힘들다는 아랫집 아저씨가 드디어 출타했다. 아마 사과밭으로 일을 나갔을 테다. 하지만 나의 "빛과 그리고 그림자~"는 멈추지 않았다. 

오후 늦은 시간, 카메라 들고 산책을 나섰다. 동네나 한 바퀴 돌까 하고 나왔지만 얼마 못 걷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산골 할머니들의 넉넉한 인심이 느껴지는 마을

 정순금 할머니
 정순금 할머니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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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먼저, 돌계단을 비질하고 계시던 정순금 할머니가 날 불렀다. 정 할머니는 볼 때마다 집 안팎으로 비질 중이었다.

"이, 인자 힘들어서 일은 뭇혀. 요기가 논이었어. 쌀 한 가마니는 혔는디, 인잔 그것도 틀렸어. 사람도 누가 누군지 무르겄어... 감 이파리 자꾸 떨어져 나를 애 묵이네. 홍씨가 푹 익었네. 떨어진 거 아까버서 줏었는디, 주까?... 시방, 한 삼 년 디게 추웠어. 그때 감낭구가 언 건지, 늙어 죽을 때가 돼서 그런 건지... 소용읎게 됐어. 주먹만큼 큰 먹감여. 곶감 만들면 겁나게 달았는디. 이, 그려, 그 집도 감낭구 있지? 감 다 빠졌지?"

먹감나무가 많은 동네였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먹감나무가 일제히 조루증에 걸린 것 마냥, 초가을에 잎이고 감이고 후둑후둑 다 떨구는 거였다. 감이 탁구공만해지면 서둘러 떨어졌다. 기후변화 때문인가?

 오순옥 할머니
 오순옥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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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옥 할머니가 노란 호박 한 덩어리를 안고서 날 또 불러 세웠다.

"이거 가져다 죽이라도 쑤어 묵어 봐. 모구 엄치기 달려등께 낮에 볕날 때 와서, 깻잎 좀 따가고... 약 안 쳤응께... 산책 나왔남? 난 마을회관에서 할매들이랑 재미지게 놀다가 막 왔어... 근디 남세스럽게 사진은..."

오 할머니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35년을 사신 분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동네 서쪽 언덕에 새로 집을 지어 이사했다. 도시에서 자손들이 오면, 자손들을 앞세우고 우리 집에 들르고는 했다. "네가 저 방에서 태어났어"하며 집을 둘러보신다. 혼자 들러 툇마루에 우두커니 앉았다 가기도 하신다.

 곽금자 어머님
 곽금자 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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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금자 할머니도 만났다. 마당에 달리아가 소담스럽게 피어 있었다. 양파를 한 봉지 담아주고, 상추도 따 안겨 주셨다.

"요거 쪼까 갖고 가요. 상추는 물만 줬지 아무 것도 안 혔어... 우리 집에 자주 좀 들리지. 이, 낮에는 밭에 나가 사니께..."

 김순애 할머니
 김순애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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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애 할머니는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다말고 일어나 애호박 두 개를 건네주셨다.

"볶아 묵어. 양파 좀 썰어 넣고, 새우젓이랑... 난 이태 드러누워 있다가 시방 일어나, 깨 쩌 놓고... 휴우, 안 아픈 디가 없으니... 설사를 한 달째 허네. 뭔 일인지 무르겄어. 시방, 나가 올 겨울은 못 넘길 것 같어... 아녀. 빨래가 쬐금인디 뭔 세탁기에 돌려... 선상님은 댕길 수 있을 때 많이 댕기고, 묵을 수 있을 때 맛난 것 많이 묵고. 시방, 댕길 수 있을 때 많이 댕기고, 묵을 수 있을 때 많이 묵으라고."

 오판남 할머니
 오판남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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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판남 할머니는 홍시랑 애호박을 내줬다. 오 할머니 집 앞엔 과꽃이 한창이었다. 

"이 홍시 좀 잡숴 봐. 돈 주고 사먹을라 혀도 읎는 겨. 겁나게 맛나. 기경할려도 못허는 종감여. 하왕에서 시아제가 가져온 겨. 아이구, 오늘은 씨아 빠지게 사둔네 산소 매주고 왔네. 네 발로 겼어... 고맙기는, 맛있게 먹어주니 내가 고맙지. 주는 거 안 받고, 안 먹고 가면 내가 서운허지. 고맙구먼."

산책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집으로 서둘러 돌아왔다. 할머니들이 바리바리 꾸려서 준 짐이 무거웠다. 오는 길에 사과밭 일 끝내고 돌아오는 아랫집 아저씨랑 아줌마를 만났다.

"우리 집 열무김치 많은데, 가져다 좀 먹어. 그릇 들고 와."  

옆에서 아랫집 아저씨가 허허 기분 좋게 웃고 계셨다. 물처럼 선한 심성이 웃는 얼굴에 다 보였다. 아침에 옆집 할머니가 같다 준 사과까지, 오늘은 정말 "사랑은 ~ 나의 천국~"이었다.

 풍성한 인심
 풍성한 인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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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고장 난 주크박스처럼 또 다시 흥얼거리다

어두워지기 전, 뒤꼍에서 쓰레기를 주워 모았다. 매일 폐자재들이 축대 위에서 날아와 떨어졌다. 윗집 현이네가 헌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 집을 짓고 있었다. 뒤꼍 화단에서 스티로폼 쪼가리들을 주워내는데, 꼬리 짧은 길고양이 한 마리가 살금살금 지나갔다.

길고양이들이 심심찮게 찾아와 어슬렁거렸다. 나루도(관련 기사 : "본체만체 하길 여러 날, 결국 녀석을 보냈다"의 주인공) 자주 왔다. 나루는 길고양이 대장마냥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지난 해 여름에는 연애도 하고 새끼도 낳았다. 야생동물이 다 됐다.

그런데도 변함없이 내 시야에서 알짱댔다. 오랜만에 보는데 낯가림도 없다. 생쥐를 잡아 툇마루 앞에 놓고 간다. 한밤중 방문을 흔들어 심장 떨어질 정도로 놀라게 한다. 나를 보면 "미아옹 미야옹"하고 애처롭게 운다. 달라진 것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을, 툇마루 앞 잔디밭에 똥을 싸놓고 그냥 가는 거였다. 으, 꼬이는 똥파리들. 나 역시 나루에게 여전했다. 야생에서 살아라. 나는 완전 '쌩 까고' 있다.

"빛과 그리고 그림자~" 한밤중인데 불현듯 또, 방바닥에 기어 다니는 여치를 바라보다가 흥얼거렸다. 내가 방을 들랑거리는 그 틈에, 따라 들어온 거였다. 여치뿐만이 아니라 오늘밤은 유독 날것들이 많이 들어왔다. 나방, 여치, 다리가 긴 풀모기, 노린재에 귀뚜라미까지 들어왔다. 그냥 놔둔다. 그런데 얼마 후, 툭! 천장에서 뭐가 떨어졌다. 으악! 벌떡 일어났다. 기다란 지네였다.

"캬악~ 퇘!"

아랫집 아저씨가 밖에 잠깐 나왔다 들어가셨다. 한밤중의 그 소리는 문단속을 안 해도 안전하다는 신호처럼 들렸다. 산중에서 혼자 잠드는 내 잠자리를 밤마다 아래, 위, 옆, 지척에서 지켜주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오늘 밤 꿈속에서도 고장 난 주크박스처럼 노래를 부르는 건 아닐까? 

"빛과 그리고 그림자~ ... 이 생은~ 나의 천국~ 이 생은 나의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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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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