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가 본격적인 슈틸리케호 1기의 출항을 알렸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29일 오전 축구회관에서 10월 국가대표 평가전(10일 파라과이, 14일 코스타리카) 2연전에 출전할 선수 명단을 확정 발표했다.

급격한 변화나 실험적인 시도보다는 안정에 초점을 맞춘 인상이 두드러졌다. 신태용 코치 대행체제로 치렀던 지난 9월 베네수엘라-우루과이전에서 검증된 기존 선수들 위주로 신·구세대와 해외파-국내파의 조화를 감안한 선수명단을 내놓았다.

슈틸리케 감독은 일단 "새로 부임한 감독으로서 기존 대표팀 명단을 기본으로 해서 선발했다"고 밝혔지만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한다"는 표현을 통하여 원점에서 하나하나 팀을 새롭게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슈틸리케 감독의 선택은 일단 9월 평가전에서 확인된 기존 선수들의 기량이 합격점을 받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9월 2연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베테랑 이동국, 차두리는 슈틸리케호 1기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20대 초중반의 젊은 선수들이 많은 대표팀에서 경험 많은 고참으로서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역할도 기대된다.

유럽파 손흥민, 기성용, 이청용, 구자철, 김진수, 박주호, 중동파인 곽태휘, 한국영, 남태희, 이명주 등 주축 해외파들도 모두 변함없이 부름을 받았다. 다만 아시안게임에 출전중인데다 부상까지 겹친 김신욱과, 최근 카타르의 엘 자이시로 이적한 이근호는 선수보호와 팀 적응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

슈틸리케 감독이 신뢰받는 이유

새로운 선수중에는 K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준 홍철, 김기희 등을 비롯하여 아시안게임에서 3경기 연속골을 넣으며 23세 이하 대표팀의 주득점원으로 맹활약하고있는 김승대가 승선하여 눈길을 끌었다. 골키퍼는 김승규와 김진현이 다시 부름을 받았다. 모두 소속팀에서 오랜 시간 꾸준히 활약하며 실력을 인정받은 선수들이다.

한편으로 슈틸리케 감독은 부임 이후 길지않은 시간에 한국과 유럽을 오고가며 아직 선수들을 파악할 시간이 부족했던 상황. 때문에 1기 멤버는 아직 슈틸리케 감독의 의중이 100% 반영된 라인업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슈틸리케 감독을 보좌하고 있는 기존 국내 코치진이나 기술위의 조언이 많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슈틸리케 감독은 자신이 직접 선수들의 기량을 점검해보고 평가하겠다는 입장이다.

다만 슈틸리케 감독은 1기 명단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앞으로 자신이 추구하게 될 대표팀 운영 방향에 대하여 뚜렷하고 구체적인 기준을 내비쳤다. 핵심은 한국축구의 특성과 장점을 살린 축구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과 아시아축구의 장점으로 활동량을 꼽았다. 반면 유럽은 아시아보다 체격조건과 파워에서 한 수 위다. 슈틸리케 감독은 먼저 한국과 유럽 선수들간의 기본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해답을 찾았다. "자연적인 조건과 체격은 내가 바꿀수 없다. 한국 선수들의 특징에 맞춰서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팀을 운영할 것이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공정한 경쟁에 대해서도 약속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외국인'인 만큼 기존 한국축구에 선입견이 없다는 것을 자신의 장점으로 내세웠다. "그동안 선발된 선수와 그렇지 못한 선수들, 국내파와 해외파를 가리지 않고 충분히 기회를 주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동안 대표팀 내 특권 계급처럼 인식되는 유럽파에 대해서도 "손흥민처럼 꾸준히 주전으로 활약하는 선수들은 문제가 없다. 다만 유럽에서 뛰지만 벤치에 있는 선수들이 있다"며 대표팀 선발의 기준이 이전과는 달라질 것임을 시사했다.

슈틸리케 감독이 1기 대표팀에서 점검할 한국축구의 첫 현안으로 제시한 것은 골 결정력 문제다. 이는 한국축구의 고질적인 대형 공격수 부족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번 대표팀에서 이동국을 제외하고 정통 스트라이커는 전무하다. 김신욱이 부상과 AG 차출로 제외되고, 무적 신분인 박주영과 16세 이하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신성 이승우도 부름을 받지 못했다. 대신 슈틸리케 감독은 김승대를 대안으로 선택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 축구의 장점으로 점유율이 좋고, 골대 20m까지 접근하는 과정도 우수하다고 평가했지만, 정작 마무리를 못하는 것을 최대 약점으로 꼽았다. 10월 A매치에서 공격수들의 기량 점검은 물론 다양한 전술변화 시도 역시 가능성이 열린 부분이다.

새로운 대표팀의 시작과 함께 눈길을 끄는 것은 슈틸리케 감독의 행보다. 슈틸리케 감독은 시종일관 진중하고 사려깊은 자세를 보여줬다. 조심스럽고 신중하면서도 한국축구가 처한 핵심적인 문제점들을 거론하는 대목에서는 대표팀 사령탑으로서의 자신이 해야할 역할과 책임감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부임과 동시에 거창한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거나, 그럴듯한 말로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 시종일관 원 팀, 만화축구 등의 번지르르한 구호를 내걸었지만 늘 말만 앞서고 실제가 달랐던 전임 감독들과 차이를 드러낸 부분이다. 무조건 자신의 축구철학에 맞춰 대표팀과 선수들이 따라와야 한다는 식의 성급한 독선을 앞세우지도 않았다.

부임 한 달도 안 된 초보 외국인 감독임에도 한국축구를 바라보는 슈틸리케 감독의 접근은 언제나 신중했고, 각종 현안에 대한 상식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입장은 듣는 이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어쩌면 당연한 슈틸리케 감독의 행보가 벌써 많은 팬들의 공감을 얻는 것은, 그만큼 그동안의 한국축구에서 비상식적인 행태가 만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슈틸리케 축구의 색깔은 아직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데 있다. 대표팀은 그간 결과에만 치우쳐 과정의 중요성을 무시해왔다. 슈틸리케호는 바닥으로 떨어진 한국축구의 국제적 위상은 물론이고, 대표팀의 근본적인 원칙과 시스템을 바로 잡아야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슈틸리케 감독이 앞으로도 합리성과 원칙, 소신이라는 초심을 잃지 않을수 있을지 지켜봐 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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