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진 감독, 신은경 주연의 영화 <설계> <타짜>와 <신의 한 수>를 모방한 느와르이자 스릴러. 그러나 시나리오에 비해 어수선한 연출력과 편집은 관객으로 하여금 몰입도를 떨어뜨리고 만다. 신은경의 연기 외에는 "재설계" 후 개봉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 박창진 감독, 신은경 주연의 영화 <설계> <타짜>와 <신의 한 수>를 모방한 느와르이자 스릴러. 그러나 시나리오에 비해 어수선한 연출력과 편집은 관객으로 하여금 몰입도를 떨어뜨리고 만다. 신은경의 연기 외에는 "재설계" 후 개봉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 팝엔터테인먼트

초반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환하게 웃고 있는 '세희'가 등장하는 화면은 소프트한 필름을 사용해서인지 전체적인 장면이 화사하고 눈부시다. 이는 '세희'를 중심으로 시간의 축이 바뀌고, 그녀가 악랄한 사채업자로 탈바꿈하게 되는 심적변화를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감독에 대한 믿음은 초반까지만...

가족같았던 아버지의 비서가 배신함으로 '사람에 대한 믿음'에 생채기를 가지게 되는 그녀의 슬픔은 이 영화가 결말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고 팽팽하게 끌어갈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거기까지는 나름대로 신파적인 연출력과 영상미가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성장한 '세희'(신은경 분)가 '명동 큰 손'으로부터 사업 수완을 전수받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꼬여 버린다.

'세희'를 필두로 한 '명동 사채업자'(이기영)와 그녀를 그림자처럼 지켜주는 '용훈'(강지섭) 그리고 '세희'의 선택을 받은 '민영'(오인혜)의 각 캐릭터 구축은 과연 누가 살아남고 나중에 배신은 누가하며 결국 돈을 움켜쥐는 자가 누군지를 암시하는 중요한 장치다.

결론은 신은경의 연기 밖에는 실로 볼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서스펜스 스릴러를 표방한 영화로서는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다. 차라리 히치콕시리즈를 리메이크 하는 것이 이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사람 위에 돈 있고, 돈 위에 사채업자가

전체적인 줄거리를 보자. 사채업을 하고 있는 아버지는 가족처럼 생각하는 비서에게 배신을 당해 살던 집에서 쫓겨난다. 단칸방에서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매달 이자를 갚아 나가는 그녀. 아버지의 자살마저 경험한 세희! 그녀는 매달 돈을 독촉하는 죽은 '아버지의 비서'에게 몸을 빼앗기고 빚을 탕감받는다. 세희는 돈을 벌기 위해 그리고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른바 '텐프로'에서 일하게 된다.

그녀는 여기에서 자신의 운명을 바꿔 줄 '명동의 큰 손'(이기영)을 만난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사채업자. 세희는 그를 통해 '사채'라는 세계에 발을 들여 놓으며 특유의 사업 수완으로 '명동 큰 손'보다 더 차갑고 냉혈한 피를 가진 사채업계의 여사장으로 거듭난다.

그 와중에도 틈틈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칼을 갈고 있던 그녀는 천금 같은 기회를 맞게 된다. 300억 무기명 채권을 작업하기 위해 아버지의 배신자와 만나 손을 잡고 '설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영화 <설계>의 주요 등장 인물 왼쪽부터 '명동의 큰 손'(이기영), '세희'(신은경), '민영'(오인혜), '용훈'(강지섭)

▲ 영화 <설계>의 주요 등장 인물 왼쪽부터 '명동의 큰 손'(이기영), '세희'(신은경), '민영'(오인혜), '용훈'(강지섭) ⓒ 팝엔터테인먼트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한 주요 인물로 '용훈'(강지섭)과 '민영'(오인혜) 그리고 의상실 실장(강걸)이 등장한다. 용훈은 세희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그녀를 지켜주고 혹은 해결사로의 역할을 해낸다.

거의 대사 없이 표정과 행동으로 모든 것을 보여 주는 그는 끝까지 세희를 배신하지 않는다. 민영은 편의점에서 일하다 사채업자에게 돈 갚을 것을 독촉 당하는데 이 장면을 세희가 보게 되고, 자신의 어릴 적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그녀를 보며 동질감을 느낀 세희는 그녀를 선택하고 자신의 사업에 그녀를 끌어 들인다.

이들을 데리고 아버지의 복수를 위한 '설계'에 들어간 세희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변수를 맞는다. 자신이 자주 방문하는 곳의 의상실 실장인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업계의 진리를 거스르고 사랑 앞에서 그녀는 무너지고 만다. 세희가 20대 중반의 연하 남에게 마음을 주는 순간 그녀의 '설계'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설계'는 연출력과 편집부터...

가장 중요하게 연출되고 편집기능이 힘을 발휘되어야 할 곳이 이 부분부터이다. 나름대로 감독은 이 부분에서 상당한 욕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영상을 중심으로 한 종합 예술로서의 영화엔 어떠한 욕심도 허락되지 않는다. 선을 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고 과감하게 베팅을 해야 할 부분이 있다.

세희의 '설계'대로 복수극은 흘러가지만, 끊임없이 도중에 반복되는 배신과 음모의 굴레는 전혀 긴장감과 자극을 주지 못한다. 베드신은 뜬금없었고, 각 캐릭터간 치밀한 두뇌싸움은 자막으로 표현되지만, 단순하고 지나친 반복으로 인해 몰입을 방해한다. 스릴러 장르에서 볼 수 있는 잔혹한 치정살인이라든지 살벌한 두뇌싸움 그리고 감독이 반전이라고 내뱉는 장면에서는 관객 모독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영화로서 <설계>는 초보 영화학도가 공들여 만든 듯 한 습작에 담당 교수의 냉소적인 눈빛이 가득하다. 관객의 수준을 너무 얕보았음일까? 스토리와 구성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없어 보인다.

오인혜의 낮은 톤과 남자를 유혹할 때의 간드러지는 하이 톤은 너무도 귀에 거슬린다. 더구나 영화의 포스터처럼 '치명적인 매력'으로 등장하는 오인혜는 복합 다중적 이미지인 '민영'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겉돌기만 한다. 신은경과 함께 출연했다는 것만으로 충무로에서 오인혜의 가치 상승을 기대했다면 아직은 보류해야 할 듯.

또한, 세희 옆에서 묵묵히 그녀를 지켜주고 때로는 해결사가 되어 주는 강지섭의 모습은, 과거 텔레비전 드라마 <모래시계>의 마초적이며 다소 순애보적인 이정재를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허나 그랬다면 감독은 그의 눈빛에 걸맞은 연출력과 대사분량에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세희가 의상실의 연하남과 사랑에 빠지는 장면은 가장 극적인 반전의 장치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밋밋한 연기력 때문인지 그는 깊은 산 속의 흙구덩이 속에서 매장되는 것으로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관객은 정직하다

흥행을 만드는 것은 감독도 아니고 시나리오나 연출력이 아니다. 오직 관객만이 흥행을 만든다. 최근의 영화 <타짜>나 <신의 한 수>를 모방한 느와르 풍의 시나리오와 영상, 카메라 워크, 플롯이 존재하지만 이 영화는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커다란 오점으로 남을 것 같다.

설계 신은경 오인혜 박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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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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