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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분(秋分, 9월 23일) 절기를 지나면서 낮보다 밤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들판의 풀들은 기세등등하던 녹색의 푸르름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오행(五行)의 원리인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로 보면 가을에 해당하는 금(金)은 결실을 거두는 풍성한 계절이면서 죽음의 계절이기도 하다.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풀들은 종족 번식의 본능에 따라 씨앗을 남긴 뒤에 사그라진다. 곧이어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씨앗을 사방으로 날려보낸다.

동화같은 풀들의 전략
 동화같은 풀들의 전략
ⓒ 도솔오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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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을 뽑고 돌아서면 또 풀이 올라온다'는 말은 그리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며칠 사이에 한 뼘씩 쑥쑥 올라오는 풀들을 보면, 그 질긴 생명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풀들은 왜 한 번에 싹을 틔우지 않고 순서를 지켜가며 세상 밖으로 나오는 걸까?

"발아하기 적당하다고 한꺼번에 싹을 틔우면 어떻게 될까? 만약에 어떤 재해가 일어나면 그 집단은 순식간에 다 죽어 버릴수도 있다. 그와 같은 사태를 피하기위해 잡초는 발아 시기를 늘려가면서 위험의 분산을 꾀한다." - 본문중에서 -

'잡초'로 불리는 풀에 이렇듯 치밀하게 계산된 생존전략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아무리 독한 제초제를 뿌리고, 화염으로 불태우고, 흙을 갈아엎어 뿌리째 뽑아내더라도 풀을 절대로 없애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잡초생태학을 전공하고 농업시험장에서 잡초를 연구하는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풀들의 전략>은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50가지의 야생 풀과 꽃들의 생존전략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또한 사진으로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세밀화 그림으로 보여준다.

키 작은 풀들의 생존 전략

키가 작은 풀들은 광합성하는 햇볕을 두고, 키 큰 풀들과 함께해서는 생존에 불리하다. 그리하여 그들이 선택한 전략은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에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처럼 집단으로 뭉쳐서 살아간다. 잎도 위로 세우지 않고 옆으로 바닥에 뉘어져 있어서 밟혀도 죽지 않도록 진화되어왔다.

그중에 대표적인 질경이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풀에 비유된다. 지금 이 가을에 질경이는 씨앗을 만들고 있다. 흙 위를 걸어가고 있다면 발밑을 내려다보라. 

"만약 사람들이 질경이를 밟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밟히면서는 살 수 없는 온갖 풀과 나무들이 삶의 터전을 찾아 그곳으로 몰려들어 오리라. 질경이는 밟히는 데는 강하지만, 다른 식물과 해야 하는 생존 경쟁에는 약하다. 그러므로 그렇게 되면 되레 질경이가 다른 식물에 쫓겨나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빚어진다." - 본문 중에서 -

짓밟혀도 되살아나는 질경이는 사람이 사는곳에 많다
 짓밟혀도 되살아나는 질경이는 사람이 사는곳에 많다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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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비름도 작은 키 때문에 다른 풀들과의 경쟁을 피해서 덥고 건조한 지역을 근거지로 선택했다. 한여름에도 뿌리를 뽑히더라도, 죽을 때까지 흙 속으로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쇠비름에 비라도 내리면 금세 되살아나는 것을 농사지으면서 자주 봤었다. 악조건에서도 가장 생존력이 강한 풀이 쇠비름이다.

동의보감에도 나오는 쇠비름은 약이 되기도 하고, 나물로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잎부터 뿌리까지 버릴 것이 없는 쇠비름은 다른 식물과는 다른 독특한 생존전략을 가지고 있다.

"광합성은 햇살이 비치는 낮 동안에만 할 수 있기 때문에 보통은 낮에는 숨구멍을 열고 밤에는 닫는다. 그런데 건조 지대에서는 그렇게 하는 데 문제가 있다. 낮에 숨구멍을 열면 귀중한 수분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거기에 쇠비름이 생각해 낸 것이 'CAM'이다. 이 'CAM' 시스템에서는 기공의 개폐가  일반 식물과 완전히 거꾸로다. 수분 증발이 적은 밤에 숨구멍을 열고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여서 저장해 둔 뒤 낮이 되면 숨구멍을 닫고 저장해 둔 이산화탄소를 재료로 광합성을 하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

풀은 대지의 어머니

봄의 전령사 냉이는 겨울에 자라고 봄에 가장 먼저 핀다
 봄의 전령사 냉이는 겨울에 자라고 봄에 가장 먼저 핀다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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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전령으로 알려진 냉이는 가장 먼저 꽃을 피우고 씨앗을 퍼뜨린다. 겨울 동안에 흙 속에서 씨앗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흙 위에 잎을 바짝 붙인 채로 추운겨울을 보내기 때문에 다른 풀들보다 앞서 봄을 맞이한다. 겨울에도 뿌리가 자라기 때문에 냉이는 봄나물이 아니라 겨울나물이다. 추위가 남아있는 이른 봄에 들녘에 나가보면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바싹 엎드려 있는 자연냉이를 만날 수 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에서 풀처럼 사연도 많고,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 또 있을까. 풀은 땅의 주인으로서 오랜 시간 자연의 법칙에 따라 피고지면서, 생명의 근원인 흙을 키워냈었다. 그러나 문명기술의 발달으로 점차 흙을 빼앗기고, 쫓겨났지만 또다시 묵묵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와서 흙을 품는 것이 풀이다. 마치 어머니와 같다.

가을은 결실을 맺으면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계절이다
 가을은 결실을 맺으면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계절이다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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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계절 가을, 스러져가는 풀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조문(弔問)을 온 것 같은 숙연한 마음으로 잿빛으로 스러져가는 풀들을 어루만지며, 한 움큼 씨앗을 받아 저 멀리 던져본다.

바람에 날려가며 읊조리는 듯한 말이 메아리로 되돌아온다.

'너희 젊음이 너희가 노력해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 영화, <은교> 중에서 -

덧붙이는 글 | 풀들의 전략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마카미 오사무 그림. 최성현 번역 /도솔오두막/ 9,900원



풀들의 전략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최성현 옮김, 미카미 오사무 그림, 도솔(2006)


태그:#잡초, #풀, # 쇠비름, #냉이, #질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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