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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계단이나 올랐나? 돌아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또, 열 계단이나 올랐나? 또, 돌아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코론 시의 북쪽 언덕 꼭대기에 있는, 타피아스 에코 파크(Mt. Tapyas Eco-park) 전망대에 오르는 길이었다. 열대의 태양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코론에 도착한 후, 5일 동안 바다에 나갔었다. 스쿠버 다이빙을 배웠다. 상상을 뛰어넘도록 무섭고 신기한 경험을 했다. 그리곤 어제부터 혼자 코론 시를 배회했다. 머릿속에선 바다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환경운동가이며 해저 탐험가이고 영화감독인 자크 쿠스터의 말이 맞나?

'바다의 마법에 한 번 걸리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
   
700개가 넘는 콘크리트 계단을 겨우겨우 다 올랐다. 한국식당에서 김치찌개랑 쌀밥을 배 터지게 먹은 직후라, 기운이 펄펄 났지만 계단은 역시 힘들었다. 거기다가 마지막 30여 개의 계단은 쉬지 않고 뛰다시피 올랐다. 좀 무리했다. 허리를 접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펄펄 끓는 물주전자처럼 쉭쉭거리며. 목덜미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불쑥, 생수병이 나타났다.

"워터! 워터!"

한 사내아이가 내 눈앞에서 생수병을 흔들고 있었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필리핀 아이였다. 커다란 눈망울에 어쩐지 수줍음이 가득해 보였다. 나는 가방에 든 물병을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스박스를 멘 아이의 마른 어깨가 땅에 닿을 듯 기울었다.

들고 있던 DSLR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여행일지를 꺼냈다.

'오후 3시 42분-타피아스 전망대 도착.'

갈겨썼다.

타피아스 전망대에서
▲ 코론 타피아스 전망대에서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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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돌린 후, 남쪽 난간으로 다가갔다. 전망이 탁 트였다. 언덕 아래 코론 시와 코론 만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풍광이 시원했다. 이 맛을 보려고 고된 길을 오른 거였다. 부수앙가 섬의 남쪽 해안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가는 코론 시, 낡고 오래된 건물과 현대식 건물들이 뒤섞여 있었다. '잠자는 거인'처럼 동남쪽 바다에 누워있는 코론 섬, 앞바다에 떠있는 섬들... 그리고 푸른 바다. 서둘러 카메라를 들었다. 렌즈를 밀고 당기며, 부지런히 셔터를 눌렀다.

5000여 년 전 코론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은 '딱반와(Tagbanua)' 족이었다고 한다. 필리핀으로 이주해 살던 인도네시아인들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고기를 잡고 농사를 지었다. 그 후에는 말레이시아 후손들이 들어와 정착했다. 스페인과 미국의 점령기를 거친 후, 이곳에선 엄청난 광산 붐이 일어났다. 1939년부터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그때 루손(Luzon) 섬과 비사야(Visayas) 지방에서 어부나 광부가 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왔다.

지금 코론은 관광도시로 개발 중이다. 현대식 건물의 호텔과 리조트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쓰레기매립지에는 시장이 들어설 거라고 했다. 코론은 바닷가 도시지만 모래사장이 없었다. 수영을 하려면 방카를 타고 가까운 섬으로 나가야 했다. 아무튼 이젠 관광객들이 코론의 바다로 몰려오고 있었다.  

난간 앞 벤치에 앉았다. 여행일지를 꺼냈다. 양 손바닥 크기의 파란색 노트. 수시로 꺼냈다 넣다 폈다, 하다 보니 겉장 모서리가 벌써 해졌다.

메모하고 사진 찍어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다

팔라완 여행을 시작한 지 7일째, 나는 메모를 하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고 있었다. 수시로 개발새발 적기에 바빴다. 정신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기억력이 불완전하므로. 폭력적이리만치 하루하루 노화하는 뇌세포 때문에 더더욱. 그런데 여행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항상 펜을 목에 걸고 다니며 더 부지런히 기록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녹음기나 포스트잇이 필요한 건 아닐까? 팸플릿, 영수증, 명함 등도 꼬박꼬박 챙겨야겠지? 불안하고 초조했다.

더 '늙기' 전에 나선 배낭여행이었다. 눈이 침침해지고, 갑자기 추웠다 더웠다 몸은 널뛰고, 규칙적이던 생리도 오락가락... 노화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몸에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니 더 망가지기 전, 몸을 쓰고 굴리고 느끼는데 여행만한 것이 없겠다 싶었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말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는 건, 삶의 의미가 아니라 살아있음의 체험'이라고. 내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체험을 통해 '살아있음의 황홀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몸과 영혼과 우주가 공명할 때의 그 짜릿짜릿함. 몸이 있어야만(살아있어야만) 겪을 수 있는 것.

하지만 매사 기록하고자 하는, 나의 강박적인 행동이 그 체험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았다. 깊이 빠져들지 못하겠으니.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욕망) 때문에 결국, 내 인생의 수십 년이 공으로 흘러가 버렸듯 이젠 여행기를 쓰겠다는 꿈(욕망) 때문에, 이 여행마저 망쳐 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카메라나 여행일지 따위 개나 주워가라, 집어던져 버리고 싶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자유롭게 떠돌고 싶다'라는 생각이 불쑥불쑥 치솟았다. 그냥 '기록'을 즐길 수는 없나?

문득, 이지상 여행작가의 여행일지가 떠올랐다. 여행 중에 친구 같았다는 그의 '실크로드 여행일지'를 보게 됐다. 이태 전, 이 작가의 여행기 작법 강의를 들을 때였다. 글자가 빽빽하게 가득 찬 대학노트였다. 하루치 메모가 서너 장이 넘었다. 먹고 마시고 자고 이동하고 보고 느끼고... 꼼꼼한 기록이었다. 안타깝게도 무슨 내용인지 읽을 수는 없었다. 원래 악필인가, 급하게 휘갈겨 썼나. 한글인지 한자인지 그림인지 도저히 해독할 수 없었다. 글쓴이 혼자만 알아볼 수 있겠다.

넘기다 보니 용케 눈에 들어오는 글이 있었다. 딱 한 줄이었다. 노트 한 귀퉁이에 동전만한 크기로 단발머리 여자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 밑에 또박또박 쓴, '은경아, 보고 싶다!' 순간, 마치 내가 그 '은경'이 인양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때 이 작가가 "내 와이프 이름도 은경이에요"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멋쩍게 웃었다.

이 작가의 여행노트 속 '은경'이를 떠올리며, 여행일지 한쪽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나도 먼 여행지에서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그려볼 양. 그런데, 어라? 내가 그린 얼굴은 흰동가리 같더니, 나비고기 같더니, 지느러미가 자꾸 뻗쳐나가 결국 라이언 피시처럼 됐다. 그래서 '바다, 보고 싶다!'라고 그 밑에 썼다. 내가 '바다의 마법' 주문에 걸렸나? 다음 줄에는 또박또박 '여행일지, 친해지자!'라고 썼다.   

여행일지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전망대 광장엔 스무 명 가량의 사람들이 어슬렁거리며 풍광을 감상하고 있었다. 유럽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 한 명, 나머지는 필리핀과 중국 사람들이었다. 광장 북쪽엔 철 구조물 덩어리들이 떨어져 있었다.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대형 철 십자가가 몇 토막으로 동강난 거였다. 5개월 전, 태풍 하이옌이 지나간 자리였다.

전당대 계단, 태풍에 쓰러진 나무들
▲ 코론 전당대 계단, 태풍에 쓰러진 나무들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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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올라오면서 본 동산의 풍경도 그랬다. 뿌리째 뽑혀 쓰러진 거목들이 말라가고 있었다. 모진 바람이 불어도 꺾이지 않는다는 대나무도 요절났다. 꺾이고 뽑혔다. 하이옌은 코론 시에서 10여 명의 사망자를 냈고, 선착장의 방카(배)를 대부분 파손시켰다.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는 인간이 자연 앞에서 때론 속수무책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때론 너무 광포해서, 무서워서... 아, 정말 바다에 가고 싶다. 안 되겠다. 내일은 다시 바다에 가야겠다.

1년에 한 번 산불 난다는데, 정말?

타피아스 전망대 북쪽 풍경
▲ 코론 타피아스 전망대 북쪽 풍경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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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러진 철 십자가를 지나, 북쪽으로 구부러진 오솔길을 조금 올라갔다. 풀 덮인 민둥산 너머로 불룩불룩 산봉우리들이 솟아 있었다. 민둥산은 불탄 자국처럼 밑동이 거뭇거뭇한 풀밭이었다. 1년에 한 번 꼴로 산불이 난다는데 사실인가 보았다. 가파른 경사 길 아래 연두색 지붕의 정자 한 채가 보였다. 아름다웠다. 가볼까, 하다가 말았다. 몸을 꼭 붙이고 정자로 걸어가고 있는 연인의 뒷모습만 지켜보았다.

필리핀 부부 여행자
▲ 코론 필리핀 부부 여행자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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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바다가 바라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잠시 후, 덩치 큰 여자가 나타나 팔짝팔짝 제자리 뛰기를 했다. 바다를 등지고. 남자가 그 앞에 앉아 그 여자의 '공중부양'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팔라완의 주도인 프에르토 프린세사(Puerto Princesa)에서 여행 온 필리핀 부부였다. 그 부부와 코론의 바다를 극찬하며 잠시 여행얘기를 나눴다.

석양
▲ 코론 석양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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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떠나고 나는 혼자 일몰을 기다렸다.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인데, 여행지에서 보는 일출과 일몰은 늘 특별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서쪽 하늘과 바다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붉은 해를 바라보며 '나, 여기 있어!' 속으로 소리쳤다. 살아 있다고, 살아 있다고. 목이 탔다. 물병을 꺼냈다. 물이 딱 한 모금 남아 있었다. 탈탈 털어 마셨다. 생수 파는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태그:#팔라완, #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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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2017년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출간. 유튜브 <은경씨 놀다>. 네이버블로그 '강누나의깡여행'. 2019년부터 '강가한옥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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