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밀양은 고래로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일컬어진다. 아무래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생가가 부북면 추원재길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필재는 누구인가? 조선 초기 훈구파에 대항하여 참신한 정치세력이었던 사림파의 우두머리이자 영남유림의 대표였다.

점필재는 조선 전기의 대문장가였으며, 세조에서 성종대에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을 지낸 신진관료이기도 했다. 조선의 9대 임금인 성종은 사대부정치의 청신성을 되찾기 위해 여말 온건개혁파인 정몽주와 길재의 학풍을 계승한 김종직을 비롯한 영남사람들을 대거 등용함으로써 훈신과의 세력균형을 유도했다. 또한 훈신, 사림의 합작으로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이념과 법체계의 정립작업을 독려하였다.

이들을 사림이라고 부른 이유는 훈신들과 달리 왕도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점필재의 휘하에는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남효온 등이 모여들어 성리학의 실천에 몰두하게 된다.

-김숙자가 처음 거처를 정하고 그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이 출생하고 별세한 곳으로 영남 유림의 본산으로 불리는 곳이 바로 추원재이다.
▲ 추원재. -김숙자가 처음 거처를 정하고 그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이 출생하고 별세한 곳으로 영남 유림의 본산으로 불리는 곳이 바로 추원재이다.
ⓒ 박태상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상황은 바뀌어 신구세력들은 연산군의 광기를 부채질하여 1498년(연산군4년) 무오사화, 1504년(연산군10년) 갑자사화를 일으켜 양쪽 모두 피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다.

중중반정으로 다시 사림은 성장하게 되는데 기묘사림으로 별칭되는 조광조, 김안국, 김정국, 김식 등이 등장하여 군주에게 철저한 수신을 요구하며 철인정치의 이상을 추구하려 하였다. 다시 무오사화로 돌아가면, 당시 사관으로 있던 점필재의 문인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하였고, 이것이 연산군대의 필화사건으로 이어지며, 결국 점필재는 부관참시를 당하게 된다.

사림파의 전통은 중종 후기에 조식과 서경덕이 활동하고, 인종대에 이언적, 명종대에 퇴계 이황, 선조대의 율곡 이이까지 이어진다. 퇴계의 이기이원론과 율곡의 일기일원론의 대립은 실천적 행동철학으로서의 성리학과 주자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수기치인의 근본이념에 따라 수기(修己)의 단계에서 학문과 인격을 도야한 사(士)가 치인(治人)의 단계인 대부(大夫)가 되어 '사대부'라는 학자관료들이 중앙정계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에 따라 학문적 차이가 정치노선의 차이로 나타나게 되어 영남학파의 동인과 기호학파의 서인으로 대립되게 되었다.

추원재를 둘러보고 약 10분 거리에 있는 예림서원을 찾아갔다. 예림서원은 김종직 선생의 학문과 덕을 추모하는 서원으로 점필재문집의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 또한 크다. 

-국난의 위기 때는 비면에 땀방울이 맺힌다는 소문으로 구름 관중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밀양의 3대 불가사의 중 한 곳이다.
▲ 표충비 -국난의 위기 때는 비면에 땀방울이 맺힌다는 소문으로 구름 관중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밀양의 3대 불가사의 중 한 곳이다.
ⓒ 박태상

관련사진보기


부북면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인 무안면에는 밀양의 3대 불가사의로 일컬어지고 있는 <표충비>가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국난을 극복한 사명대사의 뜻을 새긴 비석으로 홍제사 경내에 있다. 나라에 큰 사건이 있을 때를 전후하여 비석면에 땀방울이 맺혀서 구슬처럼 흐르는데, 이를 두고 사람들은 나라와 겨레를 걱정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라고 신성시하고 있다.

-조선조 때부터 사람들은 영남루를, 남강의 촉석루와 대동강의 부벽루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누각으로 불렀다.
▲ 영남류 -조선조 때부터 사람들은 영남루를, 남강의 촉석루와 대동강의 부벽루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누각으로 불렀다.
ⓒ 박태상

관련사진보기


표충비를 나와서 밀양시 중앙로에 위치한 밀양의 자랑거리인 '영남루'를 방문했다. 10월 중순 단풍철에 가장 아름다운 영남루에 오르면 남천강이 남천교와 밀양교를 가로질러 도도하게 흐르게 된다. 영남루는 원래 밀양군의 손님을 머물게 하던 밀주관의 부속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4칸에, 기둥의 간격을 넓게 하고 마루바닥을 높여, 웅장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다.

영남루라 쓴 현판은 명필 성파 하동주가 쓴 것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여러 문인들이 영남루를 읊었던 시가 전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영남루를, 남강의 촉석루와 대동강의 부벽루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누각으로 부르고 있다.

영남루 정원 건너편에는 단군으로부터 신라, 백제, 고구려,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시조신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천진궁이 있으며 영남루 아래 대나무 숲에는 유명한 아랑각전설의 아랑각이 위치하고 있다. 또 사명대사 동상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애수의 소야곡> 등 우리나라 수많은 애창 대중가요를 작곡한 박시춘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아랑은 밀양부사의 딸인 동옥으로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다. 아전 중에 주기란 자가 동옥의 미모에 반해 유모를 매수하여 그녀를 달맞이 놀이에 가자고 부추겨 영남루로 유인하고 사라졌다. 이후 주기가 나타나 사랑을 고백하지만 신분이 다른 동옥은 그것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러자 주기는 그녀를 강제로 겁탈하려고 하다가 저항하자 칼로 등을 찔러 살해하고는 영남루 아래 대나무 숲에 버리고 도망간다.

그날 이후 신관사또가 부임하면 아랑의 영혼이 나타나 억울함을 표하며 신원을 부탁하게 되는데, 고을군수는 놀라 사망하여 마을이 폐읍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랑각 전설의 토대를 이루는 줄거리이다. 소위 신원설화인 아랑각 전설은 조선조 후기 인기소설인 <장화홍련전>이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랑각전설이 서려있는 곳으로 동옥의 귀신이 현세에 출현하여 새로 온 고을군수에게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호소함으로써 폐읍이 된다.
▲ 아랑각 -아랑각전설이 서려있는 곳으로 동옥의 귀신이 현세에 출현하여 새로 온 고을군수에게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호소함으로써 폐읍이 된다.
ⓒ 박태상

관련사진보기


아랑각에서 걸어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밀양관아를 찾아갔다. 지방 수령이 공무를 처리하던 곳을 관아라고 한다. 애초에 밀양읍성을 축조할 때 백여 칸의 밀양관아를 지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모조리 불타버렸고, 광해군 무렵에 재건하였다. 조선 후기에 오면서 관아는 동헌, 정청, 매죽당, 북별실, 내삼문, 연훈당, 전월당, 신당 등으로 구성되었다고 전해진다. 동헌 마루에 있는 밀양부사의 조형물이 색깔이 다채로워 눈에 확 들어왔다. 관아를 둘러보고 다시 밀양읍성으로 향했다. 영남루 앞 정원을 가로질러 사명대사 동상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사명대사의 동상을 지나 꽃길을 걸어가다 보면 밀양읍성으로 올라가는 돌계단길이 나온다. 한참 나무숲을 거쳐 오르다보면 밀양읍성 깃발이 눈에 들어온다.

-성종 10년(1479년)에 만든 것으로 다른 읍성이 임진왜란 직전에 축조된 것에 비해 100년 이상 앞선다.
▲ 밀양읍성 -성종 10년(1479년)에 만든 것으로 다른 읍성이 임진왜란 직전에 축조된 것에 비해 100년 이상 앞선다.
ⓒ 박태상

관련사진보기


밀양읍성은 선조 23년에 부사 신잡에 의해 성 둘레의 물을 끌어들여 해자를 파고 물로서 성을 지키는 방식으로 새로 축조되었다. 신잡부사는 못 3개, 우물 8개, 동문, 서문, 북문, 남문(공해루) 4대문과 야문을 조성했다. 성안의 모든 상여나 시신은 동서야문을 통과하게 하였다. 하지만 1902년 경부철도가 통과될 때와 1934년 밀양에 교량을 놓을 때 읍성이 상당수 파괴되었다. 경남 밀양시는 밀양읍성과 동문 복원을 통해 일제의 흔적을 지우고 민족정기를 되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밀양읍성을 내려와서 어디로 갈까를 잠시 망설였다. 밀양의 3대 신비 중에서 얼음골, 만어산 경석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지도를 보니 두 곳의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얼음골 결빙보다는 <1박2일>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만어산 경석을 가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만어산은 해발 670.4m라 생각보다 높았고 가는 길도 속리산 고개 오르는 것처럼 고불고불 돌아서 올라가는 멋진 코스였다. 가을 단풍철에 가는 길이 더욱 아름다울 것 같았다.

만어사는 가락국 수로왕이 창건하였다고 삼국유사에서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 고대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뒷받침 해주는 전통사찰로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절이다. 사실 만어사보다도 더 유명한 것이 산길로 접어들면서 목격하게 되는 지천으로 널려있는 커다란 이끼 낀 바위덩어리들이다. 만어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대장관인 각종 바위들이 너부러져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너부러져 있는 크고 작은 반석 2/3가량에서 경쇠소리가 난다는 신비로운 바위들로서 밀양의 3대 불가사의에 포함된다.
▲ 만어산 어산불영경석(魚山佛影磬石) -너부러져 있는 크고 작은 반석 2/3가량에서 경쇠소리가 난다는 신비로운 바위들로서 밀양의 3대 불가사의에 포함된다.
ⓒ 박태상

관련사진보기


'만어사 어산불 영경석'이란 도처에 널려있는 물고기 형상의 너덜겅과 미륵전에 있는 미륵불 바위를 일컫는 말이다. 원래 근처에 살고 있던 나찰녀와 옥지에 살고 있는 독룡이 서로 왕래하며 백성들에게 피해를 일으키자 가락국 수로왕이 부처에게 설법을 청하여 해법을 구하게 되었는데, 결국 동해의 용들과 물고기들을 이곳으로 옮겨와서 불법에 감응케 하여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러한 바위들로 주변이 가득 차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크고 작은 반석들 중 2/3가량이 금과 옥 소리를 내며, 불심이 돈독해질 경우, 멀리서 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사라지는 부처님의 형상을 볼 수 있게 된다는 신비로움이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고 있다. 가을 단풍물결이 바람에 흩날릴 무렵 다시 찾기로 마음먹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서 하산했다.

덧붙이는 글 | 죽기전에 꼭 가봐야 할 가을단풍철의 3대 명소 중 한 곳인 경남 밀양편을 싣는다. 하루하루 너무나 바쁘게 보내지만 훌쩍 룩색을 매고 단풍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어느날 떠나고 싶다. 목적없이 시간의 제약도 없이~~



태그:#밀양의 아름다운 풍광, #단풍철의 3대 명소, #만어산 어산불영경석, #밀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