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영화 포스터

▲ <마녀> 영화 포스터 ⓒ 흰수염고래영화사,무비꼴라쥬


대한민국은 6·25 전쟁의 참상으로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산업화에 성공하며 세계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적을 이룩했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우리의 경제 발전을 '라인강의 기적'에 비유하여 '한강의 기적'으로 일컬을 만큼 한강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이다.

영화 <마녀>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유영선 감독은 <괴물2>의 각본을 쓴 이력의 소유자다. 한강이 낳은 '괴물'을 다루었던 봉준호의 <괴물>과 그 영화의 속편을 생각한다면, <마녀>가 첫 장면에서 한강을 보여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마녀>는 한강과 주변 도로 위의 많은 자동차와 즐비한 고층 아파트를 보여줌으로써 경제 발전의 이면,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와 잉태한 괴물에 관해 이야기할 것임을 밝힌다.

주위의 무관심으로 스스로 '마녀'가 된 여자

<마녀> 영화의 한 장면

▲ <마녀> 영화의 한 장면 ⓒ 흰수염고래영화사,무비꼴라쥬


신입 사원 세영(박주희 분)은 팀장 이선(나수윤 분)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가 형편없이 작성했다는 질책을 듣는다. 노력하겠다는 세영의 대꾸에 목숨이라도 걸 자신이 있느냐며 이선은 비꼰다. 격앙된 두 사람의 대화는 정해진 시간 내에 보고서를 완벽하게 작성하면 이선의 손가락 하나를, 실패하면 세영의 손가락 하나를 자르는 어처구니없는 내기로 발전한다.

<마녀>는 세영을 조사하는 이선을 통해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로 성장했던 한 여자의 슬픈 사연을 이야기한다. 세영의 정체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왕따, 복수, 집착은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 미이케 다카시의 <오디션>, 로만 폴란스키의 <악마의 씨>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만든다. 실제로 유영선 감독은 주연 배우 박주희에게 세영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참고하라고 <캐리><오디션><악마의 씨>를 추천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세영의 부모는 아픈 언니를 보살피느라 그녀에게 관심을 쏟지 못했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그녀는 다른 이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나, 주위는 그녀를 냉대한다. 세영이 주변으로부터 느끼는 고립과 다른 이들에게 사랑 받길 원하는 바람은 <캐리>의 친구에게 따돌림 당하는 캐리(씨씨 스페이식 분)의 마음과 다를 바 없다.

<오디션>에서 어린 시절부터 학대를 당한 야마사키 아사미(시이나 에이히 분)는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 없다. 왜냐하면, 내 인생이 불행 그 자체였다"고 말하며 남자들을 향해 복수를 감행하는 악녀다. 세영도 "사랑받는 것들은 다 죽어버려"라는 흡사한 말을 내뱉는다. 그녀는 무관심이 준 상처를 아사미와 마찬가지로 고통으로 되갚아 준다. 캐릭터의 설정 외에도 복수의 방법론에서도 <마녀>는 <오디션>을 닮았다.

현대판 악마를 다룬 <악마의 씨>에서 로즈 메리(미아 패로우 분)는 임신한 아이를 빼앗으려는 자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며 피하고자 노력한다. 그녀는 아기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하겠다고 결심한다. 도시와 마녀를 연결한 <마녀>에서 세영은 간신히 얻은 주위의 관심을 잃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마녀> 영화의 한 장면

▲ <마녀> 영화의 한 장면 ⓒ 흰수염고래영화사,무비꼴라쥬


여귀로 읽는 한국 공포영화사에 대한 책 <월하의 여곡성>에서 저자 백문임은 "근대가 상실한 통일성과 조화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구현하던 여주인공은 이제 근대적 물신성 및 유동적인 정체성을 구현하는 크고 위력적인 괴물이 된다"고 적은 바 있다. 저자가 지적한 신파의 가련한 여주인공이 귀신으로 변한 1960년대 한국 영화의 흐름은 1990년대 <여고괴담>으로 확장해도 유의미하다. 이후 경쟁과 승리를 강조하는 우리의 얼굴은 <링>의 생존, <요가학원>의 성형으로 그려졌다.

<마녀>는 학원과 가정을 벗어나 직장으로 들어가 현대화가 낳은 병폐를 건드린다. 영화는 스스로 마녀가 된 자와 오해로 인하여 마녀 사냥을 당하는 자의 두 가지 모습을 세영과 이선에게 번갈아 투영하며 가해자와 피해자를 은유한다. <회사원>이 정글의 야수처럼 약육강식의 구조에서 피터지게 싸우는 직장인의 삶을 총을 쥐어주며 표현했다면, <마녀>는 마녀에게 공포라는 외피를 둘러 우리 사회에 드리워진 삐뚤어진 가치를 비판하려 시도한다.

<마녀>는 근사한 목표를 향해 활시위를 날렸으나 점수는 부실하다. 직장에서 이뤄지던 두 사람의 싸움은 부당함에 맞선다거나, 많은 이들이 꿈꾸는 상사에 대한 복수 등 대리만족 측면에서 일정한 쾌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직장 바깥으로 나오면서 이야기는 길을 잃는다. 여러 사람의 입을 빌려 세영에 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쌓기만 할 뿐, 그럴싸하게 연결을 하는 데에 실패한다. 이야기를 모으는 과정에서 이선은 세영에게 집착하는 스토커 신세로 전락한다.

특히 이선의 이야기가 언니 세민(이미소 분)과 만나는 부분은 영화적 비약이 심하다. 세영은 지금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기에 감정 이입이 어렵다. 여기에 <캐리><오디션><악마의 씨>의 흔적까지 흩날리는 통에 산만함과 안일함은 더한다.

<마녀>에서 칭찬하고 싶은 점은 이선이 세영에게 "얼마만큼 노력할 건데? 목숨이라도 걸 수 있어?"라고 질타에 이어 "오늘 밤 8시까지 마감 못 하면 손가락 하나 자를 수 있어?"라고 제안하는 장면이 준 서늘함이다. 세영은 일 처리를 깔끔하게 했으나 상사인 이선의 손가락을 자를 수 없었다. 그저 농담이라고 끝날 뿐이다. 반대로 세영이 약속을 어겼을 경우엔 어땠을까 무척 궁금하다.

마녀 유영선 박주희 나수윤 이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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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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