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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다방은 잊지 못할 장소다. 대전 은행동의 한 다방, 교회의 청년 모임을 마치고 한 여성이 커피를 산다고 이끌어서 갔던 곳, 그곳에 지금의 내 아내가 먼저 와 앉아 있었다. 빨간 정장에 붉은색 립스틱, 아직도 잊히지 않는 단아한 모습이었다. 지금도 그 단아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지만 세월이 가만 놔두질 않아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있지만.

평소 차 사겠다고 한 적 없는 그 여성이 나를 이끈 건, 내 아내와 약속된 일이었음을 다방에 들어가 자리에 앉고서야 알아차렸다. 커피가 목적이 아니라 실은 자신의 친구를 내게 소개해주려는 게 목적이었다. 우리처럼 만남이 다방에서 시작되어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까. 7080세대의 미팅이 대부분 다방에서 이뤄졌다.

다방의 역사를 한 눈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 '한국 커피와 다방의 사회문화사'라는 부제를 단 이정학 교수의 <가비에서 카페라떼까지>(대왕사 펴냄)가 그것이다. 유길준이 커피의 최초 시음자라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고종과 커피, 손탁호텔, 양탕국과 끽다점, 이상의 제비다방, 6·25전쟁과 5·16군사 쿠데타 시절을 지나, 전태일과 은하수다방, 그리고 커피전문점, 카페라떼 지수에 이르기까지 다방의 변천사를 알려주고 있다.

다방, 애국지사들의 탄생 장소

책 <가비에서 카페라떼까지>의 표지
 책 <가비에서 카페라떼까지>의 표지
ⓒ 대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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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 개화기 일본을 통해 들어온 커피는 중국식 표기인 '加菲'로 표기하고 '가비' 혹은 '가배'라고 불렀다.

1884년 <한성순보> 3월호에 "이태리 정부에서 시험 삼아 차와 가비(加菲)를..."이라는 기록이 최초 기록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양탕국'이란 말로도 쓰였다. 다방은 일본식으로 '끽다점'이라 했다가 '부인다옥'이 생기면서 최초로 다방과 유사한 명칭이 등장한다.

'커피'라는 단어는 1913년 <국민보>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일제시대 다방(끽다점)은 일본 요인 암살을 위한 교두보로 사용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는데, 당시 재판 기록을 보면 안 의사가 끽다점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문: 이토 공작이 승차한 열차는 몇 시에 도착하였는가.
답: 나는 칠시 경부터 기다리며 끽다점에서 차를 마시고 있은즉 구시 경에 공작의 열차가 도착했다.
문: 이토 공작이 승차한 열차가 도착했을 때 그대는 어떠한 행동을 하였는지 그 양상을 진술하라.
답: 끽다점에서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열차가 도착하였다. 그와 동시에 주악이 있었고... (중략)... 이토가 아닐까 생각하여 그쪽을 향하여 두 발을 발사했을 때 나는 러시아 헌병에 의해 잡히었다.(56쪽)

안중근 의사는 두 시간 가량을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다 도착하자 '거사'를 했다. 이토록 다방은 애국지사의 거사 계획 장소로 사용되었다. 1911년 강우규 의사 역시 다방에서 기다리다가 서울역(당시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한 열차에서 내리는 사이코 마코토 총독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다방, 민주지사들의 모임 장소

5·16군사정권은 들어서자마자 이상한 지침을 하달하는데 장·차관들이 도시락을 지참할 것과 커피를 마시지 말 것을 지시한다. 이유는 커피가 외화낭비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이때 다방들은 "커피는 안 팔겠다"는 광고를 신문에 내기도 했다. 커피는 이런 수난사도 있었지만 규제가 풀리자마자 1960년대에 다방이 가장 많이 들어서는 아이러니한 일도 발생했다.

신군부에 대항한 '학림사건'도 '학림다방'에서 시작되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세력에 대항하여 1981년 전국민주학생연맹과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이 민주운동과 노동3권 보장, 최저임금제 도입 등의 기치로 일어난 사건을 '학림사건'이라고 한다.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사건으로 조작되었는데 후에 진상조사위원회에 의해 무혐의가 내려졌다.

학림다방은 옛 서울대학교 문리대 건너편 동숭동에 1956년 문을 연 다방이다. 4·19혁명과 5·16쿠데타의 격동기에 민주화운동의 메카 노릇을 톡톡히 감당했다. 이처럼 다방은 우리나라 애국지사들이나 민주지사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장소였다. 김지하 시인도 이곳에서 <사상계>에 '오적(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의 실상을 알리는 풍자시를 썼다가 국가보안법에 걸려 투옥되기도 했다.

1970년대 전태일과 은하수다방은 끊을 수 없는 관계다. 전태일의 노동운동의 산실은 평화시장, 통일상가, 동화시장의 영세한 피복제조업체들이 늘어선 골목에 있던 은하수다방이다. 그는 이곳에서 모임을 갖고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죽어갔다.

다방, 예술가들의 아지트... 하지만 인권의 사각지대

다방은 또 사랑방이나 문화센터의 역할을 감당했다. 많은 문인들과 음악가들이 다방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문학인으로는 전혜린, 이상, 강계순, 박인환, 조병화, 이효석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음악인으로는 '쎄시봉'의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의 굵직한 가수들의 연습장이었다. 이때의 다방은 또 음악감상실 역할을 했고 유명한 DJ들도 탄생했다.

다방은 '다방레지'라는 말을 창조한 공간이기도 하다. 원래 '레지스터(Register)'에서 온 말인데 그 효시가 박마리아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1939년 잡지 <삼천리>에 '이화여전 교수가 다방, 미국대학 출신의 부부, 근로의 하우스를 찾아'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인텔리 부부인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미국 출신으로 서울 종로 한복판에 다방을 열었는데, 다음은 해당 기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느 날 오후 다섯 시에 화제의 인테리부부가 경영한다는 종로다방을 찾아갔다. 다방은 바로 오림피아자리였다. 문 안에 들어서니 옛날과 다름없이 레지스터엔 부인인 박마리아 여사가 앉아 계시고, 부군 이기붕 씨는 홀을 청소하고 계셨다.'(102쪽)

후에 다방레지는 그리 좋은 뉘앙스로 사용되지 않았다. 남성들의 노리갯감 정도의 의미로 쓰였으니 말이다. 다방의 여종업원들의 근무형태는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아침 8시경 문을 열어 밤 9시경 문을 닫을 때까지 하루 13시간의 노동을 했다. "장시간의 노동, 햇빛도 없는 담배연기 자욱한 실내, 적은 월급" 등에 대한 다방 여종원의 애환은 당시 신문들도 지적할 정도였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스쿠터를 타고 커피를 배달하는 상황이 되었고, 급기야는 믹스커피에 밀려 다방이 진퇴양난일 때 커피를 파는 게 아니고 사람을 파는 데까지 이르렀다. 소위 '티켓다방'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켜 방송에서까지 다루기도 했다. 책은 이렇게 소회한다.

"티켓은 다방 여종업원들이 차 배달을 나가면서 손님과 시간단위로 말동무 등 데이트를 해주는 대가를 의미하였으나, 점점 성매매의 수단으로 전락하여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티켓다방의 부정적 이미지는 다방 전체의 몰락을 재촉했다."(207쪽)

책은 숨 쉴 사이도 없이 조선후기부터 스타벅스의 현재까지를 정리해 주고 있다. 다방의 변천사의 한 중간을 살고 있는 내게도 다방과 커피숍은 큰 의미가 있다. 가난하던 시절 아침 일찍 다방에 들어가면 '모닝커피'라고 해서 믹스커피를 탄 잔에 계란 노른자를 넣어주던 기억이 난다. 그 한 잔으로도 든든하던 적이 있었다. 커피전문점은 또 어떤 변천사를 만들어갈지 참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 <가비에서 카페라떼까지>(이정학 지음 / 대왕사 펴냄 / 274쪽 / 1만3000원)



가비에서 카페라떼까지

이정학 지음, 대왕사(2012)


태그:#가비에서 카페라떼까지, #이정학, #다방, #다방레지,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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