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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목소리들>
 <여성, 목소리들>
ⓒ 오월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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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있었다. 스물아홉 선영씨는 연애를 했다.

남자친구는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임신 당시에도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줬어요. '당연히 같이 키워야지'라고 제게 말했고요. (중략) 임신 중반쯤 낙태를 말하니, 그러지 말라며 다리에 매달려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했습니다. (본문 71쪽)

이 문장을 읽으면서 선영씨가 왜 미혼모가 되었는지 이해가 안 됐다. 남자는 여자가 '임신'이란 단어를 입에 꺼내면 연락을 끊거나 낙태를 권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영씨의 남자친구는 임신 소식을 듣고 연락을 끊지도 않았고 낙태를 하겠다는 선영씨에게 매달려서 눈물을 흘렸다.

그렇다면 그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 애정을 느끼고 있고 또 책임감도 느끼고 있는 듯싶다.

책임 있는 말은 했지만 행동하지 않은 남친

선영씨의 남자 친구는 책임감 있는 말은 했지만, 행동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선영씨에게 빌려 간 돈도 갚지 않았다. 결국, 아기가 10개월이 되었을 때 남자 친구에게 양육비 소송을 한다.

책을 읽으면서 결혼 전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했던 말. "엄만 없이 살았지만 여태 남들에게 크게 머리 숙인 적이 없어. 자식 일로 엄마가 남들에게 머리 숙이는 일은 만들지 마라." 엄마는 미혼의 딸이 임신이라도 하면 어쩌나 경계하고 단속했다. 솔직히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지겨웠다. 20년 전 일이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엄마보다 마흔이나 젊은 엄마인 나는 어떤가? 나 역시 자식이 미혼에 부모가 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세상은 여전히 미혼 부모에게 차가운 시선을 거두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 나온 책 <여성, 목소리들>은 사회 곳곳의 여성의 삶을 담아내어 우리 사회에 여성들이 살아가기 힘들게 하는 벽들이 얼마나 세심하게 곳곳에 존재하는지 보여준다. 글쓴이 안미선씨는 이전에 <내 날개옷은 어디 갔지?>라는 책을 통해서 여성의 삶을 촘촘히 그려내기도 했다. <내 날개옷은 어디 갔지?>에 실린 글은 여성의 삶을 날 것 그대로 가감 없이 보여준다. 또한, 책에 실린 글은 생활글이 가진 매력이 무엇인지 느끼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선영씨의 '리빙 라이브러리' 행사가 열리는 곳에 해외 입양인들이 와 있었다. 자신을 버린 나라로 돌아와 미혼모들이 아이를 포기하지 않도록 지켜내고 있었다. 입양인 참가자 제인 정 트렌카는 금줄 세리머니를 통해서 이런 말을 했다.

사랑하는 엄마, 제가 태어난 날엔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죠. 할머니가 제 탯줄을 자르지도 않았고, 할아버지가 제 이름을 지어주지도 않았어요. 어느 누구도 엄마를 위해 미역국을 끓여주지 않았고, 제가 태어났고 당신이 엄마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금줄도 걸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지금 엄마와 나를 위한 금줄을 걸려 합니다. (본문 84쪽)

축복받지 못한 탄생에는 생각하지 못한 슬픈 이야기가 숨겨있었다. 세상천지가 축복하지 않더라고 엄마들이 아기를 포기하지 않고 키우길 입양인들은 응원했다.

"당신보다 더 나은 사람은 없어요. 당신보다 저를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한순간도 나의 엄마가 되기를 그치지 않은 엄마를 정말 사랑해요." (본문 84쪽)

입양인들은 미혼모를 보면서 아마 과거 자신을 떠나보냈던 엄마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둘은 서로를 응원하고 힘을 주고 위로 했다. 한 생명의 엄마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어도 주변 환경이 엄마와 아이에게 우호적이라 하더라도 육아노동은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용감한 엄마들은 우호적이지 않은 환경에서도 엄마 되기를 선택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변한 게 없다. 우린 그 용기 있는 미혼모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부끄럽게도 말이다.

선영씨와 또 다른 삶이 있다. 전아영씨다.

이혼 법정에 갈 때 몹시 떨렸고 변호사 앞에서 창피했다. 하지만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면 겪고 났을 때 분명히 넓어지고 달라진다고 믿으며 그 시간을 견뎠다. (본문 244)

전아영씨는 그렇게 씩씩하게 고난을 견디었다. 보람있고 재미있는 일을 찾다가 학습지 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방송통신대 영문과에 들어갔다. 2년 동안 바느질 일을 하며 강의를 들었다. 그런데 막상 학습지 교사가 되고 보니 초보 티가 난다고 엄마들이 싫어했다. 그래서 스스로 다독였다. '2막이 시작된다, 참고 견뎌야지.' 그렇게 인생의 고비를 그녀는 버텨냈다.

한부모 가정으로 힘겹게 아이를 키우고 있으면서도 아프리카 어린이들 후원을 했다. 액자 속에는 후원해온 아이 사진이 있었다. 돈이 없을 때도 후원을 멈추지 않았다. 전아영씨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계속 노력을 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녀를 이끈 가장 큰 힘이다.

모두 하나같이 힘겨운 삶

<여성, 목소리들>에선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똑같은 삶은 하나도 없지만, 모두 하나같이 힘겨운 삶이었다. 여성들의 어깨엔 짐이 있었고 삶은 꼼꼼하고 평등하게 힘겨웠다. '정상가족'이라는 한 가지 형태만을 인정하는 우리 사회는 모든 여성들을 힘겹게 한다. 정상가족 안에 있는 여성 역시 마찬가지로 힘겹다.

정상가족 밖의 여성에게 보내는 차가운 눈길을 알기 때문에 안에 있는 여성은 어지간한 불만은 있어도 참고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정상가족 밖의 여성도 차별로 힘겹다. 다른 이들의 다양한 가족과 다양한 삶을 따뜻한 눈길로 우리가 바라보는 때는 언제쯤일까? 그때를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글쓴이가 삼년간 여성들을 만나며 진행한 인터뷰가 네 가지 소제목으로 나눠 책으로 나왔다. 섹슈얼리티, 가족, 노동, 삶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 글을 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우리 땅의 모든 여성의 삶이 이 속에 다 담긴 것은 아니다. 담기지 못한 목소리가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이런 꾸준한 노력이 우리 삶과 사회가 어느 지점에서 어디로 향해가는지 반성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할 것이다. 그래서 글쓴이 안미선씨가 고맙다.

덧붙이는 글 | 여성, 목소리들 (섹슈얼리티, 가족, 노동, 삶…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안미선 저 /오월의봄 / 2014.09.17



여성, 목소리들 - 섹슈얼리티, 가족, 노동, 삶…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안미선 지음, 오월의봄(2014)


태그:#안미선, #여성, 목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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