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김봉준

관련사진보기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 음모를 관철시킨 박정희 정권은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엄청난 부정선거를 저지르고도 야당을 가까스로 제치고 집권을 했다. 그런 만큼 공화당의 집권은 매우 불안정했다. 부도덕한 방법으로 장기 집권한 정권에 이미 등을 돌린 민중들은 생존권투쟁의 방식으로 거세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전태일 사건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이 증가했다. 통계에 의하면 전태일 분신 직후인 1971년에는 노동쟁의가 전년도에 비해 10배가 넘는 1656건을 기록하였다. 비록 조직적인 투쟁은 아니었지만 투쟁의 양상이 폭발적이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수많은 농민들은 농촌에서 더 이상 견디다 못해 도시로 몰려들었으나 마땅한 일자리는 고사하고 찬이슬 피할 집 한 채 없이 도시의 변두리 판자촌에 내동댕이쳐졌다. 땅 투기로 돈벌이에 눈이 먼 정부당국은 서울시 변두리에 거주하고 있는 빈민들의 집을 강제로 철거해 14만 5천여 명을 현재의 성남시에 해당하는 경기도 광주군으로 내몰았다.

새로운 정착지라는 말은 한낱 기만에 불과하고 생계를 이어나갈 방안이 없던 상황에서, 당국의 비호 아래 온갖 사기·협잡·폭력이 난무하여 땅값이 폭등하자 이들 주민은 생존의 벼랑에 몰리게 되었다. 정부당국의 야만적 처사에 대한 이들의 사무친 증오는 격렬한 투쟁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격렬한 투쟁, 사회 곳곳서 발생

1971년 8월 10일 오전 10시경 광주대단지 주민 5만여 명은 탄리 성남출장소 뒷산에 모여 양택식 서울시장을 면담하려고 빗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주민들은 7월 7일 '광주대단지 토지불하가격 시정대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7월 14일 서울시가 애초의 약속을 어기고 분양지 유상불하 통지서를 발부하자 주민들은 이 위원회를 중심으로 여러 차례 서울시에 진정을 하는 한편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서울시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에 주민들은 대책위원회를 '투쟁위원회'로 바꾼 다음 8월 10일을 '최후 결정의 날'로 정하였던 것이다.

사건 당일 이른 아침부터 '모이자, 뭉치자, 궐기하자, 시정대열에'라는 제목의 전단을 집집마다 뿌렸다. '배가 고파 못 살겠다' '토지불하 가격을 인하해 달라' '일자리를 달라'는 내용이 적힌 피켓, 플래카드를 준비했다. 주민들의 강경한 움직임에 당황한 서울시는 양 시장과의 면담을 10일 오전 11시에 주선해 주겠다고 제의했다.

오전 11시 40분까지 양 시장이 나타나지 않자 주민들의 감정은 폭발했다. 격분한 주민들은 성남출장소와 관용차, 경찰차 등을 불태워 버렸다. 오후 1시 45분경 서울시경과 경기도경 소속 기동경찰 7백여 명이 나타나 최루탄을 발사하는 등 진압에 나서자 주민들은 투석으로 이에 맞섰다.

일부는 광주경찰서 성남지서를 때려 부수고, 일부는 차량통행을 금지 시켰다. 이 사건은 오후 5시경 서울시장이 주민들의 요구조건을 무조건 수락하겠다고 했다는 소식이 있자 6시간 만에 끝났다. 이 사건으로 주민과 경찰 1백여 명이 부상했고, 주민 가운데 23명이 구속되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9월 15일 오전 11시,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또 하나의 노동자 투쟁이 폭발했다. '한진상사 파월기술자 미지불임금 청산투쟁위원회' 회원 3백여 명은 KAL빌딩 앞에 집결, 체불 노임 149억 원을 지불하라고 요구하면서 빌딩 안으로 진입하여 방화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경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오후 2시 40분경 다수가 경찰에 연행됨으로써 약 5시간 만에 해산 당했다.

청년학생들의 반독재투쟁도 가열차게 전개되었다.

1971년 봄부터 시작된 교련반대투쟁은 2학기에 접어들면서 한층 격렬해졌다. 교련철폐와 현역교관 철수를 부르짖는 시위가 전 대학가를 휩쓸다시피 하였다. 박 정권의 대응은 무지막지한 것이었다. 10월 5일 새벽,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군인 약 30여 명이 고려대학교에 난입하여 학생 5명을 불법 연행,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고, 10월 12일에는 국방부와 문교부의 두 장관 명의로 '교련거부 학생은 전원 징집하겠다'라는 내용의 담화문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당국의 이러한 태도는 학생들을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학생들은 교련철폐 시위에 더하여 '무장군인 난입사건' 규탄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10월 8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급기야 '중앙정보부 폐지, 군의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10월 11~14일에는 전국의 각 대학교 학생 5만여 명이 가두시위를 단행하면서 '고대 난입군인 처단'을 요구하였다.

박 정권은 10월 15일,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명령을 발표하였다. 서울시내 8개 대학에 위수군인이 진주하여 1889명의 학생들을 연행, 이 중 119명을 구속하였다. 문교부는 시위주동 학생들을 제적하도록 각 대학에 강요하여 23개 대학 117명이 제적되었고, 이들을 즉각 입영 조치하였다. 각 대학의 써클 74개를 해체하고, 서울대 법대의 '자유의 종' 등 14종의 간행물을 폐간 조치하였다.

독재에 대한 항거는 그 동안 권력의 횡포에 대해 침묵만을 지켜오던 다양한 세력들 사이에서도 들불처럼 번져갔다.

언론인들은 5월 15일 '언론자유수호 행동강령'을 발표하였다. 이 행동강령은 1. 책임성 있는 취재·보도 2. 관계기관의 불법 부당한 연행의 일체 거부 3. 기사삭제에 대한 타당성 확인 4. 정보기관원의 언론기관 상주·출입의 배제 등을 결의함으로써 그동안 언론이 권력에 의해 어떻게 탄압받아 왔는가를 아울러 폭로했다.

그해 7월, 검찰이 잇따른 무죄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판사 2명을 구속하여 뇌물수수 혐의로 영장을 신청하자 서울 형사·민사지방법원 판사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고 사법권 침해 사례 7개항을 공개하였다.

이러한 사법권 독립운동은 곧바로 전국으로 확산되어 전국 415명의 판사들 중 153명이 사표를 제출하고 사법부의 독립과 압력배제를 결의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대학교수들도 대학자주화 선언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민중으로부터 배척당한 박정희 정권

이처럼 박정희 정권은 민중으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하고 있었다. 각계각층 민중은 독재자에 대한 공세를 더욱더 강화시켜나갔다. 이제 독재 권력이 취할 수 있는 길은 보다 강력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뿐이었다.

박정권은 10월 15일의 위수령에 이어 12월 6일에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함으로써 나라를 극심한 공포상태로 몰아넣었다. 12월 27일에는 민중에 대한 억압을 법적으로 뒷받침할 속셈으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전격 통과시켰다.

이 법은 대통령에게 엄청난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법으로서 대통령은 1. 경제규제를 명령하고 2. 국가동원령을 선포하고 3. 옥외집회와 시위를 규제하고 4. 언론·출판에 대한 특별조치를 취하고 5. 노동자들의 단체 행동권, 단체교섭권을 규제하고 6. 군사상의 목적을 위해 세출액을 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중에서도 제9조 단체교섭권 등의 규제 조항에는 단체교섭권 또는 단체행동권의 행사는 미리 주무관청에 조정을 신청하고 그 조정결정에 따라야 하며 대통령은 국가기관 및 지방자치단체, 국영기업체, 공인사업, 국민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업에 종사하는 근로자에 대해서는 단체행동을 규제하기 위하여 특별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이 법은 독재 권력이 민중에 대한 억압과 수탈을 강화하고, 군사력 증대를 위해 필요한 어떤 조치라도 발동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놓은 악법 중이 악법이었다.

박 정권은 정권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이처럼 폭력적인 조치를 취하는 한 편 기만적인 통일놀음을 벌여 정권연장에 이용하였다.

국가보위에관한 특별조치법으로 노동3권을 박탈당한 가운데에서도 노동자들의 생존권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1972년 연합노조 서울시 지부에서는 서울시의 노조활동 방해 및 근로조건 저해에 맞서 총사직을 결의했다. 5월 10일에는 전국의 은행원들이 당국의 노사협의제 무시, 급여제도의 개악에 항의하여 넥타이를 하지 않고 근무하는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에 재무부 측은 보위법을 적용하겠다고 경고하였다.

보위법과 유신치하에서 가장 끈질기고 치열하게 투쟁해온 조직은 한국모방(이후 원풍모방)이다. 4월 10일 한국모방의 퇴직근로자 40여 명이 '퇴직금 받기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퇴직금을 지불하지 않는 회사 측을 고발하는 고발장을 노동청에 제출하면서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됐다.

8월 9일, 한국모방 노동자들은 노조지부장 입후보자 지동진씨에 대해 전출명령을 내린 것과 관련, 철회 등 4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농성을 했다. 1973년 6월, 회사가 도산위기에 처하자 노동자들이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회사 이사진으로부터 회사운영권을 인수,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노조에 의한 회사운영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한국모방이 원풍모방으로 이름을 바꾼 후 이같은 훌륭한 투쟁이 밑거름 됐다. 원풍모방 노동조합은 1970년대의 대표적인 민주노조로서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은 매일노동뉴스에 함께 연재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