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에 영화 내용의 일부가 담겨있습니다

액션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해리슨 포드, 브루스 윌리스, 아놀드 슈왈제네거, 실베스타 스텔론 등 액션스타로 군림했던 별들이 흐릿해지는 오늘날 할리우드에 액션스타라 부를 만한 배우는 얼마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도 마블과 DC 등 코믹스 원작의 히어로물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히어로 이외의 배역이 인기를 모으는 사례가 그리 흔치만은 않은 것이다.

툼스톤 메인 포스터

▲ 툼스톤 메인 포스터 ⓒ 인벤트 디

그러나 언제나 예외는 존재한다. 리암 니슨이 대표적인 경우다. 액션영화의 오랜 기근 속에서도 꿋꿋이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그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1993년작 <쉰들러 리스트>에서 오스카 쉰들러를 연기하며 배우 인생의 정점을 찍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008년 <테이큰>을 성공시킨 이후 <A-특공대>, <논스톱> 등을 통해 어느덧 할리우드 최고의 액션스타 가운데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툼스톤>은 2014년 나온 그의 두 번째 스릴러 액션 영화다.

액션 및 스릴러 장르의 영화에서 리암 니슨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대개 일관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족관계는 파탄 나 있고 직업을 잃었거나 잃기 직전이며 몹시 외롭고 지쳐있는 인물.

<테이큰>의 브라이언 밀스가 그랬고, <논스톱>의 빌 막스가 그러했으며, <툼스톤>의 맷 스커터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트레이드마크인 부러진 코와 짙은 주름, 숨길 수 없는 거친 세월의 흔적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리암 니슨을 그가 연기하는 인물로 믿게끔 한다.

건조하고 사실적인 분위기와 밀도 있는 추적 스릴러의 만남

'묘비 사이를 걷다(A Walk Among the Tombstones)'라는 원제에서 느껴지듯 <툼스톤>은 시종일관 건조하고 쓸쓸한 분위기 속에서 전개된다. 액션신이 많이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하드보일드'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건조하고 사실적인 액션이 밀도 있는 추적 스릴러 장르와 적절히 어우러져 그럴듯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1980년대 형사액션물이나 1990년대 서부극을 떠올리게 하는 오프닝 시퀀스도 단연 압권이다.

영화는 정통 액션장르라기보다는 추적물의 성격을 가진 스릴러에 가깝다. 사립탐정 맷 스커터가 연쇄납치 살인사건과 관련한 의뢰를 받아 범인들을 추적해나가는 과정이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다. 액션은 초반부 오프닝과 클라이맥스 부분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며 영화가 집중하고 있는 부분 역시 분위기와 캐릭터지, 액션이나 드라마가 아니다.

맷 스커터는 불의의 사고 이후 경찰에서 은퇴하고 뉴욕에서 무허가 사립탐정 노릇을 한다. 그는 마약밀매업자의 가족들만 골라 납치해서 잔혹한 방식으로 살해하는 강력사건을 의뢰받고 범인들을 추적해 나간다. 맷의 추적과 별개로 레이와 알버트의 2인조로 이뤄진 악당들은 그들의 엽기적인 범죄행각을 계속해 나가고, 마약밀매업자인 피해자들은 신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끝도 없는 고통에 직면한다.

밀레니엄 앞둔 쓸쓸한 뉴욕, 그 도시와 닮은 주인공

툼스톤 건조한 도시와 닮아 있는 쓸쓸한 사내 맷 스커터(리암 니슨).

▲ 툼스톤 건조한 도시와 닮아 있는 쓸쓸한 사내 맷 스커터(리암 니슨). ⓒ 인벤트 디


이야기의 배경은 밀레니엄에 대한 두려움으로 뒤덮인 1999년의 뉴욕이다. 영화는 이 거대하고 쓸쓸한 도시에서 맷이 범인들을 추적하는 과정을 묵묵히 뒤따르며 가치가 무너지고 혼돈에 빠진 인물들을 건조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감독은 뉴욕을 채도를 뺀 회색빛의 쓸쓸하고 건조한 모습으로 그려내고 그 인상을 맷 스커터라는 인물 위에 덧입힌다.

술에 취해 실수로 아이를 쏘아 죽인 형사, 슬픔과 회한으로 가득 찬 맷이 꼭 그 자신과 닮은 외로운 도시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가뜩이나 고독한 정취를 한층 깊게 한다. 맷 스커터의 캐릭터를 언제나처럼 훌륭히 소화한 리암 니슨은 영화를 적어도 한 단계 쯤 나은 경지로 이끌고 있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그야말로 이 영화의 적임자임에 공감하게 된다.

기존의 가치가 붕괴되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혼란스러워 하는 당대의 분위기를 영화는 캐릭터와 사건 속에 적절히 녹여냈다.

배경이 Y2K와 밀레니엄 따위가 화제를 모으고 있던 1999년이라는 점, 주인공인 맷이 인터넷도 사용할 줄 모르는 아날로그적 인물로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 피해자들이 무고한 자들이 아니라 마약밀매상이라는 점, 악당들이 죄의식이 없는 사이코패스적 살인마라는 점, 주인공들에게 범인을 경찰에 넘기고 사회정의를 구현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는 점, 악당을 추적하는 이들이 나오는 장면에서 거울을 자주 배치해 의식적으로 인물들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 등이 이런 특색을 강화한다.

툼스톤 ㅁ

▲ 툼스톤 ⓒ 김성호


탈색된 영화 속 선명한 두 명의 인물

분위기는 확실하지만 드라마가 강하지 않은 영화이기에 이로부터 주제나 의미 등을 끌어내는 작업이 필수적인지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작업이 나와 글을 읽는 이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를 고려한다면 한 번쯤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채도를 잔뜩 뺀 탓에 얼핏 색채가 없는 듯 여겨지지만 이 영화에서 입체적인 색감을 부여하는 인물은 크게 두 명이다. 아스트로가 연기한 흑인소년 T.J와 악당들에게 납치된 소녀가 그들이다. 어쩌면 영화는 이들을 통해 어떠한 확신도, 가치도, 정의도 없는 탈색된 도시에 희망을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닐까? 낯선 이에게 웃으며 인사하던 빨간 옷을 입은 소녀와 은인을 돕기 위해 위험도 불사했던 T.J를 통해서.

마지막 장면, 낫 모양의 상징을 가슴에 새긴 히어로의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한 채 새근새근 잠든 T.J와 그를 지켜보는 맷의 모습은 이 영화의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는 듯도 하다. 희망은 믿음을 간직한 새로운 세대로부터 찾을 수 있으며 기성세대의 역할은 그가 잘 자라도록 지켜주는 것임을 말이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 맷과 T.J에게 한 칸의 공간과 한 순간의 휴식을 허락함으로써 이 거대한 도시에 자그마한 희망을 보이려 한 것은 아닐까 싶다. 여전히 건조하고 비정한 시대일지라도 말이다.

감독인 스콧 프랭크는 유명 각본가 출신으로 이 영화가 2007년작 <룩아웃> 이후 두 번째 연출작이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리암 니슨의 캐릭터를 한껏 살려냄과 동시에 1999년의 뉴욕이라는 배경과 가치의 혼돈, 정의의 상실 등의 분위기를 엮어 그럴듯한 하드보일드 추적극을 완성시켰다. 로렌스 블록의 탐정소설 <무덤으로 향하다>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답게 이야기의 전개가 헐겁지 않고 하드보일드한 정취가 살아있어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꽤나 흥미로운 선택이 될 듯하다.

지난 18일 개봉한 <툼스톤>은 개봉 4일차인 9월 21일 기준 전국 12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 게재하였습니다
툼스톤 로렌스 블록 스콧 프랭크 리암 니슨 무덤으로 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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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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