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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영화제 피움(FIWOM)'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여성 대상 폭력의 현실과 심각성을 알리고 피해자의 생존과 치유를 지지하는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지난 2006년 한국여성의전화 주최로 시작됐습니다. '질주'를 주제로 하는 제8회 영화제에서는 어떤 영화, 어떤 이야기, 어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9월 25일부터 28일까지 아리랑시네미디어센터에서 13개국 29편의 영화로 만나게 될 제8회 여성인권영화제 '질주'의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 기자 말

의붓아버지의 폭행에서 기인한 살인, 잘못된 범인 지목, 그로인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가족들의 화해와 치유 과정을 그린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가 최근 인기리에 종영되었다.

물론, 유명 배우의 효과도 없지 않았지만 가정폭력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그 치유에 주목한 거의 최초의 드라마라는 점에서 관심 깊게 보았다. 가정의 불화를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로서 가정폭력을 차용한 기존의 접근 방식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방영 이후 이 분야에 관한 사회적 담론이 증가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 보았지만, 아직까지 그런 효과는 미미한 듯하다.

'가정폭력'에 대한 범정부적 차원의 관심이 높아진 건 사실이다. 이번 정부는 특히 '성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불량식품'을 국민행복을 위해 근절해야 할 '4대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국정운영 우선 과제로 선정했다.

이에 경찰도 다양한 제도와 시책을 마련해 운영하고 있다. 우선, 모든 경찰서에 '가정폭력 전담 경찰관'을 배치해 피해자 보호와 사후 모니터링을 통한 재범 방지 등을 담당하게 했다. 또 사건 발생 현장에서 법적 권리를 설명하는 등 오롯이 피해자 보호 업무만 전담하는' 피해자 보호팀'을 신설하였다.

임시보호가 필요한 여성을 여성경찰관이 24시간 상주하는 긴급보호센터로 안내하는 제도도 시행 중이다. 지난해 가정폭력 검거 건수가 전년대비 약 91.6%나 급증한 것(경찰청 통계)은 다른 변수를 고려하더라도, 이런 '경찰의 적극적인 대처 분위기'가 주된 사유임은 명백하다.

과거에 비해 가정폭력에 보다 민감하고, 적극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조직의 고민과 그것으로 시스템이 갖춰지는 과정을 바라보며, 한 명의 경찰관으로서, 또 여성주의자로서 반갑고 다행스럽다. 하지만 아직도 아직 피해자의 눈높이에 맞는 결과로까지는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던 와중에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Private Violence)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났다. 딸과 함께 전 남편에게 납치돼 사흘간 폭행과 학대를 당한 디아나와 여성활동가 킷이 등장한다.

영화는 디아나가 킷으로부터 법적·정서적 지원을 받으며 가해자 사법처리와 양육권 확보, 친정 부모로부터 독립 등 '생존자'로 거듭나는 일련의 과정을 81분 동안 추적한다. 이 여정에 가정폭력 피해자인 동시에 '생존자'인 킷 개인의 이야기와 다른 여성들의 경험들이 덧붙여지며 바로 지금, '가정폭력'이라는 이슈에 접근함에 있어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는지 생각하도록 도와준다.

"왜 도망치지 않았냐?" 묻지 마시라, 왜냐하면...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 <Private violence> 2014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 <Private violence> 2014
ⓒ Cynthia Hill (감독 신시아 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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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오늘을 사는 보통 사람들은 '가정폭력'은 범죄이며, 나쁜 것이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가해자는 '여자나 때리는 찌질한 놈' 혹은 '폭력 성향의 사이코패스'로, 피해자는 '멍들고 머리가 헝클어진 불쌍한 여자'라는 박제된 이미지에서만 머물 뿐이다.

2013년 여성가족부 가정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부부폭력 발생률은 45%가 넘는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가정폭력은 피하고 싶은 불편함에 불과하다. 실제 피해자들의 속사정, 맥락, 이야기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이런 우리 모습을, 킷이 남편에게 얼굴을 심하게 맞아 병원에 갔을 때, 상처를 보자마자 얼굴을 돌린 채 질문하는 의사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디아나 친정 부모의 신고에 "가해자가 폭력적이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남자 경찰의 대답도 마찬가지다. 대중들의 이런 인식은 일상은 물론 사법체계에까지 영향을 미쳐, 피해자들을 고립시키는 한편, 이들이 적절하게 이해받고 보호받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왜 맞으면서 여태 참고 있었대? 이혼하면 됐잖아?"

가정폭력 피해자들에게 "왜 맞으면서 여태 참고 있었대? 이혼하면 됐잖아?" 하는 질문 역시 이런 인식의 문제를 잘 보여준다. 언뜻 합리적 의심처럼 보이지만, '여성이 폭력에 동의(적어도 용인)한 것은 아니냐'는 뉘앙스를 풍기며, 은근슬쩍 가해자의 변명에 편들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렇기에 가해자들은 디아나의 남편처럼 "언제든 도망칠 기회가 있었다"는 주장을 당당하게 할 수 있다. 반대로 여성들은 항상 목숨을 걸고 도망치지 않았다고 비난을 받거나, 가해자에게 적절한 처벌이 뒤따른 후에도 "꼭 내 잘못 같다"며 자책하게 되는 것이다.

여성들이 남편, 동거인, 남자친구 등 가해자에게 폭력을 당하는 원인은 단순하지 않다. 폭행 속에서도 가해자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 역시 사랑, 돈, 아이, 사회적 고립, '한 번만 더 믿고 싶은 욕망'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며 복합적이다.

그들이 고통받아온 역사와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서 개별 사건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렇게 가정폭력 문제가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 것으로 남아있을 때, 근본적 해결이 얼마나 요원한지 이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도대체 해결책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단지, 킷 같은 사람이 돌연 나타나 슈퍼맨처럼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만 기다릴 수는 없는 일. 다큐멘터리의 감독은 킷의 발언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보여준다.

"폭력 피해여성은 자신의 관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여성들을 (그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전문가로 인정해야 한다."

'가정폭력의 모든 경우가 특이하며, 특별하다'는 것을 인정하자. 좁게는 형사사법체계가, 넓게는 우리 모두가 그리해야 한다. 각각의 경우에서 여성의 경험을 존중하고, 그녀들의 살아있는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 '가정폭력'에 덧씌워진 어떤 정형화된 틀에도 사로잡히지 말고, 피해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잘 들을 자세를 갖추자. 그때는 우리들도 누군가에게 킷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존자로 거듭날 '세상의 모든 그녀들'에게 필요한 것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 <Private violence> 2014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 <Private violence> 2014
ⓒ Cynthia Hill (감독 신시아 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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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폭력의 재발을 막고,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의 회복을 돕기 위해 경찰·시민단체·정부가 함께 힘을 모으는 사회적 안전망 구축이 필요하다. "가해자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되는) 과정"이라는 영화 속 말을 떠올려 본다. 고통을 딛고 한 가족이 바로 서려면 일회성 처벌에 그치는 것이 아닌,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사랑과 증오, 미안함과 두려움, 분노와 절망과 같은 감정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피해자와 가해자, 그 가족에 대한 심리 상담과 함께, 의료적 치료, 법률 지원 등 토탈 케어시스템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해부터 경찰에서는 상담소·병원·구청 등과 함께 '가정폭력 솔루션팀'을 운영하고 있다.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지만, 몇몇 의미 있는 소식들이 들려온다. 많은 이들과 손잡고 함께할 때, 가정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질 것이며, 이 같은 움직임들이 가정폭력 해결의 열쇠가 되리라 믿는다.

영화가 끝을 알리는 순간, 문득 도종환 시인의 '폐허 이후' 라는 시(詩)가 떠올랐다.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법, 그리고 사법당국은 가정폭력 피해자들에게 최후의 보루이자 든든한 울타리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찰을 비롯한 사법당국은 물론 시민사회 단체 그리고 우리 이웃들이 가정폭력을 방관하지 않고 함께 대응해 나가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킷과 디아나와 같이 '생존자'로 거듭나는 수많은 '그녀들' 소식이 사회 곳곳에 퍼져나가기를 희망한다.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 Private violence 제8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정보
신시아 힐 Cynthia Hill | USA | 2014 | 77' | Documentary
09. 26. Fri. 15:40 피움 톡!톡! Fiwom Talk!Talk! 아리랑시네미디어센터 2관

덧붙이는 글 | - 김샛별은 전 송파경찰서 여성청소년과 아동청소년계장, 현 서울지방경찰청 소속입니다



태그:#가정폭력, #여성인권영화제
댓글1

한국여성의전화는 폭력 없는 세상, 성평등한 사회를 위해 1983년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이주여성문제 등 여성에 대한 모든 폭력으로부터 여성인권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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