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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수 줄기로 덮힌 친자연 산책로
 야자수 줄기로 덮힌 친자연 산책로
ⓒ 추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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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산자락길 5구간은 걷기 시작하는 찰나, 어쩐지 낯선 촉감이 발 아래에 가득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방금 걸어온, 마사토가 곱게 깔린 4구간(호국선열의 길)과는 사뭇 탄력이 다르다. 어째서 이럴까 싶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무슨 멍석 같은 것이 오솔길에 깔렸다. 야자나무 줄기로 만든 것이다. "이만하면 최고의 친자연 산길 보호 덮개"라는 중얼거림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우리나라 웬만한 사찰의 진입로가 시멘트 포장 도로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 길은 그야말로 '모범' 산길이 아닌가 여겨지기 때문이다.

야자 줄기로 덮힌 길은 흙이 빗물이나 사람들의 발길에 쓸려 없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그냥 두면 점점 나무의 뿌리들은 밖으로 노출되어 메마르고, 사람들의 발길에 채여 죽어가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야자나무 줄기로 만든 친자연 덮개를 멍석처럼 덮어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야자나무 덮개는 나무뿌리를 보호하는 데 그야말로 '만병 통치약'인 것이다. 

평양에서 온 앞산의 음악가
 평양에서 온 앞산의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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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에서 맛보는 두 가지 즐거움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8월과 9월이면 이 길의 중간쯤에는 상사화가 많이 피어난다. 꽃이 피어날 때엔 잎이 없고, 잎이 푸른 빛을 뽐낼 때엔 꽃이 없어서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꽃, 그래서 상사화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이 길에는 상사화보다도 더 색다른 볼거리가 있다. 평양이 고향이라는 전승용씨(68)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광경이다. 전쟁 때 남쪽으로 내려와 즐곧 서울에 살았는데 두 아들이 대구에 거주하여 생업 은퇴 후 대구로 왔다고 한다. 얼마전 가스 폭발사고로 세상을 요란하게 달구었던 대명6동에 거주하는 그는 "막걸리 한 병 들고 심심하면 이곳에 올라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릅니다"하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우리들을 위해 한 곡 연주해 주십시오"하고 청하자 "아는 건 옛날 노래밖에 없습니다"하더니 "두마안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배앳사고공-"하고 노래를 시작한다. 마침 지나가던 아주머니 등산객들도 주위에 둘러앉아 작은 음악회를 감상한다. 둘레에 가득 피어난 상사화와 전승용씨의 음악이 절묘한 화음을 이루어 숲길을 감미롭게 꾸며준다.

안일사 전경
 안일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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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구간과 6구간의 경계는 안지랑골이다. 이 골짜기 최대의 답사지는 안일암과 왕굴이다. 이 두 곳은 927년 동수대전 때 견훤에게 대패한 왕건이 도망쳐와 숨어지냈던 곳이다. 뿐만 아니라 안일암은 1910년대 국내 무장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조선국권회복단이 결성된 곳이기도 하다.

안일암과 왕굴은 앞산자락에 포함되지 않는다. 앞산 정상부에 있는 왕굴은 물론이고 안일암만 해도 앞산자락길에서 20여 분을 더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길을 안일암쪽으로 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자락길의 정체성이 등산 아닌 산책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런 생각은 역사여행을 중시한 데서 빚어진 욕심이리라.

왕굴
 왕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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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구간은 안지랑골에서 매자골까지 이어진다. 5구간과 6구간은 둘 다 걷는 데 30분정도 걸린다. 두 골짜기 사이에 있는 작은 골의 이름은 무당골이다. 한때 무당들이 많이 활동하였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무당골 이름 유래와는 견줄 수 없는 비극이 이 골짜기 아래에 서려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비극의 현장은 바로 '앞산빨래터'다. 물론 무당골에 무당이 없듯이 앞산빨래터에도 요즘은 빨래하는 여인이 없다. 다 지나간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도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가 있으니 6.25전쟁 관련 양민 학살의 비극이다.

앞산순환도로보다 낮은 곳에 있는 까닭에 자락길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빨래터는 6.25 때 가창골과 더불어 양민 학살이 자행되었던 곳이다. 지금은 공원처럼 꾸며져 있지만 땅속 저 깊은 곳에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는 참극의 장소다. 그러나 이곳이 양민 학살의 현장이었다는 표식은 그 어디에도 없다.

황룡사 솔숲
 황룡사 솔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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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구간은 길의 끝이 아름답다. 100여 그루의 노송들이 찾아온 나그네를 반겨준다. 한참을 걸어  피곤을 느끼고 있던 나그네는 문득 몸만아 아니라 마음까지도 솔잎처럼 푸르게 살아나는 기운을 얻는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 황룡사 입구 솔숲은 종종 음악회가 열리는 곳이다. 시 낭송회가 열리기도 하고, 행사가 없는 겨울철에도 눈이 내린 오후면 바람에 휘날린 눈꽃들이 음표를 그리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멋진 풍경을 보여주기도 하는 곳이다.

솔숲에 앉아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잠시 쉰다. 앞산자락길의 출발점인 메타세콰이어길에서 지금까지 세 시간을 줄곧 걸었으니 잠깐 쉬어간들 어떠리. 이제 앞산자락길 중 남구 구역은 끝나고 달서구 구역이 시작된다. 달서구 구역도 5구간과 6구간을 합한 것과 거리가 비슷하여 대략 한 시간가량 걸을 길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왕건이 쉬다 갔다는 임휴사 방향 창공에 하얀 구름이 유유히 흘러간다.

덧붙이는 글 | 지금까지 앞산자락길 답사 기사를 3회에 나누어 연재했습니다. 마지막 4회 기사도 곧 게재하겠습니다.



태그:#앞산자락길, #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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