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KOBACO), 약칭 '코바코'로 불리는 이 공사는 1981년 1월 20일 설립되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방송의 공공성 확보와 전파 수익의 사회 환원'이라는 명분으로 코바코를 만들었지만, 한편에서는 '광고 수익을 정부가 장악하여 언론을 통제하려는 의도'라는 평가도 줄기차게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코바코에 대한 관심이 최근 높아지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난 19일 기획재정부 공공기관 운영위원회가 공석인 코바코 사장 후보를 3명 선발해 방송통신위원회에 통보하면서였다. 문제는 한나라당 전 국회의원이면서 친박 인사로 알려진 곽성문 전 의원이 코바코 신임 사장으로 유력하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지난 19일 이 사실이 언론 보도로 알려지자 트위터 등에서는 연간 예산이 1조 원이 훌쩍 넘는 공사의 사장으로 곽 전 의원이 과연 적임자인지에 대한 반대 여론이 잇따랐다. 특히 곽 전 의원을 반대하는 이들이 주로 언급하는 사건은 지난 2005년 있었던 이른바 '맥주병 투척 난동 사건'이다.

몰락 : 2005년 맥주병 투척 난동 사건

지난 2007년 11월 29일 오후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당시 이회창 무소속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있는 곽성문 당시 의원의 모습. 2005년 맥주병 투척 난동 사건으로 몰락했던 그가 '친박근혜'와 '친김무성'을 기반으로 최근 부활하고 있다.
 지난 2007년 11월 29일 오후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당시 이회창 무소속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있는 곽성문 당시 의원의 모습. 2005년 맥주병 투척 난동 사건으로 몰락했던 그가 '친박근혜'와 '친김무성'을 기반으로 최근 부활하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곽 전 의원은 지난 2004년 17대 총선에서 당시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대구 중·남구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리고 사건이 벌어진 때는 이듬해인 2005년 6월이었다. 대구지역 주요 경제인들과 골프를 친 후 골프장 내 식당에서 술자리가 벌어졌다. 이른바 골프 접대에 이은 회식 접대였다.

처음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문제는 어느 정도 술잔이 돌고난 후부터였다. 취기가 오른 곽 전 의원이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뒤늦게 자리를 함께한 당시 조해녕 대구시장 역시 당황했다.

그때였다. 곽 전 의원이 함께한 경제계 인사들을 향해 '왜 여당(당시 열린우리당)에게만 후원하고 우리에게는 정치자금을 제대로 주지 않느냐'고 하면서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더니 그는 상 위에 있던 맥주병을 들어 식당 벽을 향해 내던졌고 산산조각이 난 맥주병의 파편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사건은 이후 정치 쟁점으로 부각됐다. 2005년 당시 서영교 열린우리당 부대변인(현 새정치연합 의원)은 논평을 통해 "골프 접대에 술 접대를 받고 벽에 맥주병을 날려 깨뜨리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던 사람은 '조폭 곽성문 의원'이었고 그 자리에서 난투극이 벌어졌다고 한다"며 추가 폭로했다.

그러면서 "누군가는 맥주병 파편에 상처를 입었고 이에 또 누군가는 의자를 집어들기도 하여 싸움이 벌어졌다는 제보가 잇따르고 있다"며 "그 자리에는 대구 출신 국회의원 8명이 함께했고 한나라당 조해녕 대구시장도 참석하는 등 '난다 긴다' 하는 한나라당 대구지역 힘 있는 사람은 다 모였던 자리였다. 감히 이런 자리이니 한나라당 의원들의 눈에 뵈는 것이 있었을까"라고 강력 비판하기도 했다.

부활 : '친박근혜'와 '친김무성'

결국 이러한 추태 끝에 곽 전 의원은 초선의원이면서 승승장구하던 화려한 영광을 내려놓게 된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한나라당 홍보위원장과 대구시당 수석부위원장 직에서 모두 물러나야 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어진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공천도 받지 못했다. 그러자 한나라당을 탈당한 그는 다시 자유선진당에 입당하여 대구 중·남구 후보로 출마했고 12.3%를 얻어 낙선했다. 그렇게 그의 정치 인생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 곽 전 의원이 극적으로 부활한 때는 지난 2012년의 일이었다. 지지했던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 후보가 당선되면서 그가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어 지난 7월에는 김무성 의원이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당선될 수 있도록 물밑 지원을 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이상이 곽 전 의원이 맥주병 투척사건 이후 몰락했다가 코바코 사장 후보로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 과정이다.

그런데 이런 곽 전 의원이 코바코 사장으로 임명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반대하는 또 한 명의 인사가 있다. 바로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당시 사형 선고를 받았던 이철 전 국회의원이다.

이 전 의원은 언론을 통해 곽 전 의원이 코바코 신임 사장에 내정됐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인터넷 채팅방에 이를 비판하는 장문의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곽 전 의원이 "중앙정보부(중정)에 밀고하고 협력했던 구체적 사실을 증언할 수 있다"며 밝혔다.

이에 기자는 이철 전 의원과 20일과 21일 양일간 서면 인터뷰를 통해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전후한 곽성문 전 의원의 행적에 대한 소상한 증언을 입수했다.

다음은 이철 전 의원과 가진 서면 인터뷰 전문이다.

"그때 구세주같이 곽성문이 나를 찾아왔다... '형님, 절 학생회장 시켜주세요'"

이철 전 의원.(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이철 전 의원.(오마이뉴스 자료사진)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 곽성문 전 의원과 처음 알게 된 경위는 무엇인가요?
"1969년 당시 저는 서울대 운동권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두 번이나 대통령을 하고도 또 다시 세 번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려고 하는 이른바 '3선 개헌'을 기도했고, 이를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섰다가 강제로 군에 징집되어 끌려갔습니다. 그러다가 3년 후인 1972년 제대하여 서울대에 복학했고, 이때 운동권 선배그룹에 속한 제가 현장의 후배 재학생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를 일으킨 후 이를 깨트리기 위한 반유신 운동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때 이러한 준비를 하기 위해 우리가 합법적 공간으로 학생회를 활용하려고 했고, 이를 위해 좋은 후보를 물색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어렵사리 도종수라는 좋은 후보를 물색하여 설득 끝에 학생회장을 만들었는데, 1973년 10월 2일에 있었던 데모를 주도하다가 다른 주동 학생들과 함께 구속되고 말았습니다.

'학생회장이 되는 것은 곧 구속되는 길'이라고 여긴 그때 분위기에서 다음 학생회장 감을 찾는 것이 어려웠을 때입니다. 고민하고 있던 그때 저를 스스로 찾아온 구세주 같은 학생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곽성문이었습니다. 당시 서울대 국사학과 학생이라며 찾아온 곽성문은 투박한 경상도 억양으로 '형님, 저를 학생회장 시켜주십시오. 유신 정권을 타도하는 데 앞장서서 형무소로 들어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느낌에는 체구는 크지 않지만 당당했고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는 그를 보고, 지금 와서는 참 부끄러운 소리지만 그야말로 한눈에 반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하자! 너와 어려운 이 길을 함께 가자!'며 화답했습니다. 그의 세치 혀끝에 제가 단번에 눈이 멀었버린 것입니다."

- 갑자기 나타난 그를 다른 사람들도 쉽게 믿던가요?
"당연히 그가 누구냐고 많이 물었습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냐 하는 질문이 많았습니다. '믿을 만한 반유신 투사냐', '언제부터 알게 되었나?', '믿을 수 있나? 어떻게 검증했나?' 등 이런저런 의문과 동의하기 어렵다는 발언들이 이어졌지만, 제가 밀어붙였습니다. 누구도 가로막기 어려울 정도로 확신을 주는 말로 그를 추천하니 결국 다른 이들도 제 판단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 곽 전 의원이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에 당선된 후 실제 역할은 어떠했나요?
"1974년 신학기 초부터 반유신 시위 준비와 정권의 예비검속 등 대응으로 상당히 어수선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해 학생회장이 된 곽성문이 학생회장 직무를 수행한 기간은 극히 짧았습니다. 기가 막힌 것은 그 짧은 기간에도 곽성문이 중앙정보부 간부를 만났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주위에서는 곽성문에 대한 여러 제보가 있었는데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으니 잘 주시해야 한다'는 식의 제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저는 거의 예외 없이 그를 옹호했습니다. '주목은 하되 의심은 하지 말자, 소중한 동지를 잃을 수도 있다'고 감싸주는 말을 하곤 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런 저의 행동이 또 다른 실수였고 결국 더 큰 화근을 만든 꼴이지요."

- 그렇다면 곽 전 의원의 민청학련 사건 당시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많은 분들이 민청학련이 실재했던 조직이라고 알고 계시는데 정확히 말씀드리면 그런 조직이나 단체가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정확히 표현하면 전국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연락해서 일제히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동시다발로 시위를 하고 이를 통해 박정희 유신 폭압정권을 퇴진시키자는 시위 계획을 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저를 비롯하여 몇몇 주동자들이 서울 삼양동에 위치한 자취방에서 전국에 살포할 유인물을 만들던 중, 작성자 명의가 없는 유인물을 만들 수는 없으니 뭐라고 할까 고민하다가, 누군가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으로 하자고 순간 제안하여 이를 유인물에 넣은 것입니다. 따라서 몇몇 주동자들을 제외한다면 사실 민청학련이란 명칭도 들은 바가 없었고, 따라서 민청학련에서 곽성문의 역할은 따로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당시 곽성문이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이었고 이 사건으로 학생회 간부 다수가 구속되었는데, 그는 이 당시 구속조차 되지 않았고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반유신 운동을 열심히 하려고 그를 학생회장에 당선시켰는데, 저의 바보 같은 판단으로 안방에 뱀을 끌어들인 꼴이 된 것입니다."

- 알려진 바에 의하면 곽 전 의원은 민청학련 사건 당시 학생들에게 만나자고 유인해서 차례로 중앙정보부에 넘겼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그의 행적은 무엇인가요?
"피해자들과 목격자들의 증언이 다수 있습니다. 당시 곽성문이 만나자고 한 이들이 전부 중정에 의해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현 새정치연합 국회의원인 강창일 의원과 성공회대 이종구 교수, 그리고 문국주씨 등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분들의 증언을 들어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곽성문이 만나자 해서 나간 사람들, 전부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1975년 4월 8일 오전 대법정에서 개정된 민청학련 인혁당 관련사건 피고들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상고심 선고공판 모습
 1975년 4월 8일 오전 대법정에서 개정된 민청학련 인혁당 관련사건 피고들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상고심 선고공판 모습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이는 사실로 확인됐다. 먼저 지난 2003년 민청학련 사건 핵심 관련자 중 한 명인 이종구 성공회대 교수가 쓴 <실록 민청학련>의 글이다. 이 교수는 문국주씨 등 당시 사건 관련자들을 검거하는 데 곽성문 전 의원이 역할을 했다고 기록한 바 있다.

이 교수는 "자신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있는데 어느 날 형사들이 밖으로 몰려나갔다. 서울 절두산 성당 근처에서 민청학련 수배자인 문국주(서울대 73학번)를 체포하려 나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배자인 강구철과 문국주가 만나기로 했다는 사실을 경찰에게 알려준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라고 썼다. 문국주씨도 "강 선배(강구철)와 마포 절두산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곽 전 의원이 어떻게 알았는지 이 자리에 나오겠다고 해서 현장에 나갔다가 경찰에 잡혔다"라고 증언했다.

이러한 이종구 교수와 문국주씨의 주장에 대해 곽 전 의원 역시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 2004년 <주간 동아>와 한 인터뷰에서였다. 당시 곽 전 의원은 "동대문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을 때 다른 조직과의 약속 내용을 전달받았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면서 "그곳에 가보니 문국주씨가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을 대동하고 갔던 것이다.

그런데 곽 전 의원은 이에 대해 황당한 변명을 했다. 그는 문국주씨에게 "(경찰이 매복해 있었다는 내용을) 말하지 못했다, 그 부분이 가장 미안한 부분이다"라고 해명했다. 경찰을 데리고온 행위보다 그저 말하지 못한 것이 가장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계속되는 이철 전 의원의 증언이다.

- 곽 전 의원이 중정 협조자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때는 언제였나요?
"곽성문이 학생회장으로 당선된 직후부터 소문이 있었지만 저는 믿지 않았고 오히려 '확인될 때까지는 믿자'며 주위를 설득했지요. 심지어 저는 민청학련 사건 후 재판 과정과 형무소 내 동지들을 만나 '곽성문이 만나자고 해서 나갔다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곽성문이 우리를 밀고한 것'이란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 했어요. '아닐 거다, 중정과 경찰이 곽성문을 전화 도청하고 미행한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끝까지 믿었습니다.

심지어는 제가 취조를 받을 때 '공산화 폭력혁명을 하려 했다고 시인해! 이미 곽성문이 다 불었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놈들이 이런 식으로 우리를 이간질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모든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한꺼번에 알게 된 때는 곽성문이 군법회의 법정에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하여 우리를 가리키면서 '공산주의자와 같은 말을 했다'라고 증언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것입니다. 정말 그 순간 제 자신이 얼마나 원망스럽던지! 저런 자를 그렇게까지 믿고 감싸주었냐며 한없이 자책하며 괴로워했습니다. 어쩌면 저는 그가 군사법정에 검찰 측 증인으로만 나가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그를 믿었을지 모릅니다. 정말 나 같은 바보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 민청학련 사건 당시 관련자인 성유보 선생이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 의하면 곽 전 의원이 군사법정 증인으로 나와 "이철이 내게 공산 폭력혁명을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하는데, 이런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당시 민청학련 사건은 관련자가 많아 재판이 여러 갈래로 나눠져서 이뤄졌습니다. 제 재판에서는 곽성문이 증인으로 출석했던 기억은 없는데요. 다만 중앙정보부 신문 과정에서 곽성문이 '이철이 공산화 폭력혁명을 내게 지시했다'고 말했다는 것은 들은 사실이 있습니다."

- 혹시 민청학련 사건 후 곽 전 의원에게 해명이나 변명을 직접 들은 사실이 있나요?
"아니요. 전혀 없습니다. 그는 이후 사건 피해자는 물론이고 우리와 잘 알 만한 사람들을 피했습니다. 그때 그 이야기가 나올까봐 두려워 하는지 주위를 빙빙 도는 듯했습니다. 곽성문이 MBC 워싱턴 특파원으로 있을 당시 함께 워싱턴에 있었던 이신범 전 의원도 그렇게 말을 하더군요."

"중앙정보부 추천으로 MBC 특채... 구체적 근거 있다"

- 곽 전 의원이 MBC 기자를 했나요?
"네. 민청학련 사건 당시 저는 곽성문의 이러한 거짓 증언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곽성문은 프락치 행위 덕분에 보상으로 MBC 기자에 특채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영달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부도덕한 행위가 용납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공직에 이처럼 더러운 과거를 가진 인물이 발탁되는 것은 절대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 곽 전 의원이 중앙정보부 추천으로 MBC 특채되었다는 구체적 근거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제가 국회의원으로 일할 때 처음 소속된 상임위가 문교공보위원회(현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였습니다. 그때는 KBS, MBC 등 공영방송 사장이 국회 상임위원회에 출석했고 예산 결산도 국회 심의를 받을 때였습니다. 그때 제가 MBC에 곽성문의 인사기록카드 사본을 요구했더니 공채가 아니고 특채로 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장에게 왜 이렇게 기록되어 있냐고 물으니 사장이 '중정 추천에 의한 특채였다'고 답한 바 있습니다."

사실 민청학련 사건은 당시 박정희 유신 독재권력이 처음 발표한 외형에 비해 그 결과는 초라할 지경이었다.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민중봉기 획책"이라는 어마 어마한 내란음모죄로 발표되었던 민청학련 사건으로, 죄없는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이 누명을 쓰고 죽었다. 하지만 정작 민청학련 관계자들은 1975년 2월 15일 대통령 특별조치에 의해 대부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사실상 조작된 사건이었음이 그때 인정된 것이다.

그리고 민청학련 사건 발생 후 36년 만인 지난 2010년 9월, 법원은 재심을 통해 당시 사형 선고를 받았던 이철 전 의원 등 사건 관련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처음 사형을 선고받은 후에는 '망측한 농담'이라며 호탕하게 웃었으나, 이후 독방에서 수갑이 채워진 채 24시간을 두 명의 간수에게 감시받으면서 "정말 이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를 느꼈다고 한다. 그 지독한 공포와 절망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이철 전 의원이었다.

반면 곽 전 의원의 길은 달랐다. 민청학련 사건 당시 중정에 협조했던 곽성문은 이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화려한 길을 걸어갔다. 이 전 의원의 증언처럼 그는 1976년 중정 추천 케이스로 MBC에 취직했고, 이어 팀장과 국장을 거쳐 2000년대에는 MBC의 주요 부서 사장을 겸임했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2004년 17대 총선에서 지팡이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대구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됐다.

"반성 않고 공직에 나서면 안돼... 지금이라도 양심고백 하라"

민청학련 피해자인 이철 전 의원은 "내가 곽성문 전 의원(사진)의 과거 행적에 대해 인터뷰한 이유는 개인적 원한 때문이 아니다, 허위 증언으로 나를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한 그에게 보복하고자 옛날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다"라며 "이것은 우리 사회 정의의 문제이며 역사가 바로 가고 있느냐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민청학련 피해자인 이철 전 의원은 "내가 곽성문 전 의원(사진)의 과거 행적에 대해 인터뷰한 이유는 개인적 원한 때문이 아니다, 허위 증언으로 나를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한 그에게 보복하고자 옛날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다"라며 "이것은 우리 사회 정의의 문제이며 역사가 바로 가고 있느냐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 곽 전 의원이 코바코 사장으로 사실상 내정되었다는 소식에 대해 심경은 어떤가요?
"개인적으로는 제가 곽성문의 과거 잘못된 행적에 대해 계속 추궁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순박하게 생각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가 개인적인 여생을 보내고 있다면 모를까 반성하지도 않은 채 또 다시 공직에 나서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과거 잘못한 행위에 대해 반성하고 자중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곽 전 의원에게 지금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양심적인 고백을 해야 합니다. 아들 딸들에게 부끄러운 아빠로 살지 말고 밝은 세상으로 나오십시오. 숨어 살아야 하는 죄인이 아니라 다시 떳떳하게 나타날 기회도 있습니다. 그때의 잘못된 행동들을 솔직히, 단 한 점도 숨기지 말고 그대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말을 할 수 없다면 글로 써서라도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공개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결심이 선다면 다시 한번 내가 도와드릴 용의도 있으니 결심이 선다면 연락을 주기 바랍니다."

이철 전 의원은 인터뷰에서 코바코 신임 사장으로 내정된 곽성문 전 의원의 임명안이 강행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전 의원은 "내가 곽 전 의원의 과거 행적에 대해 인터뷰한 이유는 개인적 원한 때문이 아니다, 허위 증언으로 나를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한 그에게 보복하고자 옛날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다"라며 "이것은 우리 사회 정의의 문제이며 역사가 바로 가고 있느냐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친일분자, 독재 부역자, 밀고자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억울한 희생자들을 만들어내고도 그 대가로 권력과 부를 움켜쥔 채 여전히 떵떵거리고 사는 우리나라의 잘못된 현상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라고 했다. 이 전 의원은 이를 통해 "후손들이 바른 길로 가야 성공한다는 교훈을 얻도록 보여주고 싶다"는 말도 곁들였다.

끝으로 이 인터뷰를 읽은 분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철 전 의원은 "어두운 우리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반민주행위자 인명사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뜻을 가진 분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방송통신위원회는 빠르면 22일(월) 코바코 신임 사장을 발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 유신 권력이 자신의 정권적 위기를 돌파하고자 조작했던 민청학련 사건. 그리고 사건 당시 프락치와 허위 증언으로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곽성문 전 의원을,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 정부하에서 코바코 신임 사장으로 끝내 임명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민청학련의 비극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태그:#곽성문, #중정 프락치, #코바코, #이철 전 의원
댓글34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