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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시작해 53년 7월 27일 종료된 한국 전쟁의 기원과 과정, 결말을 균형 있게 분석한 책이 나왔다.

한국전쟁/불가피한 선택이었나
 한국전쟁/불가피한 선택이었나
ⓒ 명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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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동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교수가 쓴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는 한국전쟁을 미국과 영국의 비밀문서, 중국과 러시아에서 제한적으로 공개하고 있는 외교 문서를 분석, 반영해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한국전쟁은 내전으로 시작해 며칠 지나지 않아 유엔과 미국이 참전하며 국제전이 됐다고 밝히고 있다.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한 일부 유럽 국가들과 양 진영에 포함되지 않았던 비동맹국가들은 무력보다 협상에 의한 해결책을 모색했고, 실제 양 진영을 접촉해 중재안을 제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특히 영국과 인도가 평화 중재를 제시했지만 양 교전세력이 완전 승리를 원하면서 평화 협상을 거부했다고 밝히고 있다.

한반도 전체를 비 공산화하려는 미국이 승리에 도취 됐을 때, 영국이 40도선 부근의 완충지대 안을 제시했지만 무시하고 총공세를 단행, 이 공격으로 중국의 대규모 참전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전쟁 동안 미국과 영국은 협조와 갈등의 관계였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양국은 기본적으로 공산세력의 팽창을 우려해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아시아에서 영국의 정책이 공산 세력으로부터 보호에 역점을 둔 반면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은 공산 세력의 팽창을 봉쇄 내지 회복하는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개전 초부터 한국전쟁을 주도해 승리를 목전에 둔 맥아더 사령관의 경험은 휴전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에, 결국 맥아더를 비판해 온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들은 맥아더 해임을 요구했고, 이는 승리를 위한 전투가 아니라 휴전을 전제로 한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호전적인 맥아더 사령관이 걸림돌이 됐기 때문에 해임이 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휴전 회담이 2년이나 지속된 가장 큰 이유는 포로 송환의 문제였다. 공산 측은 일반적 국제법 원칙에 따라 휴전이 되면 양측이 보유한 포로 전체를 송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유엔 측에서는 공산 포로 중 북이나 중국 등 공산주의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는 포로가 있기 때문에 자발적인 송환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휴전회담을 극렬하게 반대하였으며, 독자적인 무력통일정책까지 고려하였다. 유엔 측은 공산 측과 어려운 협상을 하는 이외에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는 이중 작업을 해야 했다...(중략) 지루한 휴전협상에 지친 미국은 조기 타결을 위해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중략) 결국 한국전쟁은 3년 동안 인명과 재정적 피해를 주었지만, 미국은 더욱 확고한 대동북아 정책을 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승만을 설득한 유엔은 1953년 7월 27일 지루한 논쟁을 끝내고 양측 2km 비무장지대, 중립국 감시위원단 구성, 자유 송환 원칙에 유리한 합의, 협정 조인 후 3개월 내 정치회의 개최 등을 담은 최종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휴전 회담의 가장 큰 의제인 16만 9000명의 공산 포로 포로송환은 약 8만 2000명을 송환했고, 8만 7000여 명은 송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엔군 포로는 거의 대부분인 1만 3000명 정도가 송환됐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한국 전쟁은 한국을 미국 전략 이익의 주요 관심 지역으로 편입되는 기회를 제공하게 했고,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로 미국이 한국에 대해 군사 개입을 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를 마련하게 됐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명인문화사, 2014년 8월)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김계동 지음, 명인문화사(2014)


태그:#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김계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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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미디어에 관심이 많다. 현재 한국인터넷기자협회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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