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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
가을이다. 흔히들 가을은 조락(凋落)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이는 풀이나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짐을 말한다. "세월은 쏜 화살과 같다"고 하더니, 어느 새 내 나이 일흔이 되었다. 예로부터 일흔은 '고희(古稀)'라 하여, 매우 드물다는 뜻이다. 나도 이제 초목으로 치면 가을을 맞았다. 그래서 이즈음은 언저리를 하나하나 정리해 간다. 얼마 전 명함 집과 편지함을 정리하면서 끝내 버리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것은 주로 교단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 준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연- '가연(佳緣)'은 사제(師弟)간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와 문화는 사제로 이어왔기 때문이다. 이전에 나는 제자들의 초청을 극도로 자제해 왔는데, 이나마 건강할 때 극히 자연스럽게 만나 차담을 나누는 것은 한 훈장으로서 큰 기쁨이요, 아름다운 마무리이리라.  - 기자의 말


경기도 광주 서울외과의원장 이종호
 경기도 광주 서울외과의원장 이종호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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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 ​​​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은 온갖 시련을 겪은 뒤에 피는 꽃일 것이다. 아마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리라.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은 시련 속에 핀, 그런 아름다움 꽃을 그렸다. 2010년 5월 28일 이대부고 제21회 졸업생 졸업30주년 기념식에 초대받아 행사장에 갔다(관련기사; 남은 날도 우리 모두 열심히 사세).

30년은 곧 한 세대를 말한다. 그새 홍안의 소년소녀들이 50대 장년으로 변해 있었다. 30대 후반의 청년이었던 나도 그새 백발이 되었고. 그날의 대회를 준비한 한 졸업생이 만찬석상에서 고교시절을 회상하며 굳이 내 이름을 거명했다. 그 요지는 자기는 그 시절 언어장애로 국어시간 읽기를 시킬 때 가장 괴로웠다는 얘기를 했다. 문득 그때를 되새겨보니까 그의 말대로 나는 그에게 그날 날짜에 따른 읽기를 예외 없이 시킨 것 같아 학생지도에 세심치 못했던 처사를 깊이 반성했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승강장

남녀공학 교실에서 가장 민감한 사춘기에 국어수업시간 읽기 지명을 받았을 때 그의 고통은 얼마나 심각하고 자존심이 상하였을까? 나는 그날 그들에게 저녁대접 및 교통비까지 받고 온 게 너무 염치없고 미안하여 내가 사는 인근 횡성으로 초대했다. 그해 여름 그들이 횡성으로 와 막국수를 대접하며 이웃 자작나무숲미술관에서 30년 전 초록빛 이야기로 즐거운 하루를 보낸 적이 있었다.

2010년 여름, 그의 고교 동기들이 횡성으로 왔을 때(뒷열 오른쪽이 이종호 원장이고, 앞열 모자 쓴 이가 필자다).
 2010년 여름, 그의 고교 동기들이 횡성으로 왔을 때(뒷열 오른쪽이 이종호 원장이고, 앞열 모자 쓴 이가 필자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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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그들이 그 답례로 그해 연말모임에 초대했다. 서울 강남의 한 국수집에서 이런저런 환담을 나누며 저녁을 먹은 뒤 원주 내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그들이 호프 한 잔만 하고 가라고 소매를 잡았다. 나는 그날 분위기가 좋아 그만 2차까지 동석했다. 잠깐 새 10시가 후딱 넘었다.

나는 그제야 떠날 차비를 하고 일어서자 그가 원주행 버스시간을 조회해 보더니, 막차가 10시 40분으로 30여 분밖에 남지 않았다고 굳이 자기 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앞장섰다. 나는 그의 차 옆자리에 앉아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가는데, 그날따라 차가 몹시 밀렸다. 나도, 그도 조바심이 났다.

"선생님, 아무래도 지하철이 빠를 것 같습니다."
"알겠네. 어서 돌아가서 즐거운 시간 가지시게."

나는 그의 승용차에서 내린 뒤 양재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고속버스터미널로 갔다. 내가 숨이 가쁘게 터미널에 이르자 10시 38분이었다. 나는 곧장 버스승강장 원주행 버스로 가서 기사에게 양해를 구한 뒤 표를 사서 차에 오르자 10시 40분으로 버스가 출발하고자 막 출입문을 닫으려 했다.

그때 그가 닫기는 출입문을 열고 버스에 올랐다. 그는 둥그런 눈망울로 버스 안을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고는 "선생님, 타셨군요.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꾸뻑 인사를 한 뒤 버스에서 내려 승강장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가 내리자 버스기사는 출입문을 닫고, 강남고속터미널을 빠져 나와 원주로 달렸다. 나는 원주로 돌아오는 한 시간 남짓 그의 눈망울을 생각하며 참으로 행복했다. 아마도 그는 내가 차를 놓치면 자기 차로 원주 내 집까지 데려다 줄 양으로 뒤를 쫓은 듯했다. 그의 눈망울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애독자

이종호 원장이 환자를 진찰하고 있다.
 이종호 원장이 환자를 진찰하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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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국립민속박물관 김미겸 학예사를 만난 자리에서 그 이야기 끝에 손 전화 다이얼을 눌러 "자네가 보고 싶네"라고 했더니, 그가 내가 사는 곳으로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자네는 바쁜 사람이니까, 시간이 많은 내가 자네 병원으로 찾아가겠네."
"영광입니다. 언제든지 오십시오."

지난 17일 내 집에서 원주시외버스터미널로, 이천터미널에서 성남행으로 환승한 뒤 11시 30분에 경기도 광주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거기서 가까운 그의 병원 '서울외과의원'을 찾았다. 그는 서울클리닉이라는 종합병원 건물에 1·2층과 8층, 9층을 쓰고 있는데 광주에서 오래 전부터 인술을 베풀고 있는 두창대 원장님과 함께 진료하고 있었다.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그가 반갑게 맞았다. 마침 환자 진료가 빈 시간이라고 하기에 그의 진료실 의자에 앉았다. 그는 자기가 나가는 서울 잠원동성당에서 지난해 토머스 안중근 의사 특별행사를 하며 안중근 전기를 구입하여 공부하는데, 신부님은 내가 쓴 <영웅 안중근>를 이미 읽으셨다고 하시기에 그 책 저자는 고교 때 국어선생님이었다고 자랑했단다.

그는 그 책을 매우 정독한 듯 내가 우스리스크 역에서 루불화가 없어 한밤에 화장실 문제로 고생한 일화도 얘기했다. 그는 내가 쓴 <개화기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등 대부분 책을 구입해 읽었을 뿐 아니라, 지난 해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장편소설 <어떤 약속>도 정독한 듯, 주인공 준기와 순희가 다시 만난 1974년 8월 15일은 육영수 여사가 운명한 날이라는 것까지 지적했다. 사실 나도 집필할 때 거기까지 생각은 했으나 작품에는 반영치 않았는데, 그 당시 워낙 큰 뉴스라 올 가을에 나오는 책에서는 교정지를 보며 그 부분을 보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의사

사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정확하게 알아주는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내가 그동안 30여 권의 책을 펴낼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제자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가 쓴 책을 사준 탓으로, 나는 늘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공중보건의로 울릉도에서 1년 근무했고, 이후 경북 상주상모병원에서 8년, 그 뒤 지금의 장소에서 개업했다고 했다. 왜 하필 경북 상주에서, 경기도 광주에서 개업했느냐고 물었더니 대학 선배의 주선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마침 간호사가 환자가 왔다고 전달하기에 나는 환자 대기실로 나갔다. 잠시 후 진료를 마친 한 시골 할머니에게 물었다.

"이 병원에 자주 오세요?"
"자주 와요. 원장님이 아는 것도 많으시고, 진료도 잘 봐주시고, 환자에게 친절해요."

시골 의사, 이종호. 내 어린 시절 고향 경북 구미는 한촌이었다. 초등학교로 오가는 길에 낙산의원이라는 병원을 지날 때면 이따금 앞이마가 벗겨진 마음씨 좋은 박 아무개라는 의사가 왕진가방을 자전거에 매고 환자 집으로 가는 모습을 보곤 했다.

어머니가 나를 낳을 때 초산으로 산고가 몹시 심했는데, 낙산의원 박 의사가 집게로 내 머리통을 집어 꺼냈다고 할머니는 늘 말씀했다. 옛날 여인들 가운데는 아이 낳다가 죽거나 아이도 사산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서울 부산 등 대도시 대로변에는 한 집 건너 병원들인데, 아직도 시골에는 의사가 드물다.

사실 교육자도 그렇지만 진정한 의사는 시골이나 가난한 동네에 있을 것이다. 내가 다시 교단에 선다면 어촌이나 산촌의 교단에 서고 싶다. 나는 퇴직 후 안흥으로 내려온 뒤 연수 나간 현직 교사를 대신하여 잠시 안흥고등학교에서, 횡성고등학교에서 두 해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시골학교는 조용하고, 학급당 학생들이 적으며, 언저리에 학원이 없는 곳이라 학생들의 수업 집중도가 매우 높았다.

그는 영판 없는 내 머릿속의 시골의사였다. 그는 이제 언어장애도 극복한 탓인지 지난날의 내성적인 성격에서도 벗어난 듯 보였다. 사람은 그 자신의 노력으로도 몇 번을 변신한다. 불경에서는 자신의 노력과 공부로 깨달으면 부처에 이른다고 한다.

이 세상만사가 흔하면 귀한 대접받지 못한다. 나는 그를 만나는 날 새벽잠을 깬 뒤 그에게 무슨 얘기를 들려줄까 생각하다가 언젠가 한 신문에서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뽑힌 장기려 박사의 "가난한 사람 돕는 게 인술(仁術)"이라는 기사를 스크랩북에서 찾아 복사했다.

이종호 원장이 입원실의 환자를 돌보고 있다.
 이종호 원장이 입원실의 환자를 돌보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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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높고 맑은 날

나는 그의 친구를 통해, 그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심지 깊은 의사라는 것을 이미 익히 전해 들었다. 그날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는 잠원동성당 가정의료분과 임원으로 오래 전에는 서울 원효로 청과물시장 옆 행려병자들을, 이즈음에는 경기도 마석 미등록외국인노동자들을 주일날에 돌본다고 했다. 이제 나는 그에게 가르칠 것이 없는, 내가 오히려 그에게 배워야할 구닥다리 골동품 훈장이지만, 장기려 박사 얘기와 함께 준비해간 "가난한 사람 돕는 게 인술(仁術)"이라는 복사 기사를 그의 책상에 두고 일어섰다.

"선생님, 점심도 구내식당에서 드시게 하고…."
"나는 그게 더 좋네. 늘그막에 좋은 음식 포식하면 해롭다네."
"곧 원주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때 가능한 자네 동기나 가족과 같이 오게나."
"예, 선생님."

나는 13시 50분 광주터미널에서 이천 행 버스를 타고 아침의 역순으로 집에 돌아왔다. 가을 하늘이 무척 높고 맑은 날이었다.


태그:#가연, #스승과 제자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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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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