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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19일. 필자에겐 운명의 갈림길에 선 날이었다. 대학졸업 후 지역 일간지에서 10여 년 동안 근무하다 도저히 생활형편이 나아지지 않아 대리운전업체를 직접 꾸려 운영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다가온 얄궂은 운명의 순간이었다."

서치식(50·전주시 완산구 삼천동)씨가 2009년 1월 7일 <오마이뉴스>에 쓴 '외롭고 무서웠던 나의 재활기' 첫 회는 이렇게 시작된다. (관련 기사 : 조용히 잠들어 버리지 왜 깨어났을까?) 그는 불의의 사로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돌아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공무원의 꿈을 이뤘다.

'정의로운 언론인' 꿈꿨지만 생활이 안 돼 이직

서씨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청운의 꿈을 안고 정의로운 언론인이 되어 보겠다며 전북지역의 한 일간지에 입사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해도 손에 쥔 것은 상상 이하의 박봉이었다. 그나마도 체불이 밥 먹듯 되풀이됐다. 도저히 가정생활을 꾸려 나갈 수 없어서 이직을 결심했다.

그렇게 새로 구한 일자리가 그를 죽음의 문턱에 이르도록 한 대리기사업체였으니 참 기구한 운명이다. 그는 업무 중 입은 교통사고로 외상성 뇌손상으로 인한 미만성 축삭손상(Diffused Axonal Injury)과 2·6·7번 경추골절을 입었다. 당시 119 구조대에 의해 구조되어 한 지역 국립대학 병원에 후송됐다. 80여 일 만에 의식을 회복했으나 종일 누워서 지내야 할 정도로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2005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그는 한동안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2005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그는 한동안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 서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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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는 "의식이 들었을 때 나는 내가 누구인지, 거기가 어디인지, 심지어 어머니조차 몰라보는 참담한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10여 년 동안 강인한 정신과 인내력으로 재활에 성공, 공무원 시험에 도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임용시험에 합격, 5년여 만에 새로운 삶의 희망을 얻게 됐다. 4전 5기의 인간승리다.

언론인의 꿈을 완전히 접지 못한 그는 재활을 하면서도 한동안 지역 인터넷 신문의 편집부 기자를 했었다. 하지만 그가 절실하게 하고 싶은 일은 공무원이었다. 그와 같은 불행한 처지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다. 그가 몸을 아끼지 않고 재활에 나선 이유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시작한 공무원 꿈... 10년 만에 새 삶

그는 몸을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걷기는커녕 일어설 수도 없고, 누운 자세에서 옆으로 돌아누울 수도 없었다. 언어조차 제대로 구사하지도 못해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던 그가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한 지 5년여 만에 꿈을 이루었다.

10년 간의 재활 노력 끝에 9급 공무원시험에 합격한 서치식씨가 2014년 9월 18일 환하게 웃고 있다.
 10년 간의 재활 노력 끝에 9급 공무원시험에 합격한 서치식씨가 2014년 9월 18일 환하게 웃고 있다.
ⓒ 박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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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에 응시한 2014년 전라북도 지방직 중 전주시 일반행정직 9급에 당당히 합격했다. 합격통지서를 받아든 것은 지난 16일이었다. 4년간의 낙방 끝에 찾아온 정말 고마운 합격증이다. 119 구조대에 의해 생명을 구조 받았던 그는 비록 힘들고 오래 걸렸지만 건강한 사회인으로 복귀했다. 서씨는 "이 고마움을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먼저 찾아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겠다"는 그를 지난 18일 전주시에 소재한 전북대학교 캠퍼스에서 만났다. 신산했던 그간의 소회와 새로 맞게 될 제2의 삶에 대한 각오도 들어봤다. 아울러 한때 지역 언론계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관청에서 마주하게 될 지역 언론 종사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함께 들어보았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지역 언론사는 어떤 계기로 언제부터 일하게 됐나?
"대학 졸업 후 해외여행이 자유롭게 되어 여행 붐이 일어나던 시절, 한 여행사에서 근무했었다. 그러다 1994년 전주에 본사를 둔 <전라매일>(현 전라일보)가 창간한다는 소식을 듣고 2002년 창간멤버로 입사해 주로 업무국에서 편집국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그 후 불의의 사고로 몸을 크게 다쳤지만 재활치료를 하며 많이 나아지게 돼 지역의 인터넷 신문 편집부에서도 약 2년여 동안 근무했다."

사고가 나기 전에는 지리산 정상을 자주 오르내렸다.
 사고가 나기 전에는 지리산 정상을 자주 오르내렸다.
ⓒ 서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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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의의 사고로 몸을 많이 다쳤는데 어쩌다 사고가 났는가?
"지역신문사에서 몇 푼 안 되는 급여를 받았다. 신문사나 모기업의 사정이 좋지 않을 때는 체불을 밥 먹듯 하다 보니 평범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신문사에 종사하는 많은 편집국 기자들의 급여를 매월 챙겨주는 게 내 업무 중 하나였는데, 사실 급여일만 돌아오면 기자들에게 괜히 미안했다. 그런데 사주는 전혀 그런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2005년 지역신문사를 접고 생활전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대리기사업체를 꾸려 운영하던 중 2005년 5월 전북 완주군 봉동읍 구미리의 황색점멸등 사거리에서 큰 사고를 당했다. 내가 운전하던 차와 택시가 정면충돌을 하여 나는 큰 충격을 견디지 못해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가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 때 119 구조대에 의해 구조된 것이 두 번째 삶의 시작이었다."

지난 2012년 김제 지평선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모습이다.
 지난 2012년 김제 지평선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모습이다.
ⓒ 서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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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난 노력의 재활치료로 주변 사람들을 감동 시켰다. 어떤 노력과 각오로 재활을 했고 지금은 어느 정도로 호전됐나? 
"3년간 치열하게 병원치료를 받다보니 '재활은 과학이고 운동은 치료'임을 알게 됐다. 오랫동안 병원치료를 받으며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자가 재활'을 하기로 결심했다. 병원치료를 그만 둘 당시 '영구 2급 뇌병변 장애'로 판정받았는데, 당시 규정은 '평지에서 50m를 혼자 갈 수 없는 자'가 기준이었다. 자가 재활에 나서면서 나는 사소한 일에도 스스로를 엄하게 몰아가며 생활 속 재활을 시도했다. 팔굽혀펴기부터 시작해 벽을 보고 천 번씩 큰 절을 했다. 서서히 뛰는 단계까지 발전시켜 나갔다.

지난 2012년 처음으로 하프 마라톤대회 완주에 도전했다. 막바지 코스에서 비록 실패했으나 내게는 값진 경험이었다. 사고나 질병으로 장애를 얻으면 그 순간부터 장애가 자신의 운명인양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는 살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내 몸으로 이른바 '완전한 재활'을 이뤄, 사고나 질병 이전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지금도 마라톤 하프코스 완주를 위해 도전 중이다. 그 목표를 가지고 요즘 매일 전주의 삼천천변을 달리고 있다."

2급 뇌병변 장애를 '자가 재활'로 극복하다

- 공무원 시험 준비는 언제부터 하게 됐나, 주변의 만류는 없었나?     
"장애를 얻고 재활을 하면서도 초기에는 늘 신문사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추천으로 2007년 인터넷 신문 편집기자로 근무할 수 있었다. 소중한 경험이었고, 이를 계기로 내 체험을 알리며 다른 재활 환우들과 소통하기 위해 서툰 솜씨로 <오마이뉴스>에 글쓰기를 했다. (관련 기사 : 무섭고 외로웠던 8년간의 재활, 기적이 일어났다 등)

참혹했던 사고현장에서 2차 부상 없이 나를 구조한 119 구조사를 인터뷰했다. 그 때 내 생명을 살린 공직자, 그 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 그 무렵 2009년부터 공무원 시험에 연령제한이 폐지된다는 희소식이 들려왔다. 귀하게 얻은 생명으로 공직자가 되어 사회와 국가에 보답하겠다는 생각으로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 근처의 시립도서관과 대학도서관에서 매일 공부에 전념했다."

사고 전 가족과 함께 행복했던 순간.
 사고 전 가족과 함께 행복했던 순간.
ⓒ 서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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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만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인가, 지금 나이가 부담되지는 않는가?  
"햇수로는 5년이 걸렸다. 9급 공무원에 합격하기까지 많은 시련도 있었고, 좌절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 2014년 전라북도 지방직 시험 중 전주시 일반행정직 9급에 합격했다. 내 나이 50에 얻은 큰 행운이다."

- 전주시 공무원이 되면 무슨 일이 가장 하고 싶은가?
"119 구조대에 의해 생명을 구조 받은 나는 대한민국 복지시스템에 의해 지금도 공적 부조를 받고 있다. 사고 당시 갓 세 살이었던 딸, 가장의 짐을 대신 져야 했던 아내와 나는 '가족해체'의 위기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 덕에 건강한 사회인으로 복귀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장애를 입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내게 국가의 복지정책은 절대적인 도움이 됐다.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먼저 찾아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절대적 도움을 제공했던 수많은 공직자들의 모습처럼 나도 시민들에게 그렇게 다가가려 한다."

- 한때 인터넷 신문 기자로도 활동했고, 블로그도 운영했다. 지금도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가?
"오랜 시간 공무원 시험 준비에 몰두하느라 블로그를 비롯해서 인터넷 재활 카페 등은 거의 휴면 상태가 돼버렸다. 이제 그 활동을 재개할 것이다. '완전한 재활'을 목전에 둔 지금까지 내가 얻은 귀한 경험들을 이 땅의 재활 환우들과 공유하려 한다."

강인한 재활 의지와 노력으로 걷기가 시작됐다.
 강인한 재활 의지와 노력으로 걷기가 시작됐다.
ⓒ 서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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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많은 재활치료를 하고 있는 환우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여러 운동들을 내 몸에 직접 실험해가며 치열하게 노력하면 반드시 사고 전의 건강을 회복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중요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긴 시간이 소요된다. 사소한 일에도 스스로를 엄하게 몰아가야 하고, 긴 인내가 필요하다.

장애를 얻고 10여 년 만에 내 재할의 최종 목표인 하프마라톤 완주가 코앞에 있다. 이 경험에 의하면, 재활은 법칙이 존재하는 '과학'이고 운동은 '치료'이다. 장애는 운동을 통해서 '완치'될 수도 있고 최소한 현 장애를 '개선'할 수 있음을 힘주어 말하고 싶다."

지금의 전북 언론, 지역 사회의 암적 존재

- 공무원으로 근무하게 되면 기자실에서 지역 언론 종사자들을 자주 접하게 될 것이다. 개선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주들이나 그 아래 종사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젊은 시절, 건강한 지역 언론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그 때를 지금도 아름답게 추억하고 있다. 언론 환경을 개선하고자 주린 배를 참아내며 함께 했던 그때는 소명의식 비슷한 지사적 풍조가 지역 언론인 사이에 분명 존재했다. 그런데, 작금의 지역 언론 상황은 더 열악해졌다. 과거 신문사 문턱을 드나들었던 경험만 있으면 기자명함을 들고 다닌다고 할 정도다. 내가 예전에 근무하던 때는 신문사 사장의 운전기사에게서 기자 명함을 받은 적도 있다.

지역 언론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선배로서 안타깝다. 감히 말하자면 현재 전북의 언론은 대안 있는 비판으로 지역사회를 감시해 지역발전을 선도해야 하는 언론 본연의 자세는 고사하고 오히려 지역 사회의 암적 존재가 되었다. 현 상황은 지역 언론인들의 문제를 넘어 전북의 구성원 전체가 당면한 시급한 문제이다. 오늘의 전북지역 언론 현실에 대해 지역 언론의 사주를 비롯한 후배 언론 종사자 그리고 지역사회가 그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개혁 방안을 심각하게 논의해야 할 중대한 시점이다."

환한 웃음 속에서 새 삶의 에너지가 가득 묻어난다.
 환한 웃음 속에서 새 삶의 에너지가 가득 묻어난다.
ⓒ 박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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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끝나고 환하게 웃는 그의 입가에는 새로운 삶의 에너지가 가득 넘쳤다. 지역 신문 종사자에서 대리기사로 전직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그가 공무원으로 멋지게 변신한 것을 보니 인생역전 드라마가 따로 없다. 인생의 2막, 새 출발을 앞두고 있는 그가 부러워진다.


태그:#교통사고, #재활성공, #9급공무원, #전주시, #휠체어에서 마라톤까지, #휠체어에서 마라톤까지, #휠체어에서 마라톤까지, #휠체어에서 마라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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