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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사 터,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던 곳이다.
 선원사 터,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던 곳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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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중부는 강화 평화 전망대, 강화 역사관, 화문석 문화관 등이 있는 북부에 비해 덜 알려진 곳이다. 뿐만 아니라, 갑곶 돈대, 광성보, 초지진으로 이어지는 동부에 견줘도 찾는 이가 매우 적다. 전등사와 마니산 참성대로 대표되는 남부보다 지명도도 훨씬 낮다. 보문사를 거느린 서부 지역에도 역시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조금 거칠게 말해서, 중부 지역을 제대로 답사하지 않으면 강화도를 다녀왔어도 '헛걸음'을 한 것에 불과하다. 무릇 역사 유적지 답사는 그 지역에 깃들어 있는 특성을 둘러봐야 한다. 강화도를 대표하는 역사적 특성은 무엇인가? 강화도는 무려 39년 동안 고려의 '서울'이었다. 중부 지역을 꼼꼼히 둘러보지 않고서는 결코 그 특성을 눈에 담을 수 없다. 북부, 동부, 남부, 서부만 훑어본 답사자의 헛걸음은 그래서 아쉽다.

초조대장경을 보관했던 부인사
대구 팔공산 부인사 전경
 대구 팔공산 부인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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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실은 초조대장경을 제작해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했다. 북방에서 쳐들어오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몽고 군은 이곳까지 쳐내려와 부수고 불을 질렀다. 이 일은 텔레비전 연속극 <무신>에 방영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한때 39개 부속암자와 2천여 승려를 거느렸던 부인사는 그 이후 작은 절로 남게 되었다. 지금 부인사에 가면 고려 시대 부인사의 법당들이 불에 타 사라지면서 남긴 돌들과, 이름을 잃어버린 석등, 탑 등만 쓸쓸하게 남아 있다. 
고려의 '서울', 역시 명불허전

오랜 세월 고려의 도읍이었던 덕분에 강화도에는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던 사찰 터와 고려 임금의 무덤이 남아 있다. 고려 왕릉이 강화도에 있는 것은 왕건에게 귀부한 후 개성에서 죽은 경순왕만 제외하고 나머지 신라 왕들의 능이 모두 경주에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강화도 중부 지역에선 고종의 홍릉과 희종의 석릉을 볼 수 있다.    

지난 10일 강화도 중부 지역으로 역사 여행을 떠났다. 강화대교를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면 가장 먼저 선원사로 가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선원사는 경남 합천 해인사에 보관돼있는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을 만든 곳이다.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불교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막아보려 한 고려는 1011년부터 1078년까지 무려 70년을 바쳐 대장경을 제작한다. 해인사 팔만대장경보다 200년이나 앞선 일이다. 하지만 대구 팔공산에 보관돼있던 이 초조 대장경은 1232년 몽고의 2차 침입 때 대부분 불에 타 사라져버렸다.

고려는 강화 천도 후 고종(1213-1259) 때 다시 대장경을 만든다. 그것이 해인사  팔만대장경이다. 강화도를 찾은 답사자가 선원사 터를 놓치고 그냥 지나칠 순 없다. 나라 안 그 어디에서 대장경 제조 유적지를 볼 수 있을 것인가? 복원을 앞두고 있어 아직 법당도 없고 대장경을 만든 집도 없지만 반드시 찾아보아야 하는 곳, 그곳이 바로 선원사 터다.  

이규보 사당 오른쪽으로 보이는 이규보 묘소
 이규보 사당 오른쪽으로 보이는 이규보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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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사터에서 계속 남하하면 오른쪽에 이규보 묘소가 있다. 이규보는 누구인가?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국선생전> <동명왕편>을 저술한 무신 정권기 최고의 문인이다. 물론 무신 정권에 아부하며 생애의 출세를 추구한 이규보의 본질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는 평론가들이 한둘 아니다. 그래도 그의 묘소와 사당은 여전히 중요한 역사 탐방의 대상이다. 2002년판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267쪽을 읽어본다.

고려 후기는 민족적 자주 의식을 바탕으로 전통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경향이 대두하였다. 이는 무신 정변 이후의 사회적 혼란과 몽고 침략의 위기를 겪은 후에 나타난 변화였다.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 역사서로로는 (각훈이 쓴) <해동고승전>, (이규보가 쓴) <동명왕편>, (일연이 쓴) <삼국유사>,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 등을 꼽을 수 있다. (중략) <동명왕편>은 고구려 건국의 영웅인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일종의 영웅 서사시로서,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반영하고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하였다.

<백운소설>, <동명왕편>... 이규보 묘소와 사당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280쪽에도 이규보에 관한 설명을 싣고 있다. 이 부분도 읽어본다. 교과서의 이규보 부분을 장황하게 인용한 것은 강화도 역사 여행 답사자가 중부 지역에 있는 그의 묘소를 놓치고 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고려 후기에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설화 형식으로 현실을 비판하는 문학도 유행하였다. 민간에 구전되는 이야기를 일부 고쳐 한문으로 기록한 패관문학이 유행하였는데, 이규보의 <백운소설>과 이제현의 <역옹패설>이 대표작이다. 사물을 의인화하여 일대기로 구성한 이규보의 <국선생전>과 이곡의 <죽부인전> 등도 현실을 합리적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을 띠었다.

이규보 사당의 내부와 그의 초상화
 이규보 사당의 내부와 그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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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공양왕릉을 제외하면 남한에서 고려의 능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강화도 중부 지역이다. 멀리서 강화도를 찾은 나그네가 모두를 다 둘러보기에는 시간이 그리 녹록치 않다. 왕후의 능인 가릉과 곤릉 제외하고 임금의 능인 석릉(희종, 1204-1211)과 홍릉(고종, 1213-1259)만 둘러보기로 한다.

이규보 묘소에서 접근하는 경우, 시대순으로도 그렇지만 능 또한 희종의 능이 고종의 능보다 먼저 나타난다. 희종은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교동도에 유배되었다가 사망한 고려 21대 임금이다. 한많은 일생을 살았던 비운의 임금인 셈이다. 그러나 그의 능을 찾아가는 길은 멀지만 호젓하고, 적요하지만 평화롭고, 한가하지만 느긋하다.

호젓한 '석릉 가는 길'

도로변의 석릉 안내판은 1.7km를 들어가라고 말한다. 1.7km는 얼마나 되는 길일까? 일반 성인이 평지에서 보통의 속도로 걸으면 한 시간에 대략 4km 이상을 간다. 하지만 산에서는 그 절반밖에 못 간다. 약 두시간 정도 소요됐다.

일찍 해가 저무는 산은 하산 시점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걸어야 한다. 평지를 걸을 때와는 전혀 다른 도보 속도를 간과한 채 산 속을 다니다간 갑자기 닥치는 밤을 맞아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계산법은 무의미하다. 1.7km가 평지의 길인지 산길인지 아직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차를 몰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보니 과연 그렇다. 도로변 이외에는 더 이상 이정표가 없어 불안한 마음으로 운행했는데, 불과 1분 만에 '석릉 650m 사적 369호'가 적힌 작은 이정표와 조우한다. 왕복 1.3km라면 산길이라도 40분 정도에 충분히 다녀올 수 있다. 시간 부담이 없다. 기꺼운 마음으로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다. 길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왼쪽에는 철망으로 된 문이 설치돼 있다. 그렇다면 오른쪽으로 가야한다.          

찾아가는 산길이 너무나 아름다운 석릉
 찾아가는 산길이 너무나 아름다운 석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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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릉은 초라해서 별로 임금의 무덤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하라면 '왕릉같지 않다' 정도가 될 수준이다. 하기야 무신 정권 시기에 실권도 없이 지낸 임금인데다, 최충헌을 몰아내려다 오히려 귀양지에서 사망한 왕의 능이 그럴 듯하게 남아 있을 리 없다. 게다가 고려는 이성계에게 국가 권력을 빼앗겼고, 조선 왕릉들에 비해 시간상으로도 훨씬 옛날 무덤이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능으로 가는 길만은 여느 조선 왕릉보다 아름다울 듯하다. 비록 가을을 맞아 물기가 메마르기는 했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얕은 계곡은 여름철의 정취를 잘 말해주고 있고, 좌우로 울창하게 우거진 숲에서는 새의 울음이 나뭇잎처럼 애처롭게 떨어진다. 다니는 사람이 없어 일순 적막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무인지경의 선계에 몸을 맡긴 듯한 남 모를 황홀감에 가슴이 떨리기도 한다.   

곳곳에서 도토리와 밤이 낙엽 위에 톡톡 소리를 얹는다. 아주 가느다란 소리들이다. 도심이라면 아예 귓속까지 닿지도 못할 여리고 순한 음들이다. 그러나 그 작은 소리들이 울려올 때마다 내 발길은 문득문득 멈춰진다. 꽃이 피는 것을 보면서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라고 노래한 이호우의 세계관이 강화도 이 고요한 산속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헤아려진 까닭이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가을이 떨어지는 소리는 작은 우주가 인간의 땅에 닿는 굉음이다. 도심 어디에서 이런 굉음을 들을 수 있을까? 그래서 동서고금의 위대한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한 것이다.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홍릉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홍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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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홍릉으로 안내하는 길은 석릉으로 가는 길과 사뭇 다르다. 우선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차이점은 평탄하지 않다는 점이다. 도로에서 학생수련장 안으로 들어가는 차도도 가파르지만, 주차 이후 걸어서 가야 하는 도보 오르막은 줄곧 나그네에게 땀을 필요로 한다. 계단도 많다.

석릉 가는 길과 다른 더 큰 차이는 자연의 길이 아니라는 점이다. 석릉 가는 길은 산 속의 오솔길이지만 이곳의 길은 인위의 수련장 안을 거치는데다가 걷는 구간도 거의 차도 성격이다. 게다가 수련장 자체의 풍경이 흡사 버려진 시설물 형상이라 분위기는 더욱 삭막하다.

석릉에서 홍릉 사이
희종의 석릉에서 고종의 홍릉까지 가는 사이에서 꼭 보아야 할 유적지는 정제두 묘소, 김취려 묘소, 고천리 고인돌군이다.

1649년(인조 27) 태어나 1736년(영조 12) 타계한 정제두는 우리나라 최초로 양명학의 사상적 체계를 세운 학자이고, 김취려는 거란의 침입을 크게 격파한 고려 고종 시기의 명장이다. 정제두 묘소는 오른쪽 도로변에 있고, 김취려 묘소는 정제두 묘소에서 대각선으로 맞은편 산속에 있다. 도로에서 김취려 묘소까지는 약 700m가량 되는 거리이지만 승용차를 탄 채로도 참배할 수 있게 길이 편편하게 닦여 있다.

고천리 고인돌군은 고려저수지를 지나 홍릉 방향으로 가던 중 왼쪽으로 산길을 들어가 고려산 아래에 있다. 이곳 고인돌은 강화도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할 정도로 잘 정비가 되어 있다. 물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군이다.

고려저수지와 고려산이라는 이름도 강화도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게 해준다. 이 역시 강화도가 긴 세월 동안 고려의 도읍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한숨을 쉬어가며 능 앞에 당도한 답사자를 현지 안내판이 잠깐 흐뭇하게 해준다. 무덤의 주인인 고종만이 아니라 팔만대장경, 김취려 장군 등에 관한 내용까지 담고 있는 안내판의 내용이 아주 유용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고려 제23대 고종(1192∼1259)의 능이다. 왕은 강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덕태후 유씨이고 비는 제21대 희종의 딸인 안혜태후이다.

왕이 즉위할 당시 최충헌이 세력을 잡고 있었는데 고종 6년(1219)에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우가 뒤를 이어 정권을 잡으매 왕은 제구실을 못하다가 고종 45년(1258)에 유경, 김준 등이 의(우의 손자)를 죽이자 왕에게 대권이 돌아왔다. 왕이 재위시에 북방의 민족들이 침입하여 그 어려움이 컸었는데 고종 3년(1216)에는 거란족이 쳐들어와 김취려, 조충 등이 이를 격파하였다.

그후 고종 18년(1231) 몽골족이 쳐들어오자 다음해 강화도에 도읍을 옮긴 후 이곳을 강도라 하고 몽골족에 대항하였다. 몽골병의 침입으로 대구 부인사에 있던 대장경판이 불타 버리자 고종 23년(1236)부터 고종 38년(1251) 사이에 강화도에서 대장경을 조판하니 이것이 오늘날 합천 해인사에 보존된 8만대장경으로 민족문화의 대표적인 자랑거리이다.

고종은 몽골군의 계속된 침입을 막아내면서 강화를 이룩하려고 고종 46년(1259) 태자 전(뒤에 즉위하여 원종이 됨)을 몽골에 보낸 후 그 해에 승하하매 개경에 옮기지 못하고 이곳에 모시게 된 것이다.

거란의 침입을 크게 물리친 고려 고종 시기의 명장 김취려 장군 묘소
 거란의 침입을 크게 물리친 고려 고종 시기의 명장 김취려 장군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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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평생을 강화도에서 살았다. 죽음도 강화도에서 맞이했다. 그의 재위 기간이 줄곧 북방 침략군과의 전쟁 시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권은 허수아비에 불과하고 실권은 무신들이 손아귀에 장악하고 있었다. 고종의 무덤이 왜 이리 초라한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석릉도 홍릉도 국가 사적... 좀 더 정비돼야

하지만 조선 왕릉들에 비하면 고려 임금들의 능은 그저 평민의 평범한 묘소 수준이다. 이름만 능일 뿐이다. "거의 방치 수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홀대받고 있는 존재들이 고려 왕릉이라는 지적이다. 왕릉이라고 해서 꼭 최고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석릉도 홍릉도 국가 사적 아닌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정립하는 데에 꼭 필요한 역사유적이므로 지금보다는 좀 더 정비되어야 마땅하다.

특히 홍릉은 어수선한 학생수련원 탓에 문제가 심각하다. 학생수련원을 깔끔하게 가다듬는 일이 급선무다. 아니, 홍릉 일대가 수련원 부지로 꼭 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갖춘 것도 아니므로 옮기는 것이 본질적 문제 해결책이다. 홍릉에 올라보라. 수련원이 보이지 않는 묘역에서는 탁 트인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유적지가 바로 홍릉이다. 고종도, 그를 이곳에 안장한 고려 무신들도 홍릉 아래가 이토록 지저분해질 줄은 차마 짐작도 하지 못했으리라.   

우리나라 최초로 양명학을 정립한 조선 후기의 학자 정제두 묘소
 우리나라 최초로 양명학을 정립한 조선 후기의 학자 정제두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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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천리 고인돌군. 강화도의 많은 고인돌들 중에서도 가장 잘 정비가 되어 있다고 평가할 만큼 유적지 일대가 깔끔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천리 고인돌군. 강화도의 많은 고인돌들 중에서도 가장 잘 정비가 되어 있다고 평가할 만큼 유적지 일대가 깔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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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강화도, #홍릉, #팔만대장경, #선원사, #김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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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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