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영화제 피움(FIWOM)'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여성 대상 폭력의 현실과 심각성을 알리고 피해자의 생존과 치유를 지지하는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지난 2006년 한국여성의전화 주최로 시작됐습니다. '질주'를 주제로 하는 제8회 영화제에서는 어떤 영화, 어떤 이야기, 어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9월 25일부터 28일까지 아리랑시네미디어센터에서 13개국 29편의 영화로 만나게 될 제8회 여성인권영화제 '질주'의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 기자 말

 마이 차일드 <My Child> 2013

마이 차일드 2013 ⓒ Can Candan (감독 캔 캔던)


"사회와 내 아이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했죠. 저는 우리 아이의 편이 되기로 했어요"
- 마이 차일드 My child(2013) 중

우리 엄마는 내가 레즈비언임을 알고 있다. '그것'에 대한 우리의 마지막 대화는 수화기에서 오갔다. 아직도 입에 올리기는 힘들었는지 머뭇머뭇 말을 흐리던 엄마. 그럼에도 그 날, 그 대화를 할 때 왜인지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10년을 넘기고서야 서툴게 대화하고 있었다. 어색했지만 감동적이었고, 드디어 작은 반환점을 돈 것 같은 안도감이 들었다.

흔히 커밍아웃을 '내가 레즈비언임'을 밝히고, 상대가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커밍아웃은 순간의 과정도, 단발로 끝나는 대화도 아니었다. 특히 안 보면 그만인 남이 아닌 가족에게의 커밍아웃은 더욱 그렇다. 가족이라는 게 다 그렇듯이, 서로 못 볼꼴 다 보이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살고 있지만, 그 속은 모르고 지내는 사이이므로.

들키고 싶지 않았던 나와, 어딘가 이상한 내 딸이 궁금했던 엄마는 긴 투쟁을 해야 했다. 나는 사춘기를 보내면서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힘겹게 받아들였고 동시에 이를 숨겨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러나 엄마는 비밀을 감추려는 나를 더 알고 싶어 했고 묘하게 또래와 다른 나를 의심했다. 모른 척해 주기를 바랐던 내 마음과는 달리 엄마는 더욱 집요해졌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과도 같았고, 집안의 공기는 말이 없어도, 대화를 해도 터질 듯이 팽팽했다.

터키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 대한 다큐멘터리

가끔 술래가 바뀌기도 했다. 나는 이제 숨기고 싶지 않았고, 엄마는 내 딸이 '그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냉가슴을 앓았다. 나조차도 오랜 혼란을 겪고서야 이해했던, '레즈비언'으로서의 삶과 역사를 쌓아갈 무렵이었다.

그렇게 한창 자랄 때, 내 날것 그대로의 표정은 나조차도 곤혹스러웠으니 엄마는 모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니, 자식을 이해하고 싶었기에 '설마, 그냥 친구겠지'하고 넘겼을지도 모른다. 혹은 딸이 레즈비언임을 거부하고 싶었으므로, 아니면 그렇다 한들 어찌할 줄 모르겠기에 회피했던 걸지도 모른다. 말을 꺼내고 싶지만 두려워서 눈치만 보던 그때, 엄마는 어쩐지 계속 나의 투박한 옷차림을 타박하거나 관심 가는 남자는 없냐는 물음으로 먼저 내 입을 막곤 했던 것 같다.

 마이 차일드 <My Child> 2013

마이 차일드 2013 ⓒ Can Candan (감독 캔 캔던)


지난 이야기를 매번 다른 감정으로 수십 번 복기하면서, 엄마에 대한 고민이 커지는 것을 느낀다. 긴 투쟁이 잦아든 지금에야 나만의 역사가 아니라 엄마의 역사를 헤아릴 여유가 생겨서일까. 눈치를 보았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나를 받아들일 것만을 전제했던 성급함을 돌이켜 보고, 엄마가 부모 이전에 세상에 둘러싸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이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엄마는 무슨 걱정을 하고 있을까? 나는 그래도 이런 고민을 나눌 친구가  있었지만, 엄마는 누구한테 위로를 받을까? 다시 들춰보지 않은 아픔들이 엄마에겐 어떻게 새겨져 있을까?

영화 <마이 차일드>는 터키의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먼 땅의 어떤 부모들이 나와 눈을 맞추고 조용히 자신의 인생을 풀어놓는다. 가정을 꾸리고, 처음 아이를 안아들었던 순간을 회상하며 떠오르는 미소가 따뜻해 귀 기울이는 순간,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자라는 아이가 어딘가 '정상'의 범주에서 비껴나 보이던 순간들을 회상하는 부모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진다. 겨우 서너 살이 되었을 뿐인데도 치마를 입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여자아이 이야기나, 여성스러운 남자아이에게 남자답게 굴라고 가르쳤다는 부모들의 이야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내 아이와 '함께' 살기를 택한 부모들

사실 동성애자에 대한 이 같은 묘사는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익숙하다. 하지만 그 말들이 부모로부터 흘러나오는 순간, 또 다른 의미가 부여된다. 엄마가 딸의 '이상함'을 의심할 때 맨 처음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나는 생각이나 해봤던가?

난 동성애자에 대한 담론과 이야기는 많이 알고 있지만,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이를테면 가족)의 역사에는 아직 관심 가져본 적 없었다. 영화는 이런 나를 흔들었다. 부모들은 스쳐지나가는 순간, 자기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고작 서너 살 아이인데', '그저 잠깐 지나는 일이겠지', '근데 내가 이 아이를 잘못 키우고 있는 걸까?'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막연히 엄습하는 불안의 감정들. 그 불편한 위화감이 무엇인지 짚어낼 수 없던 사람들.

그러나 다큐 속 부모들은 과거 자신의 감정들을 이해하며 회상한다. 그들의 목소리와 말은 모호하지 않고 단단하다. 오랫동안 내게 물음표로 남아 있던 내 엄마의 얼굴이 내 앞에서 처음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내 기억 속에 나의 언어로만 남아 있어 이제는 알 수 없는 그 사람의 진짜 이야기. 그것을 이제야 들은 느낌이었다.

 마이 차일드 <My Child> 2013

마이 차일드 2013 ⓒ Can Candan (감독 캔 캔던)


다큐 속 인터뷰는 아이가 성인이 되면서 결국 현실에서 충돌한 순간에 다다른다. 그들이 '내 아이가 동성애자'임을 온 힘으로 받아내며 느낀 감정이 터져나오고, 이제껏 고요했던 화면은 별 다른 변화 없이도 넘실거린다. 그 분투는 그들이 '성소수자 부모 모임'을 꾸리게 하는 힘으로 승화된다. 감동적이다.

호모포비아(동성애혐오)적인 사회에서 내 아이와 '함께' 살기를 택한 부모들은 이제 사회를 바꾸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이들의 힘은, 엄마에게 내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어 한 적 없는 내 무관심을 찌른다. 내 문제만 해도 버겁다는 변명으로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었음을 일깨운다. 우리가 같이 살아가기 위해 노력할 용기가 없어서, 서로 물러나기만 했지 않느냐고 묻는다.

어느 누구에게도 조언을 구할 수 없었다던 이들은 이제 다른 부모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도 조언과 영감을 준다. 그날, "엄마, 나중에 내 애인 소개시켜 줘도 돼?"라는 물음에 망설이듯, "괜찮지만 그래도 친구로 대하게 되지 않겠냐"고 대답했던 엄마. 이제는 네가 레즈비언인 것을 인정한다는, 그러나 '아직 내게 그 이상은 어렵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던 엄마의 말. 다큐 속 저들의 삶이 여기까지 오는 데만도 지쳤던 나와 엄마에게 담담한 응원을 건네주는 것 같다.

그저 나와 비슷한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이에게는 희망이 된다. 보이지 않고, 말할 수 없던 소수자들이 스스로의 입으로 말할 때 더욱 그렇다. 성소수자 부모 모임의 이야기는, 그래서 뜻 깊다. 동성애자의 이야기만도 아직 낯선 한국 사회에서, 더욱 낯선 그 부모의 이야기가 힘 있는 이유다. 때문에 난 더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삶을 보길 바란다.

마이 차일드 My Child 제8회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정보
캔 캔던 Can Candan | 2013 | Documentary | 81' | Turkey
09. 26. Fri. 18:40 피움 톡!톡! Fiwom Talk!Talk! 아리랑시네미디어센터 2관
09. 28. Sun. 10:00 아리랑시네미디어센터 3관

덧붙이는 글 ※ 성소수자 본인의 내밀한 이야기인 기사 특성상, 신변보호를 위해 기자 이름은 밝히지 않습니다.
여성인권영화제 FIWOM 마이 차일드 성소수자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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