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긴 어게인 메인 포스터

▲ 비긴 어게인 메인 포스터 ⓒ 판씨네마(주)


<비긴 어게인>이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지난 8월 13일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37일째인 9월 18일까지 예매율 2위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며 덩치 큰 영화들 사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으로선 시간이 갈 수록 입소문을 타며 더욱 기세를 올리는 이 영화의 인기를 잠재울 만한 요소는 딱히 눈에 띄지 않는다.

개봉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헐리웃 영화 가운데 올초 개봉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77만, <그녀>가 30만 관객을 동원한 점을 생각해보면 <비긴 어게인>의 인기는 놀라운 수준이다. 여기에는 <원스>를 통해 기념비적인 성공을 거둔 존 카니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 인상적인 OST와 배우들의 호연,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의 완성도가 기여한 바 크다.

음악과 영상이 만나는 매혹적인 지점

<비긴 어게인>은 멋진 영화다. 지난 2006년 <원스>를 통해 음악과 영상이 만난 매혹적인 지점을 보여줬던 존 카니 감독은 무대를 뉴욕으로 옮겨 사랑과 우정, 음악과 성공, 열망과 절망, 즉 청춘의 이야기를 그려냈다(영화에 중요하게 삽입된 곡 'Lost Stars'가운데 조지 버나드 쇼의 유명한 말 'God, tell us the reason youth is wasted on the young'이 가사로 쓰인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영화가 청춘의 이야기임이 명확하다). 아일랜드 더블린을 배경으로 했던 <원스>와 배경이 바뀌고 등장인물이 조금 늘어났을 뿐 다루는 이야기와 감성의 결은 그대로다.

반복되는 세 차례의 오프닝

영화는 뉴욕의 한 라이브 바에서 시작된다. 이제 막 무대에서 노래를 마친 가수가 객석에 앉은 자신의 친구를 관객들에 소개하고 그녀는 떠밀리다시피 무대로 올라와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부른다. 도시의 지친 청춘에게 바치는 잔잔한 발라드. 그녀의 노래가 끝나자 카메라는 객석을 비추고 취한 듯 그녀를 바라보는 한 남자와 그녀에게 달려오는 친구의 모습을 잡는다. 곧이어 영화는 이 오프닝 장면을 세 차례 반복해서 보여준다. 대개 한 영화가 똑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줄 땐 그 사이사이에 그 장면들을 전과 같이 보이지 않게 만드는 장치를 해놓기 마련이다. 이 영화도 그렇다.

오프닝 이후 영화는 댄(마크 러팔로)이라는 인물을 보여준다. 늘 취해 있고 가정은 파탄났으며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지금 막 쫓겨난 사내.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이 무너져버린 총체적 난국 속에서 댄은 자살을 생각한다. 지하철에 몸을 던져 죽으려고도 하지만 그의 발은 주점으로 향하고 그렇게 들른 술집에서 그레타의 발라드를 만난다. 댄은 자리에서 일어나 취한 듯 무대를 바라보고 관객들은 댄의 시선 속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 드럼 등이 살아 움직이는 마법같은 무대를 경험한다.

세번째 오프닝은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의 관점에서 펼쳐진다. 5년이나 사귄 애인 데이브와 함께 뉴욕으로 왔지만 스타가 된 그는 변심해 떠나가고 그레타는 홀로 낯선 도시에 남겨졌다. 사랑을 잃고 절망한 그레타를 친구가 라이브바로 데려와 무대에 세우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노래를 부른다. 그녀의 인생을 영화처럼 만들어 줄 운명의 노래를.

비긴 어게인 오프닝씬 노래를 부르는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

▲ 비긴 어게인 오프닝씬 노래를 부르는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 ⓒ 판씨네마(주)


그레타는 오직 자신과 자신의 고양이를 위해 곡을 쓰는 싱어송라이터다. 그녀는 애인인 데이브(애덤 리바인)가 메이저 음반사와 계약을 하게 되어 함께 뉴욕으로 오지만 스타가 된 그의 변심으로 절망한다. 그녀는 우연히 서게 된 술집 무대에서 몰락한 음반 제작자 댄을 만나고 그와 함께 새로운 음반을 내려는 작업을 시작한다.

영화는 제목인 <비긴 어게인>의 뜻 그대로 '다시 시작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삶과 사랑, 가족과 일 모두에서 실패하고 절망했던 댄과 그레타가 그들의 삶을 일으켜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존 카니 감독의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소재인 음악은 그들의 재기를 이끄는 계기이자 영화의 강력한 추동력으로 기능한다. 하지만 영화가 천착하는 문제는 이들의 재기와 뮤직비디오적 구성을 넘어선 조금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바로 삶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새로운 환경, 유혹, 그리고 선택

영화에는 현재와 과거의 수많은 결정들이 등장한다. 댄과 그레타, 데이브와 미리엄, 그리고 사울의 선택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레타와 함께 뉴욕에 온 데이브는 인기를 얻은 후 새로운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성공이 가져온 유혹 앞에 데이브는 함께 해온 연인보다 새로운 감정에 충실하기를 선택한다. 데이브의 이러한 모습은 이제까지 그가 해온 음악과는 다른 방식의 음악을 하는 태도를 통해서도 보여진다. 인기를 얻기 위해 보다 크고 멋지고 화려한 음악을 추구하는 데이브. 그런 그에게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말고 자신에 충실하라 조언하는 그레타. 하지만 데이브는 조언에 따르지 않고 다른 많은 가수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화려하게 꾸며진 록스타가 되어간다.

댄의 아내 미리엄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음악평론가인 그녀는 출장차 한 음악가와 LA에 다녀와서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마중나와있던 댄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그 가수와 그녀는 LA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눴고 돌아와 각자의 배우자에게 사실을 말한 뒤 함께 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상황에서 맞닥뜨린 새로운 감정, 그 선택의 순간에서 미리엄은 데이브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것을 지키는 대신 새로운 열망을 따르기를 선택했다. 그로 인해 잃어버릴 것들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댄의 대학 동창으로 함께 음반사를 창업한 사울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제 '진짜' 음악을 거들떠 보지 않는 사업가가 되어있다. 눈 앞에서 그레타의 음악을 듣고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그는 초심을 잃어버린 사업가로 비춰진다. 그저 팔릴 만한 가수를 꾸며낼 뿐이다.

비긴 어게인 나란히 길을 걷는 그레타와 댄

▲ 비긴 어게인 나란히 길을 걷는 그레타와 댄 ⓒ 판씨네마(주)


순수하고 책임감 있는 이들에게 바치는 헌시

새로운 상황, 무시하기 힘든 유혹과 맞닥뜨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기존의 것들을 소홀히 하게 마련인 걸까? 영화가 천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존 카니 감독은 영화의 주인공, 댄과 그레타의 모습을 통해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으며 이들의 삶이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음을 멋진 음악과 영상을 통해 웅변한다.

댄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다. 사회적 성공과 가정의 행복을 모두 다 잃어버린 말 그대로 파산한 남자. 그러나 그는 그레타를 만나 순수한 방식으로 '진짜' 음악을 만들어 나간다. 동시에 그와 그레타 사이에 일어나는 미묘한 감정은 그 멋진 데이트씬을 통해 남녀의 감정임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그들은 선을 넘지 않고 자신들이 지켜야 할 것을 지키려 노력한다. 그레타를 돌아보던 댄의 아련한 눈길, 그들의 애틋한 포옹은 어찌할 수 없는 감정에 대한 가장 성숙한 표출이 아니었던가.

뿐만 아니다. 끝내 물들지 않았던 그레타의 원칙은 마치 랜디 뉴먼이 그러했듯 오직 자신만의 음악을 해나갔던 위대한 음악가의 그것과도 같아보였다. 음반제작사의 제안을 거부하고 오롯이 밴드와 발라드에 충실하려 했던 그녀의 음악은 진실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예술가의 숭고한 예술혼과 다르지 않았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 다가왔을 때 사람들의 선택들은 정말이지 제각각이고 그 중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존 카니 감독은 댄과 그레타의 결정을 데이브와 미리암, 사울의 모습과 대비해 아름답게 그려냄으로써 자신이 어느쪽을 지지하는지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그의 이런 태도가 <원스>의 성공에도 이 영화를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영화로 만들게 한 것이겠지만 동시에 이런 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도 한 것일 테다.

그러므로 <비긴 어게인>은 순수하고 책임감 있는 이들에 대한 멋드러진 찬사다. 덧붙여 영화의 마지막에 이 영화를 뮤지션으로 살다 요절한 자신의 형 짐 카니에게 바친다는 문구를 띄운 것을 보면 그의 형이 어떤 삶을 살다 간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덧붙이는 글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 게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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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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