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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날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명절 잘 보내고 계시느냐, 나는 집에도 못가고 오늘도 열심히 돈을 벌고 있다고. 동생은 서울에서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다. 아직 정규직이 되지 못해 정규직 기사 분들이 쉬는 날이면 이처럼 대리로 운전해야 한다고 힘듦을 얘기한다. 이번 명절은 사흘간 계속 근무해야 하기에 퇴근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다. 다소 마음은 아프지만 그래도 그렇게라도 살아주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지금으로부터 40년이 조금 더 된 70년대 초반, 동생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얘기다. 어느 날인가, 퇴근을 하고 단칸방에 들어서니 동생의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와 계셨다. 선생님은 나를 보더니, "어? 애가 네 동생이야?" 선생님은 과거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선생님이셨고, 나는 그 선생님의 수업을 1년간이나 들었었기에 선생님이 단박에 알아보신 거였다. 선생님은 이어 나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어머니, 이놈은 저기, 제 형 같지 않습니다. 잘 살펴봐야 합니다. 이제 곧 무서운 여름방학이 옵니다."

무서운 여름방학? 어머니의 표정도 마찬가지이셨다. 우리들의 뜨악한 얼굴을 보시던 선생님은 이어 말씀하셨다. "여름방학이 무섭습니다. 탈선하기 가장 쉬운 때가 아이들의 여름방학입니다. 시간이 많고 활동하기 좋아서 이놈들,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싸우거나 못된 짓을 하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선생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정말 동생 녀석은 사고뭉치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동네의 허름한 창고에서 자면서 남의 판자울타리를 뜯어 불을 때거나,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는 문제아였다. 선생님의 걱정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고 우리는 그 경고를 받아 들였어야 했다. 그러나 말단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나는 그 말씀을 잊고 그 해 봄,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 여름 첫 휴가를 왔다. 동생이 집에 없었다. 어머니께 여쭸더니 동생이 사전, 친구들과의 계획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해수욕장으로 놀러 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여러 번 물어봐도 '정말'이라는 말씀에 긴가민가하고 넘어갔는데 나중 동생이 누군가를 두들겨 패 그 당시 교도소에 재소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상심했었다.

그때 내게 그렇게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추석 차례를 올리며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다가 문득 그 날의 기억을 회상하는 데 동생의 전화가 뜬금없이 걸려온 것이다. 지금은 웃으며 아이들에게 작은 아버지의 지난날을 얘기할 수 있지만 그 70년대 초반의 고통스러운 추억은 돌이켜보건대 진심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슬픔이기도 했다. 작은 도시의 변두리를 도는 도시빈민의 삶은 실로 참혹한 것이었다.

어머니 혼자서 우리 형제를 거두셨다. 어머니는 어쩔 때는 큰 대야공장에서 작업인부로, 어쩔 때는 건설공사장에서 벽돌을 이어 나르는 잡부로, 그리고 겨울에는 눈 속에 파묻힌 시금치를 캐는 일당 아줌마가 되어 우리 두 형제의 삶을 이어주셨다. 판잣집에 어스름이 내리면 풍로에 왕겨를 때 밥을 지었고, 봉지쌀마저 떨어지고 없을 때는 그냥 빈 솥에 물만 끓여놓기도 했었다. 그럴 때면, 동생은 배가 고픈 나머지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그날의 광경은 지금까지 선연한 회색이다. 30촉 전등 아래 잠든 동생의 눈에도 하얗게 눈물이 말라붙어 있었고, 그 옆 개다리소반에도 낮에 먹다 남은 김치 몇 가닥이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아, 어찌 어머니의 그 기막힌 슬픔을 잊을 수 있겠는가. 동생의 그 하얀 눈물 자국과 우리의 신산스런 삶을 잊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삶 속에서도 어려움을 극복하고 50년 넘게 내 곁을 지켜준 동생에게 감사하기까지 하다. 하나 뿐인 동생이잖은가. 그동안 동생은 내게 떼려야 뗄 수 없는 혹이었다. 사고를 치고 나면 경찰서로 나를 불러냈고, 궁핍하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횟수보다 고통스런 건 언제까지 그런 방식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장담할 수 없는, 동생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지금도 그 모든 것이 명료하게 정리된 건 아니다. 다만, 50대에 이르러 삶에 대한 자세가 사뭇 단단해진 것 같다는 것이다. 전화도 그 중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아직 목소리는 짱짱하다. 그런 동생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싶다.

"이 녀석아, 이제는 정신 차려야 한다. 다음 추석에는 어머니께 꼭 함께 가고 싶구나."

덧붙이는 글 | 동생이 힘겹게 살아 왔습니다. 앞으로도 큰 부자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건강하게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염원합니다.



태그:#도시빈민, #여름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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