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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마다 나들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이번 주 수요일인 오늘(17일)은 1코스인 심도역사문화길을 걷는다. 나도 같이 걸을 생각으로 미리 탁상달력에 표시해 놓았는데도 잊어버렸다. 다른 볼일 때문에 읍내에 가다가 생각이 나서 인사라도 할까 하고 출발지인 강화읍 터미널에 가봤다.

때마침 강화읍 장날이어서 그런지 터미널 근처는 조금 분주했다. 농사 지은 태양초를 자루째 들고온 아주머니를 중도매인이 반기며 팔을 덥석 붙잡는다. 그 자리에서 흥정이 이루어지고 고추 자루는 장사꾼 손으로 넘어갔다. 트럭에 농산물을 싣고온 사람도 있다. 열무단도 보이고 논두렁 콩대도 있다. 잔손이 많이 갔을 이 농작물들은 장터로 가서 소비자의 선택을 기다릴 것이다.

150년 전 프랑스군이 반했던 강화

분주한 삶의 현장을 지나자 등에 배낭을 멘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가을을 만끽하며 길을 걸을 사람들이다. 이들 속에 끼어서 같이 걸어야 하는데도 나는 뭐가 그리 바쁜지 나서지를 못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간식으로 싸온 찐 옥수수를 건네주며 잘 놀다 오라고 인사를 전했다. 

 강화나들길 2코스인 '호국돈대길'을 걷고 있습니다.
 강화나들길 2코스인 '호국돈대길'을 걷고 있습니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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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이 걷게 될 길을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번잡한 읍내를 벗어나 북산을 넘으면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들판이 아롱아롱 펼쳐지고, 그 위로는 가을 하늘이 푸르게 넘실댈 것이다. 일 년 사계절이 다 아름다운 우리나라지만, 결실로 물들어가는 가을은 풍요로워서 마음마저 넉넉해진다.

150년 전 프랑스 사람들이 본 강화도의 모습도 그러했던가 보다. 조선과 통상을 요구하던 프랑스인들은 수도인 한양으로 들어가는 물길을 따라가다 강화도에 상륙한다. 해군 견습 소위였던 앙리 쥐베르는 본국인 프랑스로 돌아가 <조선원정기>라는 글을 남겼는데, 그 책에는 처음 본 강화도의 풍경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갑곶이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매우 아름다웠다. 이른 아침의 풍경은 특히 아름다웠다. 숙영지가 잠에서 깨어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푸르스름한 연기가 곧게 하늘로 올라가는 시간이면 아름다운 논과 밀밭, 옥수수밭, 무밭,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숲과 촌락들이 서서히 어둠을 벗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희한하게 볼록하니 둥글린 두렁으로 삐뚤빼뚤 이어가며 경계를 짓고 있는 논밭의 모습은 마치 아이들이 한 조각 한 조각 맞추어 놓은 퍼즐처럼 보이면서 우리네 평야가 보여주는 직선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있다. 평야가 끝나는 지점에 강화의 성벽이 보이는데, 성벽의 일부는 둔덕에 가려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더 멀리 겹겹이 포개어진 산들의 명암과 안개 자욱한 그 사이의 계곡들은 따뜻하고 행복한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쥐베르는 이국의 풍광을 찬미했지만, 당시 강화도 주민들은 낯선 양이들의 출몰에 놀라 도망을 갔다. 일 년 내 애써 지은 농사를 거둘 철이었지만, 양이(洋夷)들이 쏘아대는 대포가 무서워서 다 피신했다. 그래서 강화성 내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볼 수 없었다고 쥐베르는 말한다.

 광성보 안해루.
 광성보 안해루.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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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9월 18일에 물길을 조사하기 위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던 프랑스 군함은 그해 10월 14일에 다시 강화해협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강을 정찰했던 군함 세 척에다 수심이 얕은 곳에서도 이동할 수 있는 작은 군함 네 척 등 모두 일곱 척의 군함에 1천여 명의 군인들을 태우고 그들은 강화도 공격에 나섰다.

강화도는 한강 하류와 임진강이 만나 바다로 접어드는 곳이라 삼국 시대부터 군사 요충지였다. 고려 때는 개성, 조선 시대에는 서울로 통하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군사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병인년에 양이가 쳐들어 왔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선들은 강화도를 거쳐 한강으로 접어들었으며 서울에서 출발한 배들도 강화도를 지나 각 지역으로 이동했다. 서울과 통하는 강화도를 점령해서 한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막으면 보급로가 끊긴 조선의 조정은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프랑스군은 보았다.

프랑스군은 10월 14일 정오 무렵에 강화도 갑곶진까지 도착했다. 강화도의 동쪽 해안은 길이가 약 24km인데 초지진과 덕진진 그리고 광성보 같은 대대급 규모의 군사시설과 또 소대급 규모의 돈대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바다를 거슬러 올라오는 프랑스군을 막지 못했다. 진과 보 그리고 돈대를 맡아 경비하려면 1500명의 군사가 필요했지만, 실제로는 군사들의 숫자가 그에 못 미치게 턱없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보유하고 있는 무기 역시 보잘것 없어서 서양 함대를 감시하거나 맞서 싸울 수가 없었다.

프랑스군이 갑곶나루에 상륙했을 때 저항하는 움직임은 없었다고 한다. 그들이 상륙한 무너진 작은 부두에는 청동으로 된 큰 대포 두 문이 바닥에 놓여 있었고 작은 요새, 곧 갑곶돈대에는 오래된 대포 몇 문과 화승총이 있었다. 그리고 활과 화살 및 창 그리고 동으로 만들어진 포탄과 화약 상자 등이 쌓여 있었다. 프랑스군은 이 모든 것들을 다 파괴해 버렸다.

 강화 초지진. 바다 건너는 김포시 대곶면입니다.
 강화 초지진. 바다 건너는 김포시 대곶면입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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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강화도 인정면(지금의 불은면)에 살던 경주김씨 성을 가진 한 부인이 이때의 정황을 '병인양난록(丙寅洋亂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서 남겨 놓았다. 갑곶이 앞 바다로 양인이 쳐들어오자 관리들은 어찌할 줄 모르고 갈팡질팡하다가 백성들처럼 평복을 하고 도망을 치기에 바빴다. 병사들 역시 그러하니 양인들을 막을 자가 아무도 없었다. 강화읍을 차지한 양인들은 상교청이며 관사에 불을 질러 화광이 충천했다고 김씨 부인은 말한다. 

10월 16일에 강화부성은 프랑스군에게 점령 당했다. 강화읍의 동문과 남문에서 약간의 충돌은 있었지만, 화력이 강한 프랑스군을 당할 수가 없었던지라 조선군은 도망을 가기에 바빴다. 당시 강화성시(江華城市)의 주민 수는 1만 5천 명 내지 2만 명쯤에 이르렀는데 남아있는 주민이라고는 나이 든 사람들 몇뿐이었으며 여자들은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고 쥐베르는 말한다.

프랑스군은 강화를 근 한 달 가까이 점령하였다. 그 사이에 난리를 피해 도망 갔던 주민들은 차츰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가을 곡식들을 거둬들여야 할 때였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돌아온 것이다. 양인들은 강화읍을 차지하고 노략질을 하였다. 혹 주인이 있어 닭을 잡아 양인들을 대접하면 그 집은 손대지 않았지만, 도망을 가고 아무도 없는 집은 불을 질러 버렸다. 그러나 제가끔 살기를 구할 뿐 어느 누구 하나 진충보국할 사람이 없다며 김씨 부인은 한탄한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기록문화의 꽃, 의궤
ⓒ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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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은 강화 유수부에서 보관하고 있던 은괴 19상자와 수많은 문서와 책들을 약탈했다. 또 대포 80여 문, 화승총 6천 자루와 화약, 화살 등도 전리품으로 챙겼다. 프랑스군의 견습 소위였던 앙리 쥐베르는 '조선원정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외규장각의 보물들

"동헌 밑에 몇 개의 건물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그중 몇 채는 석조건물이었고 또 몇 채는 나무로 지었는데, 그 모두가 정부의 창고로 쓰이는 건물들이었다. 우리가 그곳을 점령했을 당시 그곳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포신(砲身) 뒤 끝에 화약을 넣어 발포하는 대포, 화승총, 창, 도끼, 활, 갑옷 따위의 엄청난 양의 무기들과 화약들...(중략) 이외에도 수많은 책들과 비축되어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종이를 발견했다. 주목할 만한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는 몇 권의 장서들을 포함하여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책들은 현재 파리의 국립도서관에서 볼 수 있다."
- '프랑스 군인 쥐베르의 조선원정기' 중에서

강화는 조선시대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강화를 유수부로 지정하고 특별 관리했다. '유수부'란 조선 시대에 옛 도읍지나 군사적인 요지에 설치했던 행정 기관으로 정2품인 유수가 다스렸다. 정2품은 현재로 보면 장관급이니 당시에 강화가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 알 수 있다.

강화유수부 안에는 외규장각이 있었다. 규장각은 정조 임금이 궁궐 안에 설치한 왕립도서관이었다. 정조는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을 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외규장각이다. 

 왕이 보는 의궤는 대부분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보관하였다고 합니다.
 왕이 보는 의궤는 대부분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보관하였다고 합니다.
ⓒ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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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
의궤(儀軌)란 조선시대 왕실·국가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를 그림과 글로 기록한 책으로 국가행사의 시행착오를 줄일 목적으로 간행되었다. 행사에 동원된 인력은 물론 각종 물품, 재료 등이 그림과 함께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왕실의 주요 행사를 의궤의 형태로 남긴 것은 조선시대에만 보이는 독특한 전통으로서, 서양은 물론이고 같은 한자 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이와 같은 형식의 기록문화는 발견되지 않는다.

의궤는 조선 왕조의 종합적인 역사 자료로서 경제, 정치, 미술, 음악 등 여러 분야의 연구에 이용되며, 2007년 6월 규장각과 장서각에 소장된 '조선왕조의궤'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외규장각에는 1007종 약 6000권 정도의 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떠날 때 수천 권의 책을 불태우고 귀중품들과 함께 외규장각 도서 340여 권을 약탈해 갔다. 그중에는 임금이 친히 보는 책들인 의궤도 297권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한자로 적혀 있어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장정이 화려해서 귀한 물건임이 틀림없을 것 같은 것만 가져가고 너무 많아서 다 가져가지 못하는 책들은 다 불태워 버렸다.

이렇게 프랑스군이 빼앗아갔던 조선 의궤들의 존재는 오래도록 우리나라에 알려지지 않았다. 프랑스 왕립도서관의 서고에 묻혀있던 외규장각 의궤들은 그곳의 사서로 일하던 한국 출신 박병선 박사에 의해 1975년에 그 존재가 처음 알려진다. 그리고 반환을 위한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쳐 2011년에 우리나라로 돌아온다. 그러나 영원한 귀환이 아닌 5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임대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돌아왔다. 

프랑스 극동 함대의 로즈 제독은 강화도에서 약탈한 물건들의 목록을 작성해 놓았다. 그 기록에서 보면 가철된 큰 책이 3백 권, 가철된 작은 책 9권 그리고 흰색 나무상자에 들어있던 작은 책 13권 및 그 외 18권의 책과 지도 등을 가져갔다. 또 상자마다 구리로 된 돌쩌귀와 함께 백색의 연접된 대리석판이 들어있는 상자도 세 개나 가져갔다. 통역이 없어 책들의 성격을 명백히 알 수 없었으나 이 나라의 역사와 문학에 관계되는 중요한 것임은 틀림없다고 기록해 놓았다.

의궤와 보물들을 빼앗겼다

또 로즈 제독이 해군성의 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조선 임금이 소유하고 있는 저택(강화유수부)에는 아주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서적들로 풍부한 도서실이 있었는데 공들여서 340권을 수집하였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11월 11일에 강화를 떠나기로 했다고 하면서 관공서와 궁전 그리고 군영(軍營) 등 모든 건물에 불을 질러 전소 시켰으며 200여 척 이상의 배들을 침몰시켰다고 했다. 강화에 있는 수많은 건물들을 불살라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완전 폐허로 만들었다고 장관에게 보고하는 편지를 썼다.

 1866년에 프랑스에게 빼앗겼던 의궤가 150년 만에 돌아오자 환영인파로 강화읍이 들썩였습니다.
 1866년에 프랑스에게 빼앗겼던 의궤가 150년 만에 돌아오자 환영인파로 강화읍이 들썩였습니다.
ⓒ 김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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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11월 11일, 프랑스군은 가치가 있어 보이는 물건들을 가지고 강화도를 떠났다. 중요도가 덜해 보이는 책들은 불태워 버렸다. 297권으로 구성된 의궤는 다른 서적들과 함께 프랑스로 보내졌고 파리 왕립도서관에 보관되었다. 당시 프랑스군의 방화로 왕실 주요 보관품 78건, 귀중 도서 804종 4730권이 소실되었으며 이 중에는 세상 어디에서도 다시 찾을 수 없는 유일본들이 수백 점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병인양요가 일어난지도 약 150년이 되었다. 프랑스의 로즈 제독이 약탈해간 의궤와 기타의 물품들은 아직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 물건들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니 우리나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 이치다. 그러나 프랑스는 의궤의 반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다. 한 세기 이상 전부터 프랑스에서 보관했기 때문에 이제 프랑스의 문화유산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프랑스의 법은 공공 소장품은 양도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프랑스는 이에 대한 새로운 법이 제정되어야만 반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해군이 조선을 침범하고 물건들을 약탈해간 것은 불법적인 행동이었다. 그것은 절도행위와 다름없다. 프랑스 측으로부터 공식적인 선전포고가 없었기 때문에 강화도의 요새들을 파괴하고 외규장각의 귀중한 서적들을 탈취한 행동은 인정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한 일들은 모두 약탈이고 또 강탈일 수밖에 없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제국주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하는 시대다. 그렇기때문에 외규장각 도서는 반환되어야 한다. 전쟁과 강자의 논리보다는 정의와 평등의 시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외규장각 도서는 원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복원한 외규장각입니다.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복원한 외규장각입니다.
ⓒ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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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는 원래 있던 곳으로...

지난 2011년 5월에 외규장각 의궤 중 일부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145년 만에 원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임대 형식이긴 하지만, 빼앗겼던 것을 되찾아온 우리나라의 감격은 남달랐다.

돌아온 의궤는 먼저 강화도를 찾았다. 원래 있었던 외규장각에서 의궤를 맞이하는 행사가 있었다. 그날 의궤를 환영하는 인파들로 강화읍 도로가 가득했다. 강화역사관에 한동안 전시되어 있던 의궤는 다시 강화도를 떠났다. 현재 복원한 외규장각에는 모사한 것이 전시되어 있을 뿐 진짜 의궤는 강화에 없다.

의궤가 우리나라로 반환되는 것이 마땅한 일이듯이 돌아온 의궤 역시 원래 있던 자리에 있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국가적으로 소중한 보물이어서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두어야 한다는 것은 일맥 맞는 말일 것도 같지만, 또 어찌 생각하면 프랑스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일면 힘의 논리로 보인다.

돌아온 의궤가 원래 있던 자리인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강화도 사람들의 욕심일까. 모사품 의궤가 전시되어 있는 외규장각을 볼 때마다 150년 전 파란만장했던 우리의 역사가 떠오른다. 의궤가 강화도 외규장각으로 돌아올 날은 그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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