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보자>의 한 장면.

영화 <제보자>의 한 장면. ⓒ 영화사 수박


|오마이스타 ■취재/이선필 기자| 우리에게 소설가로 잘 알려진 영국의 문호 조지 오웰은 운동가이자 언론인으로 투신한 실천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는 1945년 10월, 그러니까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지 2개월 뒤 자국 언론 <트리뷴>에 '당신과 원자탄',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다.

제국주의 야욕이 종말을 고하던 시기에 많은 언론인과 지식인들이 세계대전의 잔혹함을, 파시즘과 식민지 종속 체제를 비판했던 때, 조지 오웰은 평화 수호라는 명목으로 인류 앞에 등장한 원자 폭탄을 주목한다. "앞으로 5년 안에 우리 모두가 그것 때문에 산산조각이 날 가능성이 다분한데도 원자탄은 뜻밖에도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면서 그는 "원자 폭탄의 발명이 대국과 소국의 차이를 더욱 벌릴 것이며, '평화 아닌 평화'를 무한하게 연장하는 대가가 될 것"이라 지적했다.

그가 말하려던 핵심은 바로 이어 발표한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더욱 잘 드러난다. 영국과 미국의 많은 물리학자들이 몇몇 강대국들의 원자탄 연구 요청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들며, 조지 오웰은 "미치광이들의 세상 속에서 그들은 그것이 어디에 쓰일지 잘 알고 있었다"고 일갈했다.

<제보자>가 묻는다..."국익이 우선인가 진실이 우선인가"

'제보자' 박해일-유연석-임순례, 환상적인 호흡  25일 오전 서울 동대문메가박스에서 열린 영화 <제보자> 제작보고회에서 시사프로그램 PD 윤민철 역의 배우 박해일과 줄기세포 연구원 심민호 역의 배우 유연석, 임순례 감독이 캐스팅 뒷이야기를 전하며 웃고 있다. <제보자>는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줄기세포 사건을 모티브로 차용한 작품이다. 10월 2일 개봉 예정.

▲ '제보자' 박해일-유연석-임순례, 환상적인 호흡 지난 8월 25일 오전 서울 동대문메가박스에서 열린 영화 <제보자> 제작보고회 현장 모습. ⓒ 이정민


조지 오웰의 통찰력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10년 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황우석 사태'가 단적인 예다. 불치병 치료를 위한 배아줄기세포를 만들 원천 기술을 갖고 있다며 정부로부터 300억 원의 돈을 지원받고, 국민적 스타로 떠오른 한 과학자가 결국 거짓말쟁이가 돼버린 사건이다.

지난 16일 언론을 통해 공개된 영화 <제보자>(오는 10월 2일 개봉)는 위 사건을 소환해 질문을 던졌다. 한 양심적 과학자 심민호(유연석 분)가 자신이 모시던 줄기세포분야 권위자 이장환(이경영 분) 박사의 허위를 시사 교양 PD 윤민철(박해일 분)에게 제보하면서 던진 대사가 바로 그것이다. "국익이 우선입니까, 진실이 우선입니까."

과학도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거짓 연구를 계속할 수 없었던 심민호는 윤민철과 함께 진실을 전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의 고군분투도 무색하게 할 의외의 복병이 있었으니, 바로 이장환을 추앙하는 국민적 열기와 거기에 굴복하던 기성 언론이었다.

임순례 감독이 연출을 맡은 이 영화는 꽤 묵직하고 충실하게 당시 사건을 복기해냈다. 사건이야 이미 잘 알려져 있다지만 연출자가 정해지기 전까지 약 3년에 걸친 취재와 시나리오 집필 과정이 있었다. 임 감독이 연출제의를 수락하면서 다시 1년 동안 보완 및 각색 작업이 있었다.

16일 서울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임순례 감독은 "소재가 민감하다보니 연출 제의를 받았을 때 망설인 게 사실이었다"며 "(당시 쟁점이었던) 줄기세포 존재의 진위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였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라 운을 뗐다.

이어 임 감독은 "참 언론인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애쓴다는 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했다"며 "실화인 만큼 허구와 그 경계를 어떻게 맞추는 지에 중점을 뒀고, 생명공학의 일부분을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가는데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주제 의식과 함께 영화적 재미 또한 놓지 않으려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실존 인물 맡은 배우들 "언론인의 근성, 후폭풍을 걱정하기도 했다"

 영화 <제보자>의 한 장면.

영화 <제보자>의 한 장면. ⓒ 영화사 수박


10년 전 대한민국은 조작된 진실에 열광했고, 그것을 파헤치려는 움직임에 강한 반감을 표했다. 상당 기간 법정 분쟁을 거쳤던 해당 사건은 2014년 2월에야 황우석 박사에 대한 대부분의 혐의(연구비 횡령, 불법적으로 난자 이용, 논문 조작 등)가 유죄로 인정되며 종결됐다.

"배우로서 한 작품을 찍고 나면 홍보하는 시기를 겪으며 많은 기자 분들을 만나는데 제가 만약 언론인의 역할을 한다면 어찌 표현할지 궁금했습니다. 굉장히 큰 호기심으로 참여했고 촬영을 즐기면서 근성 있는 언론인 캐릭터를 해보자고 생각했죠." (박해일)

"개봉 이후 후폭풍은 감독님과 기자 분들이 막아주시겠죠? (웃음) 회한도 있고 후회도 있는 입체적 인물로 그려내려 했습니다. 살다보면 잘못된 걸 알면서도 그 길을 가는 경우가 있잖아요. 중단하지 못해서 나락으로 빠지곤 하는데 (황우석 박사) 굳이 그 분을 지칭하지 않더라고, 유사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작은 경고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경영)

영화에 참여한 배우들은 <제보자>가 지닌 의미를 파악했고, 충분히 그것을 연기를 통해 살리려 했다. 의미뿐만이 아니다. 방송국 선후배 사이로 나오는 박해일과 송하윤은 실제 취재 현장을 쫓아다니며 언론인의 생리를 익혔고, 출연 배우들이 전문가에게 생명공학 강의를 들으며 상당한 제반 지식을 쌓았다. 내용적으로 충실함을 기하면서 동시에 관객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다가가려 했던 것이다. 스릴러라는 장르적 특성에 어울릴 만큼, 긴장감 넘치는 음악과 배우들의 호흡도 돋보인다.  

실제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영화적으로 재구성된 픽션임을 강조하며 조심스러운 홍보 행보를 시작한 <제보자>지만 분명 임순례 감독의 장점이 십분 발휘된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간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우리 사회에 묵직한 메시지를 재미와 함께 잘 버무려왔던 인물아닌가. 연기와 흥행성이 담보된 배우들의 조합, 감독 특유의 주제의식을 만날 수 있다는 건 관객입장에서 큰 행운이다.

다만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당시 실제 방송을 만들어냈던 이들이 처한 현실은 또 어떠한가. 영화는 언론인의 현주소를 가늠하고, 윤리가 결여된 과학 만능 주의가 우리 안에 있는 괴물을 더욱 키워오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한다. 동시에 <제보자>는 강조한다. '언론은 진실을 전해야 하고,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국민의 몫'이라고.

스타가 된 황우석 박사를 광적으로 지지했던 것도 국민이고,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양심선언과 황 박사의 허구를 지적했던 젊은 과학도 역시 국민이다. 우리는 과연 이 나라의 어떤 국민으로 남을 것인가. 영화적 재미와 함께 간과하지 말아야할 물음이다.

 영화 <제보자>의 한 장면.

영화 <제보자>의 한 장면. ⓒ 영화사 수박


"소신 있는 분들이 희망을 얻고, 발언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유연석)

"<제보자>가 이제 개봉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그 과거의 이슈가 동일시되는 현상을 얘기하려는 건 아닌지요. 그 이후 언론은 어떻게 변해왔을까요. 변한 건 있을까요. 영화를 보고 판단하는 관객 분들의 몫입니다. 보신 분들이 조금이라도 생각하게 된다면 굉장히 만족할 거 같습니다." (박해일)

제보자 박해일 유연석 임순례 이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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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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