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들어가며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한국어본 책표지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한국어본 책표지
ⓒ 글항아리

관련사진보기

2013년 파리에 위치한 세이유 출판사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간행했다. 이듬해 2014년 하버드 대학에서 영역본을 간행했다. 그리고 출판사 '글항아리'에서 한국어판을 간행했다.

필자의 글은 외국의 학술서적이 우리 사회에 유통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적폐'를 '비판적 독자'의 관점에서 정리한 것이다. 최근 번역된 <21세기 자본>의 한국어본은 이런 비극적 현실을 집약적으로 응축하고 있는 사례다.

우리가 인용할 저본은 다음과 같으며, 순서대로 '원서'와 '영역본'으로 인용한다.

- Thomas Piketty, Le capital au XXIe siècle, Edition du Seuil, 2013. (표지 포함 976쪽)
- Thomas Piketty/Arthur Goldhammer(역), 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14년. (표지 포함 696쪽)

현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더욱 강화되고 있는 '부의 편중현상'을 방대한 자료들을 통해 실증적으로 밝혀낸 피케티의 저서가 우리말로 번역, 출간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반겨할 만한 일이다.

더군다나 우리 사회에 소개되는 다수의 해외 경제학 서적이 영어권 일색인 것을 감안하면 상업적 성공 여부에 개의치 않고 본 저서를 우리말로 출간하기로 결심한 출판사의 결정은 칭찬 받을 가치가 있다.

하지만 <21세기 자본>에 대한 한국의 모든 언론 보도나 서평은 모두 영어 번역본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이는 그 자체로 매우 한심한 상황이며 놀라운 일이다. 어느 독립국에서 번역본을 가지고 '학자'란 사람들이 서평을 하고, 일간지에서 번역본 표지를 사진으로 올리면서 책을 광고하겠는가?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그렇다.

하버드 대학 출판부에서 나왔고, 경제학 서적이니 어떤 언어로 번역한들 뭐가 문제이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서는 99%다. 과연 그런가? 그에 대한 답을 간략히 하기로 한다.

원서보다 280쪽 줄어든 영역본, 번역본으로 합당한가

한국어본 판권을 가진 '문학동네' 계열사인 '글항아리' 관계자는 "지난해 10월 판권계약을 했지만 이렇게 화제가 될 줄은 몰랐다"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프랑스어 원본 대신 하버드대에서 출간한 영어판을 번역할 예정이며, 철저한 감수를 받을 계획"이라고 했다(<한겨레> 2014.05.08).

여기에서 한국어본 <21세기 자본론>의 운명을 결정할, 아니 결정해 버린, 토마 피케티의 영역본이 학술 서적의 번역본으로 합당한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영어 번역본은 원서보다 280쪽이 줄어 들었다. 글자 크기가 작고, 각주(본문 하단에 주석을 다는 것)를 미주(책 마지막 부분에 주석을 모아 놓은 것)로 돌린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 하지만 문구와 주석의 상당 부분을 생략한 것 이외에도 문제는 더 있다.

1. 세부목차 번역 누락
영역본은 원서의 세부목차(소제목) 가운데 8곳을 번역하지 않았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505(319): Le monde du millime supérieur (최상위 천분(0.1%)의 세계)
524(362): L'illusion de la productivité marginale (한계생산성의 환영)
719(450): Capital et économie d'échelle (자본과 규모의 경제)
777(485): Méritocratie et oligarchie à l'université (대학의 능력주의와 과두제)
797(495): L'impôt progressif : un rôle localisé mais essentiel (누진세: 국지적이지만 필수적인 역할)
827(511): Identités nationales et performance économique (국가정체성과 경제성과)
856(526): Logique contributive, logique incitative (출자하는 논리, 격려하는 논리)
900(550): Création monétaire et capital national (통화설치와 내자)

한국어본은 이 가운데 5개는 번역을 하고, 3개(불어본: 505, 777, 856쪽)는 하지 않았다.

2. 주석 생략의 문제
원서 826쪽 각주 2는 영역본 14장 42번 미주다. 그런데 원서 각주의 2/3 가량을 삭제했다. 생략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L'écart de nombre d'heures s'explique par des congés plus longs et des semaines de travail plus courtes en Europe (l'écart de taux de chômage, quasiment inexistant si l'on compare les États-Unis à l'Allemagne ou aux pays nordiques, compte peu). Sans prétendre traiter ici de cette délicate question, on notera simplement que le choix consistant à passer moins de temps au travail lorsque l'on devient plus productif est au moins aussi justifié que le choix inverse. Qu'il me soit permis d'ajouter le point suivant : le fait que l'Allemagne et la France, en dépit d'un investissement beaucoup plus faible dans l'enseignement supérieur (et d'un système fiscalo-social effroyablement complexe, surtout en France), parviennent au même niveau de PIB par heure travaillée que les États-Unis est en soi miraculeux, et s'explique possiblement par un système éducatif primaire et secondaire plus égalitaire et plus inclusif."

한국어본은 이렇게 많이 생략된 부분을 원서를 대조하며 옮겼는가? 한국어본은 그저 영역본을 충실히 따르다 보니 이 부분을 당연히 생략했다.

3. 오기의 문제
영역본은 저자가 인용한 문헌의 쪽수를 오기했다. 원서 36쪽 각주 3번은 영역본 서론 17번 미주다. 그런데 원서에서 인용한 문헌의 쪽수는 26쪽인데, 영역본엔 28쪽이라고 오기했다. 이 부분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원서: «The future prospect of underdevelopped countries within the orbit of the free world.» Ibid., p. 26.;
영역본: "The future prospect of underdeveloped countries within the orbit of the free world"(28).

한국어본은 원서 '26쪽'이 아니라, 영역본을 충실히 따라서 '28쪽'으로 오기를 반복했으며, 심지어 괄호까지 동반하여 (28)로 표기했다. 영역본 주석에서 쪽수를 괄호로 처리한 것은 이 부분이 유일한데, 한국어판은 이마저 따라했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반면, 원서에 있는 'underdevelopped'는 오타이며, 영역본에 있는 'underdeveloped'이 옳은 표기다. 한국어판은 영역본을 따라가다보니 자연스럽게 원서의 오류가 수정됐다.

4. 시점 생략의 문제
1) 원서 802쪽 각주 1에는 종합소득세(IGR) 제정일(1914.07.15.)을 명시했다. 하지만 영역본 14장, 11번 주석에는 이를 삭제했다. 한국어본은 영역본을 충실히 따라서 종합소득세 제정일을 생략했다. 일일이 불어본과 영어본을 정직하게 대조했다면, 이런 일은 발생할 수 없다.

2) 원서 861쪽에는 부(富)연대세(ISF)가 적용된 시점(2013년)이 있는데, 영역본 15장 주석 26번에서는 생략했다. 한국어본 역시 부연대세 적용 시점을 생략했다. 일일이 불어본과 영어본을 대조했다는 글항아리의 주장에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5. 자의적 문장수정의 문제
원서 51쪽에는 "그림 I.1에 비친 첫 진화는, 1910년부터 2010년까지 미국 국부에서 소득계급 상위 10%의 몫에 따른 궤도를 나타낸다.(La première évolution, représentée sur le graphique I.1, indique la trajectoire suivie par la part du décile supérieur de la hiérarchie des revenus dans le revenu national américain au cours de la période 1910-2010)"라는 문장이 있다.

그런데 영역본 23쪽은 "그림 I.1에 비친 미국 곡선은, 1910년부터 2010년까지 미국 국부에서 소득계급 상위 10%의 몫을 나타낸다.(The US curve, shown in Figure I.1, indicates the share of the upper decile of the income hierarchy in US national income from 1910 to 2010"라고 했다.

즉 원서 "그림 I.1에 비친 첫 진화"라는 문구가 역서에는 "그림 I.1에 비친 미국 곡선"으로 둔갑한 것이다. 물론 그림 I.1은 미국의 소득 불평등을 나타낸 것이다. 이어서 원서 53쪽엔 "둘째 진화(La seconde évolution)"가 이어진다. 그런데 영역본 23쪽에서는 "첫째 진화"를 생략하고선, 25쪽에 "둘째 유형(The second pattern)이라고 옮겼다. 그럼 첫째는 어디에 있는가?

한국어본은 영역본을 따랐지만, "US(미국)"를 생략한 채로, 36쪽에 "도표 I.1의 곡선은"이라고 했다. "첫 진화"가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한국어본 37쪽에 "두 번째 패턴은"이라고 시작한다. 첫째는 사라지고, 둘째가 먼저 나온다. 본 저서의 한글 번역본을 수많은 독자들이 학수고대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러한 오류의 반복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6. 저자 특유의 표현 무시
1) 저자는 미국을 지칭할 때 "대서양 밖", 그리고 프랑스를 지칭할 때 "육각형"이란 표현을 쓰지만, 이를 영역본에서는 "미국(US)"과 "프랑스"로 옮겼다. 맛이 사라진 것이다. 이는 한국 저자들이 글을 쓰면서 '현해탄 건너편에 있는 나라'라고 표현한 것을 '일본'이라고 번역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2) 원서 17쪽과 19쪽엔 "연합왕국(Royaume-Uni)"이 3회 등장한다. 그런데 영역자는 브리튼(Britain, 영역본 2쪽), 잉글랜드(England, 3쪽),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 4쪽) 등 멋대로 옮겼다.

7. 영역자 아서 골드해머(Goldhammer)는 원서의 문단마저 바꾸는 오류(원서 574쪽; 역서 362쪽)를 범했다.

8. 번역자를 "장경덕 외 옮김"이라고만 했다. 실제 번역에 참가했지만, 그늘의 번역자로 남아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해야 한다.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결론을 대신하며

경제학 저서라고 영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어가 모든 이의 '모어'가 아닌 이상, '모국어'가 될 수 없으며, 언어가 인류의 소중한 자산인 이상 그렇게 되어서도 결코 아니 된다. "경제 또는 경제학은 영어면 그만이다"라고 믿는 것은 대한민국에서나 가능한 슬픈 이야기다.

이 책에 대해 언급한 평을 하거나 추천한 적이 있는 최장집, 정태인, 이강국, 이정우, 유종일, 이준구, 선대인 등 양심적 엘리트 가운데 <21세기 자본>의 원서에 대해 언급한 이는 한 명도 없고 모두가 영역본을 전제로 700쪽이라고 했다.

번역서는 번역서일 뿐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원서 지상주의'가 아니라, 저자의 의도를 옮기는 것은 '원서'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특이한 소수 부족어도 아니고, 영어 다음으로 국제기구에서 영향력이 강한 프랑스어로 된 서적 하나를 옮기지 못하고, 여럿이 나누어 영어본을 통한 중역을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이 글을 쓰는 이유다.

또한, 다수의 역자가 참가하고서도 영역본의 오류도 바로잡지 못한 것은 21세기 대한민국의 문명사적 수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비극이다.

글항아리 "피케티 의도 훼손 안하려 최선의 노력"
<21세기 자본> 한국어판 번역과 관련해 '글항아리' 측은 지난 5일 자사 블로그를 통해 "이번 한국어판은 조금이라도 빨리 한국 독자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고자 토마 피케티 교수와 세이유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영어판을 저본으로 삼아 번역했다"며 "번역을 마친 이후 3명의 프랑스어 전문가가 프랑스어판과 대조하여 프랑스어판과 영어판이 다를 경우 프랑스어판을 따랐다"고 밝혔다.

글항아리는 "저희는 피케티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고 독자들에게 온전히 전달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렇게 자부한다"며 "독자 여러분께서 직접 책을 읽고 판단해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글항아리(2014)


태그:#피케티, #21세기 자본, #중역, #오역
댓글28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6,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