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가끔 배우의 연기력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다. 부자연스러운 행동거지를 볼 때의 불편함이란 이루말 할 수 없다. 내가 해도 저것보다는 더 잘하겠다는 생각이 온통 머리를 뒤덮을 때도 있다. 사실 연기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닌데도 말이다.

'연기를 잘한다'고 느낄 때

첫째, 드라마가 한창 진행되고 나서 혹은 거의 끝나갈 무렵에서야 느끼는 것이 있다. '아, 정말 연기를 잘 하는 거였구나!' 이런 케이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연기에 대한 아무런 저항감이나 불편함 없이 보게 되는 경우이다.

배우의 캐릭터 싱크로 율이 100%에 이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연기인지 일상인지 모르고 지나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아! 정말 연기를 잘하는 구나'라고 감탄하는 것이다. 좋은 영화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일반적으로 연기를 잘한다고 하는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를 볼 때 가지는 느낌이다.

두 번째로는 극 도중 순간 순간에 깨닫는 것이다. 장면 장면을 보며, '와! 정말 연기 잘한다'고 감탄하는 것이다. 한국 배우 중에 '안내상'을 보며 처음 그런 느낌을 받았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냉혈한과 속없이 가족을 팽개치고 양아치 짓거리를 하는 극과 극의 연기를 볼 때 난 '정말 연기자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 보게 된 <루시>에서도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가 그랬다. 그간 왜 할리우드에서 젊은 여배우들이 끊임없이 탄생되며 대작급 영화들에 주연으로 캐스팅되는 지를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허나 이번 <루시>를 보며 알게 되었다. 그녀의 연기력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루시>라는 캐릭터는 타 영화에 비해 좀 특이한 부분이 있는데, 초반의 루시란 캐릭터와 이후 진화해가는 루시에 대한 캐릭터가 상반되기 때문에 스칼렛 요한슨은 캐릭터 구축에 대해 상당히 고민을 했음직하다.

영화 <루시>의 스칼렛 요한슨 절대 악인 '미스터 장'에게 한 치도 밀리지 않는 포스를 풍긴다. 뇌용량의 사용치가 100%에 다가가며 인간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표정과 눈동자는 <트랜센던스>의 조니 뎁을 떠 올리게 한다. 역시 연기력을 먹고 사는 배우가 맞았다.

▲ 영화 <루시>의 스칼렛 요한슨 절대 악인 '미스터 장'에게 한 치도 밀리지 않는 포스를 풍긴다. 뇌용량의 사용치가 100%에 다가가며 인간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표정과 눈동자는 <트랜센던스>의 조니 뎁을 떠 올리게 한다. 역시 연기력을 먹고 사는 배우가 맞았다. ⓒ UPI 코리아


그렇다. 뇌용량의 사용치가 변하면서 연기가 달라지는 그 미세한 차이를 잘 표현해 냈다. 쌍권총을 들고 정면을 응시하며 걸어 나가는 장면이나 차 안에서 전화 주파수를 응시하며 음성 목록을 찾아내는 장면이라든지, 혹은 미스터 장의 머리에서 정보를 꺼내는 루시의 눈빛은 강렬하고 차가웠으며, 인간미를 느끼기 힘든 캐릭터를 정확하게 표현해 냈다.

물론 인간 뇌용량의 사용 퍼센트가 올라갈수록 감정보다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판단을 내린다는 영화의 전제가 과학적으로 검증이 되었는지는 알바가 아니지만, 영화의 설정된 주제에 맞게 연기가 제대로 빛을 보았던 것이다.

<루시>에서 말하는 뇌사용량에 따른 인간의 능력치 변화
▶ 10%, 인간의 평균 뇌사용량
▶ 24%, 신체의 완벽한 통제
▶ 40%, 모든 상황의 제어 가능
▶ 62%, 타인의 행동을 컨트롤
▶ 100%, 인간의 시공 한계를 뛰어넘는 끝을 모를 진화

영화 <루시>가 공개되며 좀 말이 많았던 부분이 있다. 인간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가진 뇌용량의 10% 정도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근거 없는 낭설이라는 것이다. 일간에 소개된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은 평생 뇌의 모든 부분을 100% 사용한다고 한다.

뇌의 영역마다 분출되는 인간의 감정과 기억, 언어능력, 행위 조절 등이 있는데, 이 부분적 영역이 수시로 작동되어 사용된다고 한다.  만약 뇌가 사용되지 않고 남아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은 도태된다는 것이다. 무엇이 정확한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나름대로 그 이야기도 설득력이 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리미트리스>나 <트랜센던스>를 떠 올리며 이 영화들로부터 일부분 차용을 해오지 않았을까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리미트리스>는 약물에 의해 능력치가 최대한으로 올라가도 기본적인 인간적 특성은 변하지 않는다.

자신의 사업과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감정이 풍부한 주인공 그대로이다. 단지 그의 능력이 워낙 뛰어나 그를 제거하려는 어떤 시도도 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것. <트랜센던스>는 연구소의 벽면을 도배질한 조니 뎁의 얼굴과 리버브가 깊게 들어간 목소리 때문에 전 세계의 네트워크에 접속된 인간의 이성과 감성이 <루시>의 그것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허나 마구 흩트려 놓은 각각의 주제들을 성급하게 매듭짓는 감독 덕택에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라는 관객들의 불평이 있다.

지나친 교차편집은 관객에게 불편함을

지나친 교차편집과 수많은 장면의 삽입은 관객의 눈을 바쁘게 하지만 이해시키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영화 초반 노먼박사의 내레이션은 인류의 출발과 진화의 진행단계 안에서 인류가 인류에게 혹은 자연사에 남긴 패륜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중반과 종반부에도 루시와 노먼 박사의 대화에서 그치지 않는 과거와 현재의 교차 편집은 감독의 철학을 관객에게 이식시키기에 좋은 도구로 활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장면이 삽입되면서 편집과 짧은 컷의 반복은 좋은 철학적 주제를 난잡한 골목길에 내동댕이친 느낌이라 무척 아쉽다.

고고학자 도널드 요한슨이 발견했다는 320만년 전 '루시'는 영장류에서 분화한 최초의 여자 인류인 반면,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주인공 '루시'는 과학으로 찾아낸 새로운 형태의 최초 여자 인류이다. 게다가 인류의 진화가 가져오는 필연적인 폐해들에 대해 설명하다 과거의 루시와 현재의 루시가 만나는 장면은 이 두명의 루시에게 평행이론을 적용시켜 볼 수도 있는 좋은 안주거리이지만 속사포같은 편집은 관객에게 불편함만을 주고 지나갔다.

최민식의 '미스터 장', 모건 프리먼의 '노먼 박사', 형사역의 '아무르 웨이크' 주연인 스칼렛 요한슨을 제외한다면, 모건 프리먼이나 아무르 웨이크보다 최민식의 역할이 가장 독보적이다. 그의 연기에서 뿜어내는 존재감은 가장 강력했다.

▲ 최민식의 '미스터 장', 모건 프리먼의 '노먼 박사', 형사역의 '아무르 웨이크' 주연인 스칼렛 요한슨을 제외한다면, 모건 프리먼이나 아무르 웨이크보다 최민식의 역할이 가장 독보적이다. 그의 연기에서 뿜어내는 존재감은 가장 강력했다. ⓒ UPI 코리아


최민식의 연기는 일품이었으나 영어 대사와의 이질감은

스칼렛 요한슨을 영화의 원톱으로 둔다면 최민식이 분한 '미스터 장'은 '루시'에 대적하는 가장 비중이 큰 역할이다. 루시를 납치해 약품 밀수를 시도한 그는 노먼 박사역의 모건 프리먼이나 프랑스 형사인 아무르 웨이크드보다 강한 인상을 남기며 영화의 주요 라인을 형성하는 인물이다. 표정 하나는 정말 딱이다! 싶었다. 최민식의 진가가 여기서 나오는 구나 싶었다. 그런데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어 대사와 한국어 대사가 왠지 제대로 섞여지지 않고 겉도는 느낌은 뭘까?

절대 악역 미스터 장의 섬뜩하고 걸걸하면서 양아치 같은 한국어가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영어발음과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이다. 내가 한국인이라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서구인들에게는 생소한 한국어 발음이 자국의 언어와 엮이어 사건이 발생될 때는 감독의 의도가 제대로 드러난다고 볼 수 있기도 하겠다. 어쩌면 그들에게 한국어 대사가 자막 없이 처리된 이유가, 영어와 한국어의 묘한 이질감과 소통의 부재를 드러내기 위한 영화적 장치였다면 감독의 의도가 유효했다 볼 수도 있다.

존재는 시간이다

영화의 교차편집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류의 시원을 찾아가다 지구의 기원과 더 훨씬 먼 우주의 기원으로 올라가 버린다. 과학의 발전으로 탄생한 '루시'가 우주 최초의 순간을 기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시간'이다. 힌두교와 불교의 윤회사상을 이르는 연기론에 대해서 말이다.

시간이 없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루시의 입을 통해 그리고 노먼박사를 통해 이야기한다. 어쩌면 인류가 지금까지 이뤄온 모든 것, 그리고 우주와 지구의 탄생이 후 있어온 갖가지 초대형 사건들과 생명의 탄생 등은 시간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일 뿐이다.

존재론적인 질문에서 우리는 현대적 인식론과 신론을 떠올릴 수 있다. 현대 철학이 '실존'이라는 주제를 던지며 시작하였다는 것을 볼 때, 인류가 존재하며 벌인 반인륜적, 반사회적, 반 자연적 범죄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존'이라는 명제 안에서 모든 것은 타당성이 의심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상대적 믿음에 의해 당연시 되었다. 그러나 존재는 시간 안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루시가 컴퓨터를 흡수하고 실체가 사라졌을 때 우리는 그를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을 근거로 존재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주의 모든 것은 윤회한다. 즉, 우주의 모든 물질은 서로 형태를 바꾸어 가며 존재한다.

루시는 우주의 실체인 암흑물질로 변모했을 뿐이다. 루시 역시 시간 안에서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조차 일그러지며 변화한다는 것을 현대 과학으로 밝혀냈지만 아직도 시간이란 것은 우리에게 완벽한 존재이며, 태초의 나를 인식하도록 하고, 우리라는 공동체의 삶과 번영과 쇠락을 깨닫게 하는 움직이지 않는 벽이다.

덧붙이는 글 해당 글은 본인 블로그에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루시 스칼렛 요한슨 모건 프리먼 최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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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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