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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안성 보개면 적가리 마을 평생학습실. 칠판 하나와 책상 몇 개가 놏인 소소한 교실이다. 평소 예닐곱 명의 할머니가 배워 왔지만, 오늘은 세 분이 수업에 임하신다.

지금은 적가리마을 팔순할머니들의 편지삼매경 중이다. 그동안 배운 한글 실력으로는 편지를 혼자 쓸 수 없어서, 강사의 도움으로 받아 쓰고 있다.
▲ 편지 삼매경 지금은 적가리마을 팔순할머니들의 편지삼매경 중이다. 그동안 배운 한글 실력으로는 편지를 혼자 쓸 수 없어서, 강사의 도움으로 받아 쓰고 있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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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말은 잘하는디 글은 도통 못 쓴당게."
"아따, 안 온겨?"
"손님이 왔디야."
"근디 저짝도 안 보이네 그랴?"
"아, 그 이는 머리하러 갔디야."

오지 못한 할머니들의 근황을 강사(문해교육사 유선옥)보다 한 템포 일찍 자진 신고(?) 하신다. 강사는 미소 짓고 있을 뿐이다.

"아따. 나는 손자 보느라 공부를 제대로 못했는디 워쩐디야."

한 할머니의 엄살 아닌 엄살에 강사는 "괜찮아유, 못 허시니께 저 같은 사람이 필요하쥬"라며 분위기를 맞춘다. 가벼운 수다로 유쾌해진 교실에서 강사가 "어머니들, 오늘은 편지를 한 번 써 볼 텐데, 누구에게 쓰고 싶어요?"라고 묻는다.

할머니들은 일제히 "누구에게 쓴디야"라며 머리를 긁적인다. 한 할머니는 "편지를 쓰랑게 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쓴대유"하시며 편지를 대하는 할머니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그 할머니는 "난 말은 잘하는디, 쓰는 건 도통 몬헝게. 호호호"라고 하셨다. 순간 웃음 폭탄이 터진다. 이때 강사의 재치가 번뜩인다.

"말씀 잘해 주셨어유. 편지는 말하는 것처럼 쓰는 거에유."

할머니들이 "아~ 그런규"라며 깨달음의 신호를 보낸다. 

83세의 황복례 할머니가 글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 꼭 소녀 같다.
▲ 황복례 할머니 83세의 황복례 할머니가 글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 꼭 소녀 같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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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보다 며느리... 이유는?

"편지를 누구에게 써볼까요. 아드님들에게 써볼까요."

강사가 묻자 "아들은 무슨. 며느리에게 써야쥬"란다. 순간 할머니들의 진심이 피어오른다.

"지금 이 나이에도 며느리가 해준 밥을 먹고 있응게 얼매나 고마운지 몰러유."
"평생 쓸 줄 모르는 시어매가 며느리에게 편지 쓰면 월매나 좋것어."

할머니들은 아들보다 며느리에게 더 고마운 맘이 많았던 게다. "그런 며느리들이 있는 자신들은 행복한 사람"이라며 할머니들이 웃는다. 편지의 머리글이 정해졌다. "사랑하는 어멈에게"라고. 한 할머니가 "'며느리에게'라고 하면 안되쥬. 암만. 나이 먹은 며느리에게 편지 쓰는디 '어멈 에게'라고 혀야재"라고 의견을 내놨다.

안부 인사를 어떻게 시작할지 묻는 강사에게 "선상님, '가을'을 넣어서 인사해 봐유"라고 제안한 할머니. 그랬다. 할머니는 자신이 아는 글자를 넣어 안부를 묻고 싶었던 거다. 강사는 그 맘을 잘 알기에 얼른 "좋네유, '가을이 되어' 라고 시작하쥬"한다. 사실 "요즘 날씨가 낮엔 덥고 밤엔 추워서 감기 조심해야 한다"라고 하려다가, 글자가 쓰기 어려워 '가을이 되어 건강 조심해라' 정도로 줄인 게다.

"사실 한 집에서 맨날 보고 사는디 이렇게 인사 헐랑게 쑥스럽구먼."

다른 할머니가 말하자, 또 한바탕 서로 웃는다. "나는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단다"란 말도 넣자는 할머니들이 귀여워 보이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한글을 가르치는 강사 유선옥씨가 김매임(77)할머니의 틀린 글자를 수정해주려 지우개로 지우고 있다.
▲ 스승과 제자 한글을 가르치는 강사 유선옥씨가 김매임(77)할머니의 틀린 글자를 수정해주려 지우개로 지우고 있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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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서 어디 데려달란 말 못혀유."

강사가 "이번 10월에 있는 바우덕이 축제에 데려 달라 하시는 내용은 어때유"하자, 할머니들은 "워떻게 그려유. 미안해서 못혀유", " 난 원래 자식들에게 어디 가잔 말 안혀유", "그라고 할 것도 많어유. 고추도 따야 하고. 고구매도 캐야하고~"하고 작은 소동이 벌어진다.

그 맘을 반영해서 "축제에 데려 달라"고 하지 않고, "축제에 함께 가자꾸나"로 확정한다. 우리말은 '아'다르고, '어' 다르니까. 강사는 할머니들이 잘 못 쓴 게 있으면, 지우개로 지우면서 "어머니, 이건 아니고, '이'자에 'ㅆ' 받침이유"한다. 할머니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 잊어부럿어, 돌아서면 까 묵은 게 허허"하며 웃는다.

편지 내용이 3명 모두 똑같다. 우스운 상황이지만, 웃을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다. 젊은 사람이라면 5분 만에 받아 쓸 내용을 거의 1시간 넘게 걸려 썼다. 어깨 너머로 할머니들이 글을 쓰는 것을 보니 그럴 만도 하다.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쓴다. 한 마디로 참 잘 쓰신다.

뒷줄 유선옥강사, 앞 왼쪽부터 김부심(89) 할머니, 황복례(83)할머니,  김매임(77) 할머니다.
▲ 스승과제자들 뒷줄 유선옥강사, 앞 왼쪽부터 김부심(89) 할머니, 황복례(83)할머니, 김매임(77) 할머니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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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그렇겠는가. 평생 처음 써 보는 편지에 80년 진심을 담을 테니까. 그런 모습이 왠지 거룩해 보인다. 그렇게 수업이 끝났다. 김매임 할머니(77)는 "일전에 무뚝뚝한 아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써 줬더니 박수를 치며 좋아하대유"하셨다. 황복례(83) 할머니는 "며느리가 시집 온지 30년 만에 처음으로 편지 주니까 그렇게 좋아하대"란다. 끝으로 김부심 할머니(89)가"모여서 공부하는 게 월매나 좋은지 몰러유"하셨다. 할머니들이 소감 끝에 웃음을 터뜨리신다.

문희영씨 미니 인터뷰
안성 최초로 적가리마을이 평생 학습마을로 지정(경기도 평생교육진흥원 평생학습지원사업) 받아 지난해부터 문해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문희영씨(적가리마을 주민, 평생학습코디네이터)는 "한정된 예산으로 문해 교육 예산을 추가로 지원 받지 못해 올 하반기엔 다른 예산을 지원 받아 '학습동아리 형식'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할머니들의 한글 교육은 일시적으로 하면 안 된다, 지속적으로 해야 할머니들에게 효과가 있다"며 지속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했다. 교육은 총 10회 정도 이뤄질 예정이다. 



태그:#문해교육, #한글교육, #평생학습, #적가리마을, #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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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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