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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곳곳에서 시도때도 없이 만날수 있는 원숭이
 인도 곳곳에서 시도때도 없이 만날수 있는 원숭이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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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그로드 간즈(아래 맥간)에서의 이틀째. 새벽 다섯 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간이다. 인도에 온 지 일주일째로 접어들었다. 새벽 산책길을 나서기 위해 눈을 비벼가며 비좁은 숙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갑자기 쓰레기통이 우당탕 쓰려졌다. 내 방문 앞에는 커다란 쓰레기통이 놓여 있는데, 거기에 머리를 파묻고 먹거리를 찾고 있던 원숭이 녀석이 쓰레기통을 자빠뜨린 것이다. 녀석은 멀리 달아나지 않고 저만치 비켜서서 뭔가를 먹으며 재빨리 사진기를 들이대고 있는 나를 째려본다. 사고는 자신이 쳐놓고, 적반하장이다.

"어라?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질세라 나 또한 녀석을 째려본다.

"저리 안가!"

녀석이 성성한 이빨을 드러낸다.

"카~악!"

숙소 방문 앞에서 쓰레기통을 자빠트린 원숭이
 숙소 방문 앞에서 쓰레기통을 자빠트린 원숭이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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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경고음을 날린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송곳니가 날카롭다. 저 날카로운 이빨에 물렸다가는 십중팔구 병원 신세다. 델리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가 원숭이에게 물려 병원 신세를 졌다는 경험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녀석과 달리 꼬리도 없는 내가 먼저 꼬리를 내렸다. 원숭이보다 더 영악한 인간의 속임수다. 쓰레기통 옆에 세워져 있던 걸레 자루를 슬그머니 집어 들어 검객처럼 후려칠 자세를 취한다. 그때야 녀석이 꼬리를 내리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선다. 나는 쥐나 뱀을 제외한 거의 모든 동물을 좋아한다. 인간을 닮은 원숭이 또한 좋아한다. 그럼에도 살기 띤 눈빛으로 녀석을 위협한 이유는 뭘까.

녀석이 방어 본능으로 이빨을 드러냈듯이 나 또한 방어 본능으로 내면에 잠재돼 있던 살기가 솟구쳐 올랐던 것이다. 용기 있는 행동이라기보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 두려움이 내 안에 숨어있던 폭력성을 여지없이 돌출시켰다.

"마음 공부하러 산책길 나서는 인간이 원숭이나 위협하고 있다니..."

원숭이보다 더 동물적인 살기 가득한 나의 돌출 행동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마음을 진정시키며 게스트하우스가 즐비한 맥간에서 벗어나 '다람곳'으로 향하는 산책길로 접어들었다. 날이 밝아 오기 시작하는 산책길에는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얼마쯤 산책길을 따라 걸어가자 원숭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떼 지어 몰려 있다. 나는 녀석들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려대다가 잠시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멈춘다. 덩치 큰 놈들이 길가에 세워둔 자동차 위에 버젓이 누워 나를 꼬나보고 있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한적한 골목에서 삥 뜯는 깡패들처럼 건들건들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면 여지없이 송곳니를 내밀고 통행료를 요구할 그런 폼이다. 하지만 녀석들에게 상납할 바나나는 물론이고 과자 부스러기도 없다. 허리춤에는 여권과 돈, 어깨에 걸친 천 가방 속 지갑과 손에 들린 카메라가 전부다.

조금 전 숙소에서 걸레 자루로 쫓아 보냈던 원숭이와의 대치상황과 사뭇 다르다. 떼거리로 몰려있는 녀석들은 조폭 수준이다. 주변에는 막대기조차 없다. 막대기가 손에 들려 있다한들 소용없어 보인다. 녀석들과 시비가 붙어 떼거지로 달려들면 속수무책이다.

산책길을 점거하고 있는 원숭이들
 산책길을 점거하고 있는 원숭이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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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안 깔어!"

녀석들이 나를 째려보는 자세가 딱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나는 꼬리를 바싹 내리고 녀석들의 눈길을 피해 아주 천천히 얌전한 새색시처럼 다소곳이 지나친다. 녀석들이 점거하고 있는 길을 지나치자 새끼들은 어미 품 안에 바싹 안긴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녀석들 앞을 지나치자 녀석들 또한 온몸을 벅벅 긁어대며 딴전을 피운다. 두려운 것은 녀석들도 마찬가지다. 동물들에게 인간만큼 두려운 존재가 또 어디 있겠는가.

"네가 폭력성을 내려놓고 평화로운 마음과 자세를 취한다면 우리 또한 너를 두려워하거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등 뒤에서 녀석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산책길로 깊숙이 접어들 무렵 누군가 저만치에서 꾸부정하게 걸어오고 있다. 사람이다. 나는 천 가방에 든 카메라와 허리춤에 찬 전대를 떠올리며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원숭이 송곳니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의 흉기다. 인도 여행 안내서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절대로 혼자서, 그것도 인적 없는 산길을 나서지 말라 이르지 않았던가.

굶주린 얼굴로 손 내밀던 남자, 알고보니...

얼핏 내 나이 또래의 오십 대 중반 사내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허리가 힘없이 꺾여 있다. 옷차림도 나만큼이나 추레하다. 인도 사람이다. 그가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인도 사람이나 낯선 외국인을 만났을 때 건네는 인사말을 보낸다.

"나마스테!"
"나마스테..."

그가 들릴 듯 말릴 듯 작은 목소리로 응답하며 길 옆으로 비켜서서 나를 힐금힐금 쳐다보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친다. 나보다 그가 더 긴장한 눈치다. 인적없는 이른 아침 긴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 추레한 옷차림의 나를 만난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내가 길거리 원숭이들을 피해 걸었듯이 그도 그렇게 했다.

저만치 흰 눈에 덮여 있는 히말라야 봉우리가 쭉쭉 뻗어 있는 굵직한 나무들 사이로 언뜻 보인다. 나는 설산과 마주 앉아 아침 명상을 하기 위해 산 언덕길로 이어진 작은 오솔길로 향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겁도 없이 혼자서 아무도 없는 산길을 오르다니...'

하지만 조금 전 나를 두려워했던 중년 사내를 떠올려 보니 누군가에게는 내가 더 두려운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얼마쯤 걸어 올라가니 산에 홀로 떨어져 있는 서너 채의 게스트하우스가 보인다. 하지만 관광객 발걸음이 뜸한 비수기라 그런지 빈 집처럼 인기척 없이 썰렁하다. 게스트 하우스 옆 오솔길로 접어들려 하는데 조금 전 산책길에서 만났던 중년 사내가 게스트하우스 나무 울타리를 타고 넘어온다.

저 사내는 언제 이곳으로 왔을까.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또 다른 산길이 있는 모양이다. 사내는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 무척 당황한 표정으로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힌디어로 뭐라 뭐라 혼잣말하듯 말하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자동차 위에 퍼질러 누워 조폭처럼 나를 째려보았던 원숭이들
 자동차 위에 퍼질러 누워 조폭처럼 나를 째려보았던 원숭이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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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잠깐만요!"

영어로 그를 불러 세웠다. 그가 불안한 눈빛으로 멈춰 선다.

"영어 할 줄 아세요?"
"예스."
"저 반대편에 있는 히말라야 설산과 마주 볼 수 있는 길을 찾습니다. 이 산 길을 따라가면 정상에 오를 수 있나요?"
"예스."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온 나였기에 그 누구보다도 인도 농부들을 반드시 만나고 싶었다. 혹시나 싶어 물었다.

"혹시 농부세요?"
"예스."
"아, 그러세요. 나도 한국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농사는 어디에서 짓나요?'
"예스."

그는 내가 묻는 말에 무조건 예스로 대답한다. 영어를 거의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내가 이것저것 물어가며 호감을 보이자 배를 움켜쥐며 말한다.

"헝그리, 머니, 머니."
"배고프다고요?"
"예스."

그는 손을 내밀었다. 돈을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망설였다. 그가 만약 농부라면 이유 없이 돈을 주는 것은 결코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 노!"

나는 손을 내저으며 그가 내민 손을 거부했다. 그가 돌아서서 산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허리가 유난히 굽어 보였다. 어쩌면 그는 텅텅 비어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허기진 배를 채울 만한 먹거리를 찾아 헤맸던 것인지도 모른다. 집에서 먹거리를 기다리는 자식들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만치 힘없이 걸어가고 있는 그를 다시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나는 천 가방에 들어있던 지갑에서 백 루피를 꺼냈다. 오십 루피 정도 주려고 했는데 지갑에는 십 루피와 백 루피짜리만 있었다. 백 루피는 그에게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는 생각지도 않은 돈에 약간의 두려움으로 망설였다. 나는 손짓으로 그냥 거기에 있으라면서 내 발아래 돈을 놓고 저만치 뒤로 물러섰다. 그는 내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걸어와 돈을 집어 들고는 하늘을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힌디어로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거듭해서 내게 고맙다고 말한다.

"땡큐! 땡큐! 땡큐!"

쓰레기 뒤지는 원숭이.
 쓰레기 뒤지는 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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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와서 처음으로 적선한 돈이다. 인도로 향할 때 주변 사람들이 걸인들에게 적선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에 함부로 돈을 내밀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 적선하면 감당하기 힘들만큼 여러 사람이 우르르 몰려들어 손을 내민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지인처럼 생겨먹은 내 꼬라지 덕분에 내 앞에 손을 내미는 거지들은 거의 없었다.

나는 결국 설산과 마주 보고 명상을 할 만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산길을 내려와 숙소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가난한 농부를 도왔다는 생각에 내 마음은 이미 명상한 것이나 다름없이 평화가 스며있다.

맥간 쪽에서 아침 산책을 나선 여행객과 인도 사람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한다. 헌데 조금 전에 내가 돈을 주었던 그 중년의 인도 사내가 외국인들에게 접근해 손을 내밀고 있지 않은가. 그는 농부가 아니었다. 산책길을 어슬렁거리며 외국인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걸인이었다. 시장 한복판에서 손 내미는 걸인들과는 달리 한 차원 높은 걸인이었던 것이다. 배신감이 밀려들어 헛웃음이 나왔다.

터덜터덜 산책길을 되돌아오면서 배신감에 사로잡힌 내 자신을 바라봤다. 도움을 주고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편협하고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었다.

'그가 거지든 농부든 어떤 사람이든 무슨 상관인가. 베푸는데 무슨 조건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는 적어도 나보다 가난한 사람이 아닌가.'

이런 생각에 이르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숙소로 되돌아가는 길목. 맥간 근처 산책길 초입에서 만났던 원숭이들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쓰레기 더미 위에서 원숭이 한 마리가 홀로 남아 사방팔방 눈치를 살피며 성급히 쓰레기를 뒤적거리고 있다. 온갖 먹거리에 집착하는 인간의 모습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오히려 인간이 더하다. 아홉 개를 가지고도 한 개를 더 가져 열 개를 채우려는 인간들, 충분히 배부르면서도 좀 더 먹고자 한 개도 겨우 가진 가난한 사람들의 주머니까지 탈탈 털어가는 아귀나 다름없는 인간들도 있지 않은가.

쓰레기를 뒤지고 있는 원숭이의 눈빛은 그나마 남은 먹거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오히려 나를 두려워했던 중년의 걸인에게 뭔가를 뺏길까봐 두려움을 가졌던 나처럼. 나의 두려움은 쓰레기를 뒤지고 있는 저 원숭이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인도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걸인과 원숭이는 낯선 만남에 대한 경외심보다는 두려움을 가졌던 나 자신을 훤히 비춰준 거울과 같았다.

맥간에서 다람곳으로 향하는 산책길에서 만난 히말라야 설산
 맥간에서 다람곳으로 향하는 산책길에서 만난 히말라야 설산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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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원숭이, #두려움, #걸인, #적선, #탐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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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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