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알혼섬에서 맞이하는 바이칼의 일출
 알혼섬에서 맞이하는 바이칼의 일출
ⓒ 정수현

관련사진보기


날이 밝았다. 찬란히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다.

'시원(始原)'의 이야기를 간직한 바이칼 알혼 섬에서 아름다운 일출을 보며, 마치 태초의 빛을 맞이하는 듯한 감동에 젖는다. 바이칼과 알혼 섬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부르한 바위와 그 주변의 풍광이다. 유명세가 있는 곳이다 보니 어제 여기를 둘러볼 때는 정말 개미떼처럼 사람들이 부르한 바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사진 찍는 건 몰라도, 장엄한 자연과 역사의 숨결을 조용히 감상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았다. 다행히 우리가 머문 숙소에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여서, 새벽녘 조금 부지런을 떨어 다시 이곳을 찾았다. 조용한 아침, 성스러운 자연의 자태에 푹 빠져본다.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부르한 바위 주변의 장승. 수많은 이들의 염원을 휘감고 우뚝 서있다.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부르한 바위 주변의 장승. 수많은 이들의 염원을 휘감고 우뚝 서있다.
ⓒ 정수현

관련사진보기


부르한 바위. 징기스칸이 여기에 묻혔다는 전설도 있다.
 부르한 바위. 징기스칸이 여기에 묻혔다는 전설도 있다.
ⓒ 정수현

관련사진보기


부르한 바위를 주변에는 우리 장승과 비슷해 보이는 나무 조형물이 우뚝 서 있다. 마땅한 명칭이 떠오르지 않아 장승이라 표현했다. 장승뿐 아니라 주변 나무에도 색색의 천이 휘감겨 있다. 부르한 바위 곳곳에는 어느 나라 말인지 식별하기 어려운 글자와 문양이 그려져 있다. 여기가 왜 샤머니즘의 고향인가를 확인하는 상징들이다.

장승과 나무, 바위 곳곳에 사람들은 어떤 바람들을 새겼을까? 종교, 주술적 의미를 배제하고 샤먼이라는 존재를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자라고 정의하면, 사실 우리 모두는 샤먼이 아닌가?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딛고, 꿈과 이상이라는 하늘을 향해 머리를 둔 채 가슴 열어 두 팔을 벌린... 어제와 오늘 아침 만났던 수많은 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돗자리 깔고 명상을 하던 독일인 단체 여행객, 나의 독사진을 찍어 준 중국인 아저씨, 오토바이 타고 온 러시아의 청춘 남녀... 그들은 어떤 소망을 이곳에 새기고 돌아갔을까? 장엄한 기운이 가득한 곳에 있다 보니 내 머릿속에도 소원들이 빗줄기처럼 스쳐 간다. 만약 하늘이 단 하나의 소원만 들어준다면 무엇을 남기겠는가? 나는 '평화' 두 글자를 선택했다.

알혼섬 최북단에서 위치한 사랑바위. 알혼섬에서 가장 넓은 수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알혼섬 최북단에서 위치한 사랑바위. 알혼섬에서 가장 넓은 수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정수현

관련사진보기


알혼 섬은 제주도의 절반 정도의 크기라고 한다. 섬 주변을 걸어 일주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여행객은 러시아 군용 자동차인 우와직을 이용한다. 물론 여기 있는 차량은 2차 세계대전 때나 탔을 법한 그야말로 '똥차'다. 에어컨은 고사하고 기름 냄새가 짙게 새어 나오고, 깨진 유리창에 좌석도 불편하기 그지없지만 알혼 섬의 비포장 도로를 달리려면 이 정도의 투박함이 안성맞춤이려니 한다.

자본주의 서비스 정신이 체질화되지 않은 러시아 사람들의 까칠함은 운전기사 아저씨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흔들리는 차에 매미처럼 매달려 있는 승객들의 모습에 전혀 개의치 않고 먼지를 흩날리며 질주한다. 엉덩이가 자리에서 붕~붕~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다.

우와직 4륜 구동차 내부 모습
 우와직 4륜 구동차 내부 모습
ⓒ 정수현

관련사진보기


넓은 땅, 넓은 하늘... 통일을 꿈꿨다

알혼 섬에 들어 오면 필수 코스처럼 먹어 보는 음식이 '오물'이다.  우리나라 말로 생각하고 읽으면 좀 거시기한데... 바이칼 호수에서 주로 낚이는 생선이다. 고등어처럼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섬 투어 중간 차에서 내려 쉬는 시간을 길게 가지는 사이, 운전기사가 즉석에서 요리를 해서 점심 식사로 내준다.

가볼 만한 여행지라고 방송을 타면 우리 나라 두메산골도 몸살을 앓기 마련이다. 즉, 시베리아의 진주로 불리는 바이칼과 알혼 섬이 개발되지 않길 바란다는 것은 부질없는 희망일 터이다. 내년이면 알혼 섬에도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깔린단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아오고, 얼마나 더 많은 편의시설이 생겨나게 될까. 난개발로 태초의 신비로운 생명력을 간직한 이곳이 상처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바지선을 타고 육지로 나왔다.

운전기사가 고객을 위해 오물로 점심 요리를 준비하는 모습
 운전기사가 고객을 위해 오물로 점심 요리를 준비하는 모습
ⓒ 정수현

관련사진보기


오물과 감자를 주재료로 해서 만든 국. 크게 비리지 않고 담백한 맛이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오물과 감자를 주재료로 해서 만든 국. 크게 비리지 않고 담백한 맛이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 정수현

관련사진보기


마지막 행선지 이르쿠츠크 외곽 앙가라 강 주변에 있는 바냐 체험장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바이칼은 300여 개의 강이 흘러들어 가지만, 나오는 물줄기는 오직 하나 앙가라 강뿐이다. 앙가라 강가에 앉아 잠시 사색에 잠겨본다.

지난밤 알혼 섬에서 우리 일행은 여행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한 명씩 돌아가며 일 주일 남짓한 몽골-바이칼 여행에 대한 소회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가지 얘기는 빠지지 않았다. 하나는 넓은 대륙을 보니 분단된 한반도 이남 조그만 땅에서 아웅다웅 다투며 사는 우리 현실이 참 안타깝게 느껴진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연장선상에서 떠올린 통일에 대한 염원이었다.

알혼섬의 비포장 도로를 차량들이 먼지를 휘날리며 달린다.
 알혼섬의 비포장 도로를 차량들이 먼지를 휘날리며 달린다.
ⓒ 정수현

관련사진보기


어디가 물이고 어디가 하늘인가? 바이칼의 청명함을 가슴에 품고 다시 육지로 나온다.
 어디가 물이고 어디가 하늘인가? 바이칼의 청명함을 가슴에 품고 다시 육지로 나온다.
ⓒ 정수현

관련사진보기


사실 우리에게 운명처럼 받아 들여지도록 세뇌받은 '반도'라는 말은 일제가 만들어낸 축소지향적 개념이 아닌던가. 우리 선조들은 만주와 연해주, 시베리아를 삶의 터전과 가능성의 공간으로 삼고 살았다. 삼면은 바다요, 한 면은 철조망에 갇힌 '분단의 섬'에 살면서 공간, 시간적으로 상상력이 알게 모르게 많이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 여행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통일이 되면 부산에서 열차를 타고 런던까지 갈 수 있다'는 즐거운 상상, 그 상상이 굉장히 가까운 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는데... 근래 몇 년 사이에 금강산과 개성 가는 길조차 막혀 버린 답답한 현실에 한숨이 나온다.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길을 내고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7세기 돌궐의 명장 돈유쿠크의 비문이다. 유목민의 개방적 사고를 잘 보여준다. 유목민은 모든 것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생각이나 말, 행동도 제약이 따르거나 틀에 갇히면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 부패로부터 새로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의식에서부터 비롯한다.

인류의 먼 조상은 원래 유목민이 아니었나. 우리 영혼은 지구라는 별을 여행하다 가는 유목민이 아닌가. 몽골의 푸른 초원, 시베리아 벌판의 하얀 자작나무, 바이칼의 파란 물결과 너른 품,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 그리고 대륙을 힘차게 달린 기차...

한여름의 행복했던 여행은 여기서 끝났지만 나는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시·공간의 벽을 깨고, 내 의식과 상상을 끝없이 끝없이 자유로이 흘러가게 할 것이다.

바이칼이 유일하게 흘러나오는 물줄기 앙가라강. 해질녘 강가에 앉아 자작나무숲을 바라본다.
 바이칼이 유일하게 흘러나오는 물줄기 앙가라강. 해질녘 강가에 앉아 자작나무숲을 바라본다.
ⓒ 정수현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몽골-바이칼 철도인문기행'을 기획한 (사)희망래일과 소중한 추억을 함께 한 여행 동료분들, 그리고 볼품없는 일곱 편의 여행기를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태그:#바이칼, #알혼섬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