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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생이었을 때, 매일 친구 두어 명을 집에 데리고 왔다. 간식을 먹고, 한 30분 놀고 있으면 친구 엄마로부터 호출 전화가 걸려왔다. 학원에 가야 하니, 빨리 돌아오라는 전화였다. 그렇게 하나 둘씩 서둘러 가고 나면 한 시간도 채 안돼서 내 아이는 혼자 남았다.

우리가 어렸을 때, 친구랑 놀고 싶을 때는 친구 집에 가서 "미경아, 놀~자!"하며 친구를 부르고는 했다. 그러나 내 딸은 친구와 놀고 싶을 때 "수빈아, 놀 수 있어?"라고 물었다. 노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던 우리 어린 시절과는 다르다. 피아노, 태권도는 기본이며 영어, 수학 학원까지 너무나 바쁜 일정 속에서 살아가는 딸아이의 친구들을 보며, "어린 아이가 이렇게 바쁘게 스케줄에 쫓겨 살아도 되는 것일까"하고 의심스러웠다.

또 한편으로는, 정말 내 아이만 이렇게 놀아도 되나 걱정이 드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여기저기 부모 교육도 찾아다니고 양육과 관련된 책도 읽어 보았지만, 걸핏하면 자기 자식 얘기로 빠져 버리는 강사들, 드라마틱한 다른 아이의 성공사례는 들을 때만 재미있을 뿐 돌아서면 공허해졌다.

등대지기 학교 첫 수강, 많은 것을 배웠다

지난 2008년 여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창립소식을 듣게 됐다. 8주 간의 학부모 교육 '등대지기 학교'는 여타의 부모 교육과는 달랐다. 구체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접근이 있어 보였다. 1년 가까이 기다린 끝에 2009년 봄 등대지기 학교 2기를 등록했다. 그 당시의 마음은 오직 '사교육 걱정'을 끝내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등대지기 학교를 다니는 두 달 여 동안, '아이의 공부'라는 당면한 현실 속에서 실질적으로 엄마가 어떤 접근 방식을 가져야하는지 배웠다. 그리고 우리나라 교육문제에 대한 대안까지 폭넓은 시각을 접할 수 있었다.

지금은 널리 알려졌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아시아의 소수 몇 나라에만 있는 제도에 대해 전혀 몰랐었다. 이범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서야 학교에서 시험을 보면 한 줄로 등수를 매기고, 고등학교에서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는 제도가 특수 케이스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우리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시스템이 전세계적으로 보면 전혀 보편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신선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아이에게 무언가를 자꾸 지시하기보다 아이의 행동을 관찰하고 잘 적어두라"는 신을진 선생님의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꼭 필요한 지침이다. "부모는 자식을 지적하는 사람이기보다, 내 아이가 좋아하는 것과 잘 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알맞은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었다.

'이우학교'의 교장인 이수광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날 밤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해가 갈수록 더욱 끔찍해지는 이 경쟁체제 아래에서 어떻게 하면 내 아이가 공공선을 위해 마음을 쓸 수 있는 아이로 자랄 수 있을까. 가야할 길은 멀고, '나'라는 엄마와 내 아이가 처한 환경은 너무나 허술한 울타리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내가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라는 교육운동 단체가 현실적인 제도와 정책을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문제를 개선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 변화는 피부로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외국어고등학교의 입시제도가 획기적으로 개선됐고, 일상에서 느끼는 변화들도 종종 있었다. 학교시험에 있어서도 선행학습이 요구되는 시험문제는 출제되지 않도록 관리감독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 아이가 치르는 시험은 과거의 기출문제처럼 심하게 어렵지 않았다. 아이가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 친구들이 '정석'을 가지고 다니며 푼다는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했었는데, 2014년 초에는 드디어 선행교육 규제법이 제정됐다.

5년 전, 등대지기학교를 졸업하고 만난 가까운 지역 엄마들과의 모임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그 전까지 아이 친구 엄마들과의 모임은 학원 정보를 나누거나,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와 선생님에 대한 불만사항 접수처 같았다. 반면에 등대 지역 모임에서 만난 분들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과 방향이 통하는 점이 많았다. 이 엄마들과의 모임이야말로 망망대해에 떠 있는 등대와 같다.

교육계에는 아직 희망이 남아있다

딸아이는 오는 2015년, 고등학생이 된다. 세상의 수많은 일들 중에 내 뜻대로 되는 것은 많지 않지만, 자식 키우는 일이야말로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루하루 절감하며 산다. 그런 요즘, 이번 가을에도 등대지기 학교에 수강 신청을 했다. 나는 등대지기 학교를 통해 무엇보다 아이의 행복이 성적과 학벌로 결정된다는 미신에서 벗어났다. 아이가 타고난 적성을 찾을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준다면 아이는 얼마든지 스스로 삶을 잘 살아갈 거라는 믿음도 갖게 됐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어른들이 함께 힘쓰고 있다는 사실을, 작더라도 소중한 변화의 실체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등대의 불빛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

2014 등대지기 학교 포스터
 2014 등대지기 학교 포스터
ⓒ 사교육걱정없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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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 학교란?
등대지기 학교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매해 전국에 있는 부모와 교사 400여 명과 함께 사교육 걱정을 줄이며 교육의 대안을 찾아나서는 교육 강좌이다. 올해는 7회 강좌로 진행된다. 입시 경쟁의 거대한 고통이 어떻게 부모와 자녀들을 잠식해가고 있는지를 진단하며, 그 고통으로부터 아이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어떤 일들을 해야 할지 새로운 길을 찾아나간다.

7주 간의 여정에 김찬호 문화인류학자, 이승욱 <대한민국 부모> 저자, 서화숙 한국일보 선임기자, 전성은 전(前) 거창고등학교 교장, 안상진 사교육정책대안연구소 부소장, 강지원 타고난적성찾기국민실천본부 대표,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 등이 참여한다고 하니 이번 등대지기 학교도 놓치지 않아야 할 필수 부모 교육이다. 오는 17일 개강하며, 온오프라인으로 강좌를 시청할 수 있어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신청은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인터넷 카페에서 가능하다.



태그:#교육, #양육, #등대지기학교, #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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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교육하면서 의도하지 않았던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깨닫고 성찰하는 부모들과 새로운 길을 암중모색,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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