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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일은 한국 시민사회에 의미있는 날이다. 1994년 그날 한국의 대표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창립했다. 그로부터 20년 참여연대는 한국 사회 발전의 순간을 함께해왔다고 평가받는다. <오마이뉴스>는 참여연대와 공동으로 참여연대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보고 미래를 전망해 본다. [편집자말]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후배가 묻고 선배가 답하다' 형식의 대담을 마친 참여연대 창립 멤버이자 사무처장을 지낸 김기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새내기 간사들에게 큰 꿈을 향해 열정과 패기로 전진해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며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후배가 묻고 선배가 답하다' 형식의 대담을 마친 참여연대 창립 멤버이자 사무처장을 지낸 김기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새내기 간사들에게 큰 꿈을 향해 열정과 패기로 전진해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며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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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간격의 선·후배가 한 자리에 모였다. 후배는 현재의 고민을 털어놨고 선배는 후배에게 거침없이 조언했다. 20년이라는 간극은 선배가 들려주는 뒷이야기와 시민운동과 정치의 관계, 세월호 정국 해법을 이야기하면서 점점 좁혀져 갔다. 어색했던 사람들은 자리가 끝난 뒤 서로 어깨를 겯었다.

참여연대 20주년을 맞아 '후배가 묻고 선배가 답하다'는 형식의 대담이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통인동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선배는 참여연대 창립 멤버이자 사무처장을 지낸 김기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후배로는 지난 4월 입사한 새내기, 이영아 시민참여팀 간사와 김태일 참여사회연구소 간사가 초대됐다. 사회는 이재근 정책기획팀장이 맡았다.

후배는 운동권 세대가 아닌 그들에게 필요한 자질을, 선배는 겁 없이 도전하고 끊임없이 상상하라고 조언했다. 또 후배는 참여연대와 정치의 관계 설정을 고민했고 선배는 정파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라고 주문했다.

다음은 그들이 나눈 대담을 정리한 것이다.

"참여연대, 조직갈등 거의 겪지 않고 성장"


사회(이재근 팀장) : "창립 20년을 맞아 생생한 창립 배경과 그 뒷이야기, 또 신입 간사들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자리를 만들었다. 옛날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참여연대 창립 당시 세 주체가 있었다. 어떤 분들이, 어떻게 결합하게 됐나."

김기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아래 김) : "나 같은 학생운동 출신의 운동가 그룹, 박원순 서울시장(당시 변호사)을 중심으로 한 인권변호사 그룹, 조희연 서울시교육감(당시 성공회대 교수)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학자 등 세 그룹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로고를 만들고 보니 세 그룹이 어깨동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했고 90년대 초반에는 진보적 시민운동을 생각하고 있었다. 같이 학생 운동을 하다가 직장인이 된 동료를 모아서 '참여 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인연합', 줄여서 '참사연'을 만들고 연남동에 사무실을 얻었다. 그게 93년 9월이었다. 운동가들은 데모하는 능력이 있지만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를 찾아갔다. 이런 고민을 얘기했더니 당시 조희연 교수와 박원순 변호사를 소개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생면부지였다.

무작정 찾아가서 만났다. 조희연 교수는 진보적인 학자들 중심으로 일종의 진보적 포럼을 구성하려고 했고, 박원순 변호사는 법률을 무기로 해서 적극적으로 사회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변화를 찾으려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의기투합을 했고 94년도 초부터 준비 모임을 시작했다. 준비 모임은 참사연 사무실에서 열렸고 그해 7월에 준비위원회를 만들고. 정확히 94년 9월 10일에 창립식을 했다. 그 당시 이름이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였다.

김태일 간사(아래 태) : "오늘은 의원님, 대신 선배님으로 부르면 되죠?(웃음) 선배님, 세 그룹 사이에 마찰이 있었을텐데 어떻게 해결했는지 궁금하다."

: "단체 명칭에 관한 논쟁 외에는 대체로 합의를 봤다. 참여연대 성공 요인 중 하나가 모든 일을 할 때 정책 대안, 법적 대응, 시민 행동 등 세 가지 방법론이다. 변호사는 소송, 전문가는 정책 대안, 운동 세대는 시민 운동에 각각 장점이 있어서 지금의 참여연대를 가능하게 했던 것 같다.

이영아 간사(아래 영) : "세 그룹은 색깔이 분명했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초기 단계에서 겪었던 우여곡절, 혹은 재밌는 일화가 있다면?"

: "창립 당시 명칭이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 16자였다. 당시 단체 명칭을 만드는 데 16시간을 논쟁했다. 그게 불과 4개월 만에 '참여민주사회를 위한 시민연대'로 바뀌었다.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내부적으로 단체 명칭을 정확하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웃음) 쓸데없이 16시간 논쟁했던 것을 씁쓸하게 회상하곤 한다.

마찰보다는 세 그룹은 다양성을 존중했던 것 같다. 다른 차이를 존중하면서 그 안에서 합리적 토론을 거친다는 내부 문화가 잘 만들어졌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참여연대는 일부 시민단체가 겪었던 조직갈등을 거의 겪지 않고 성장했다."

: "창립 당시에 회원이 400명 정도 됐다. 시작 단계에서 400명을 모았다는 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하다."

: "기본적으로 참사연이라는 단체에 회원 100여 명이 있었다. 참여연대를 만든다고 하니까 학자들도 많이 참여했다. 학자가 100여 명, 변호사들 30여 명이 모였다. 창립하니까 자기 주변 끌어오면서 400명 가까이 만들었다. 무에서 유가 만들어진 게 아니고 기존의 참사연과 학자 그룹, 변호사 그룹을 통해서 모였다. 초기부터 규모가 있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도덕적 결벽성에 빠져 인프라 구축에 소극"

사회 : "김 의원은 처음부터 정책기획부장이었다. 그 다음에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사무처장을 맡았다. 그 시절을 얘기해보자."

: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참사연을 만들 때가 27살이고 참여연대 때는 28살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어린 나이에 이 단체를 만들자고 찾아 다녔을까' 싶다. 그때 박 변호사와 조희연 교수가 저보다 10년 위였다. 그리고 2000년 총선에서 낙선·낙천운동을 했을 때가 서른 네살, 사무처장은 서른 여섯 살에 했다.

처장 되기 전에도 정부 부처의 국장들을 만나고 다녔다. 관료 사회의 핵심 인사들을 만났다. 어려서부터 핵심 관료를 상대했던 경험이 젊은 나이에 동세대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겪게 했다. 나에게는 큰 자산이 됐다. 사람이라는 게 경험하는 만큼 세상을 이해하는 폭과 깊이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참여연대가 개인에게도 내 나이 때에 가질 수 없는 경험을 하게 해서 나를 성장시켰다. 굉장히 고맙게 생각한다."

사회 : "처장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운동이 있었다면? 처장을 하던 노무현 정부 시기가 시민운동 분야에서 침체됐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 "참여연대 17년 생활동안 다 행복했다고 기억한다. 다만 처장 하면서 참여연대가 지속가능성의 측면에서 여러 고민들이 필요했다. 특히 물적 기반을 안정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업적으로 보면 1997년 경제 위기 이후에 먹고사는 일이 힘들어졌다.

전체 시민운동의 아쉬운 점인데,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시민사회가 도덕적 결벽성에 빠져서 인프라 구축에 소극적이었다. 시민교육센터같은 시민사회 풀뿌리 토대를 강화하는 하드웨어를 깔았어야 했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한데, 단체 운영비도 부족한 상황에서 공적 지원을 통해서 인프라를 만들었어야 했다. 참여연대는 정부 보조 안 받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 이후로 보수 정부가 들어선 뒤에 보니 시민사회 토대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때 시민운동을 '50년은 길게 생각했어야 하지 않았나'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사회 : "후배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 "내가 참여연대 있을 때 신입간사 교육에 들어가서 마지막 교육에서 맨 마지막에 하는 얘기가 두 가지다. 하나는 사고를 많이 쳐라, 겁 없이 일을 해라다.

사람이 아는 만큼, 경험하는 만큼 상상한다. 예를 들어서 적도에 사는 사람은 눈을 모르니까 눈 덮인 산을 상상할 수 없다. 아는 범위 내에서 상상할 수밖에 없다. 겁 없이 부딪히고 그로 인해 생기는 실패를 공부해야 한다. 경험하는 만큼 상상한다. 또 상상하는 만큼 꿈을 꾼다. 꿈을 꾸는만큼 또 현실이 된다. 일을 할 때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상상해봐야 한다. 그 상상력 속에 창조력이 나오고 열정이 나온다.

참여연대는 전문성이 강하다보니까 신입 간사들이 주눅드는 경우가 있다. 사실, 사람들이 역량의 90%는 집중력이다. 역량은 지적인 능력이 아니라 자기의 에너지를 얼마만큼 쏟아부을 수 있느냐에 결정된다. 물론 천재적이고 기발하고 뛰어난 인간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역량은 곧 집중력이다. 일을 하면서 자기 에너지를 얼마나 집중하느냐가 중요하다."

사회 : "후배가 선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학생 운동을 했던 선배들과 현재 활동가 사이에 세대차가 있다. 저희들은 소명이 있거나 세상을 크게 바꾸겠다는 뜻보다는 내가 좋아서, 재밌어서 활동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점에서 선배들과 부딪히는 점들도 있다. 세대가 바뀌니까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갈등을 어떻게 해야할까."

: "개인적인 열정을 찾는 게 중요하다. 우리 세대는 시대적 과제가 있었다. 나는 광주민주화운동 때문에 학생운동을 했고 전태일 열사 때문에 노동운동을 했다. 우리 세대 80~90%가 그랬다. 시대가 나를 운동하게 한 것이다. 참여연대를 만든 것도 내가 하고 싶은 운동 때문에 만든 것이다.

지금은 시대적 과제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자기 내면의 열정을 끄집어 내야 한다. 참여연대 간사 각자가 자기 나름 시민운동을 하는 이유와 꿈을 갖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내적으로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상상과 꿈을 이야기한 것이다. 절대로 일을 열심히 한다고 생겨나지 않는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하다보면 열정이 생기는 것이다."

[스무살 참여연대②-2] "새정치연합은 수를 내지 않는 게 수"


태그:#참여연대 20주년, #김기식 의원, #조희연, #박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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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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