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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호두나무집 할머니는 열여덟에 가나한 집안에 시집와서 시아버지가 내어준 겉보리 3말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시부모에게 받은 재산, 고작 겉보리 3말로 결혼 생활을 시작하여 1남4녀의 자식을 낳아서 키웠다.

할머니의 남편은 일찍 세상을 등지고 혼자서 자식들을 키우며 품값을 받고 남의 밭일을 하며 5남매를 키웠다. 할머니는 살림을 알뜰히 하고 열심히 살아온 덕에 자식들 장성시키고 조그만 시골집을 살 수 있었다. 할머니는 그 집을 사는 날 기념으로 마당에 호두나무를 심었다.

  시골집 비밀의 정원에서 수확하는 복분자 열매입니다.
 시골집 비밀의 정원에서 수확하는 복분자 열매입니다.
ⓒ 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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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호두나무집 할머니를 만난 곳은 당시 삼성이 들어오기 전 포도가 유명했던 아산시 탕정면이었다. 2002년도에 나는 그 곳에서 인생 제 2막을 펼치며 5살 11살 아이들을 데리고 장사를 시작했다. 큰 아이 아기 때부터 이웃 아주머니의 부탁으로 공부방을 하게 되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영어 점수가 형편없다고 공부 좀 가르쳐 주면 아기 옷값을 주겠다는 이웃 아주머니의 말에 귀가 솔깃하여 시작한 영어 공부방이 입소문을 타고 흘러 10년 동안 영어 공부방 선생노릇을 하게 되었다.

아기에게 우유병 물려가며 시작한 공부방으로 10년간 모은 돈 5천만 원으로 언젠가 나도 내 집 마련을 하겠다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내 인생에도 회오리바람이 몰아닥치는 바람에 내집 마련 꿈을 잠시 접고 오천만 원으로 전셋집을 얻고 직장을 다닐까 했지만 아직 아아들이 어려서 맡길 곳이 없었다.

       시골집 텃밭에서 캐는 고들빼기
 시골집 텃밭에서 캐는 고들빼기
ⓒ 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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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지역신문을 유심히 보다가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조그만 레스토랑을 내놓았는데 내가 가진 돈이랑 얼추 비슷해서 찾아가 보았다. 통 유리창이 있고 한 모퉁이에는 드럼, 전자기타, 키보드 오르간이 있는 라이브 무대가 설치되어 있는 조그만 레스토랑이었다.

가계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곳에 월세 30원 자리 17평 아파트를 얻어놓고 아이들을 돌보며 가계를 시작했다. 언젠가 내 집 마련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전세 얻을 돈 5천만 원으로 IMF 때 망한 조그만 레스토랑를 구했다. 망한 가계라는 것을 계약금을 미리 지불하고 알게되어 걱정이 되었지만 이미 호랑이 굴에 들어간 상태라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일념으로 눈 부릅뜨고 전쟁터와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유난히 다리가 짧고 덧니가 귀여운 시골집 강아지
 유난히 다리가 짧고 덧니가 귀여운 시골집 강아지
ⓒ 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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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하는 와중에도 가끔 나는 심신을 달래고 아이들 정서를 위해 아파트 근처 동산에 있는 작은 암자로 산책을 다녔다. 어느 날 동네를 지나가는데 하얀 백발의 할머니가 큰 톱으로 밭둑에 있는 큰 나무를 자르고 계셨다. 연로한 노인이 큰 나무를 톱으로 자르는 모습이 신기하여 다가가서 말을 걸었고 절반 정도 자른 나무를 내가 대신 잘라드리게 되었다.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고 하셨다. 천여평정 되는 밭 옆에 허름한 시골집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할머니가 일군 대파와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할머니는 내가 사는 홍익아파트 2층 같은 라인에 살며 틈 나는 대로 아파트 인근 남의 밭을 얻어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할머니는 17평 아파트에 혼자 살며 남의 밭을 얻어서 채소를 심고 밭에서 거둔 채소를 온양 장날에 내어다 팔아서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시골집 정원에 피는 키다리 국화
 시골집 정원에 피는 키다리 국화
ⓒ 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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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할머니는 하얀 광목으로 만든 보자기에 많은 물건을 담은 등짐을 어깨에 지고 아파트 문을 나서고 계셨다. 할머니는 일주일 한번씩 버스를 2번 갈아타고 천안직산에 사는 손주 손녀에게 먹을 음식을 갖다 주러 가셨다. 팔순노인은 밭에서 거둔 채소를 내다 팔아서 그 돈으로 고기를 사고 밑반찬을 준비하여 고등학교에 다니는 손주 손녀를 돌보고 사셨다.

아들이 사업실패로 이혼을 하는 바람에 할머니가 대신 아이들을 돌보고 살았는데 할머니가 사는 아파트가 좁고 아이들 학교 문제로 따로 떨어져 살고 있었다. 아들은 다른 여인과 살림을 차린 후에 자기자식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할머니는 늘 걱정 하셨다.

    아기고양이가 화분에 올라가 볼일을 보네요.
 아기고양이가 화분에 올라가 볼일을 보네요.
ⓒ 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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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추운 겨울날 할머니댁을 방문했는데 아파트 바닥은 차가워서 까치발을 들고 다녀야했다. 할머니는 난방비 아낀다고 보일러를 끄고 조그만 전기장판에 의지해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방 한쪽 구석에는 소주병에 담긴 들기름 3병과 할머니가 이빨로 까서 씨앗을 빼고 말렸다는 산수유가 있었다. 밖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서 노인들이 걸어 다니기에는 위험한데도 할머니는 장날에 버스를 타고 들기름 3병과 산수유를 내다 팔러 가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할머니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들기름 2병을 샀다.

      장미꽃 피는 시골집
 장미꽃 피는 시골집
ⓒ 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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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자신의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내게 털어 놓았다. 시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은 고작 겉보리 3말이었지만 할머니의 억척스런 삶으로 아이들 키웠고 조그만 시골집을 샀다. 아들이 운수사업 한다고 할머니 집을 은행에 저당 잡히고 이곳 작은 아파트를 월세로 얻어주었다고 한다.

아들 사업이 잘 안되어 할머니 집은 은행으로 넘어갔고 아들 며느리는 이혼을 한 이후에 자기 자식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했다. 할머니가 몇번이나 전화를 걸어 아들보고 자식들 돌보라고 간곡히 당부했지만 그러지 않는다고 하며 아들에게 "내가 죽고 없어야 너희들이 정신 차리고 네 자식들 돌보고 살겠니?" 라고 호통을 치셨다고 했다.

    시골집 텃밭의 딸기를 땄어요.
 시골집 텃밭의 딸기를 땄어요.
ⓒ 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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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삼성회사가 들어와서 번화가 되어버린 그 곳에 있던 할머니 소유였던 그 호두나무집을 기억한다. 아담한 담장너머로 탐스럽게 열린 호두나무의 열매에 눈길이 가던 그 집을 쳐다보며 부러워 했었다.

언젠가 나도 저런 집을 사게 되면 마당에 호두나무를 심겠다고 내집마련 꿈을 키워주던 그 호두나무집이 할머니의 행복의 보금자리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호두나무집은 아산 탕정시로 승격되면서 도시개발로 헐어지고 어느 돈 많은 사람의 손에 팔려서 건물이 들어서고 일층에는 다방이 들어섰다. 10년이 지난후에 가끔 그곳으르 가게 되면 그 건물을 볼 때마다 내집 마련의 꿈을 키웠던 그시절, 그 호두나무집과 비운의 할머니가 떠오른다.

     시골집 텃밭에서 재배한 채소들로 만든 음식입니다.
 시골집 텃밭에서 재배한 채소들로 만든 음식입니다.
ⓒ 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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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할머니가 일하는 밭을 지나가는 길에 허름한 시골집을 기웃거리는데 마침 할머니가 밭일을 끝내고 수돗가에서 웃옷을 벗고 씻고 계셨다. 80살 노인의 단단한 근육 속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쩜 저렇게 노인의 몸이 탄력있고 풍만한지 얼마나 육체단련을 하고 사셨길래 노인의 몸이 젊은 사람보다도 더 근육질로 탄력이 넘쳐났다. 얼굴 주름살과 백발을 제외하면 보디빌더 같았다. 할머니는 손짓을 하시더니 마당에 묻어 놓은 여러 개의 항아리 뚜껑을 열어 젖히며 먹어 보라고 손으로 알타리 김치를 주셨다. 덕분에 나는 김치와 된장을 조금 샀다. 할머니는 젊어서부터 밭일로 다져진 단단한 체력을 갖고 계셔서 농사지은 채소를 온양 장날에 내다 팔아서 손자손녀를 돌보며 살았다.

   시골집 앵두
 시골집 앵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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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부터 여름에는 할머니의 일터인 밭에서 만났고 겨울에는 같은 아파트의 통로에 사는 할머니를 가끔 찾았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연말이라 장사한다고 바빠서 할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어느날 할머니의 안부가 궁금해서 찾아가서 대문을 두드렸지만 조용했다. 할머니가 손자손녀를 만나러 갔나 보다 했는데 이삼일 후 아침에 아파트 복도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내다보았더니 할머니 가족들이 할머니집 대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곧이어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열쇠집 아저씨가 와서 강제로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런, 일났다. 일났어." 그 집 가족인듯 한 남자가 소리를 지르고 가족들이 우르러 들어갔다. 이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얼른 들여다 보았더니 할머니는 거실에서 구부린 채로 옆으로 쓰러져 누워 계셨다.

      시골집에 강아지 12마리가 탄생 했어요.
 시골집에 강아지 12마리가 탄생 했어요.
ⓒ 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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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유난히도 추운 겨울날 할머니는 이승의 생명줄을 스스로 끊고 먼 여행을 떠나셨다. 그대로 사셨으면 백세를 넘길 수 있는 건강한 채력을 가지셨는데도 현실의 아픔을 홀로 견디기가 힘겨워셨던 것 같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여고에 다니는 손녀가 학교를 안 가고 가출을 하는 바람에 할머니의 상심이 크셨다고 한다.

아들이 사업한다고 어머니가 평생을 바쳐 마련한 호두나무집을 은행에 저당 잡혀 결국은 집을 잃어 버리게 되었다. 그 후 아들은 이혼하고 다른 여인과 살림을 차린 후에 자기자식들인 손자손녀를 안 돌본다고 걱정하던 할머니는 그 모든 인생 고난에도 꿋꿋히 살았다. 할머니는 남의 밭을 얻어 채소를 길러 팔아서 손자 손녀를 돌보던 고단한 삶에 결국 손녀의 가출이라는 절망 앞에서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국가경제의 위기와 가정의 해체 그리고 사회적 혼란이라는 시대적인 절망 앞에서 어쩔수 없었나 보다.

   시골집에서 수확한 오디와 보리수열매
 시골집에서 수확한 오디와 보리수열매
ⓒ 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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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나무집 할머니는 한일합방이라는 나라 잃은 슬픔과 6.25 전쟁이라는 동족 상잔의 비극에도 겉보리 서말로 시작한 억척스런 삶으로 내집 마련을 했다. 하지만, IMF 라는 국가 경제위기와 카드대란의 희생자인 아들로 인해 젊음을 바쳐 마련한 할머니의 꿈인 호두나무집을 잃었다.

집 잃고 가정의 해체를 겪던 노년의 삶은 손녀가 방황하는 모습 앞에서는 어떤 희망도 가질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시대적인 큰 회오리 바람 앞에서 속수무책인 사람들이 결국은 마지막 남은 생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국가가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담보로 하지 않는 국가 경제를 책임지고 서민들이 이런 슬픔을 겪지 않는 시대로 흘러갔으면 한다.


태그:#세입자, #호두나무집 할머니, #시골집, #강아지, #텃밭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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