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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여름, 군 입대를 위해 학교를 휴학했다. 반 년 정도 영장을 기다려야 했다. 입학 직후부터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당장 살 곳을 찾아야 했다. 친한 선배 하나가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친구가 기거하는 주방 쪽방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던 학과 형이었다. 함께 지내자고 했다. 마침 홀 서빙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고 했다.

서울 서초동 한복판에 있던 그곳은 '청'자가 들어간 아름다운 이름을 달고 있었다. 인근의 강남 졸부들이 즐겨 찾는, 작지만 고급스러운 식당이었다. 쪽방은 건장한 이십대 청년 셋이 지내기에는 턱없이 좁았다. 그래도 갈 곳 없는 촌놈들이 한 몸 눕히기엔 충분했다.

레스토랑 이름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한 여자를 만났다. 그곳 지하 룸살롱에서 일하는 '밤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이른 저녁을 먹거나 단골 손님이 찾아올 때 내가 일하는 곳에서 음식을 주문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눈부신 그녀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런 나를 보며 그녀는 미소만 지었다. 행복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녀를 '누나'로 불렀다. 충청도 남쪽의 먼 도시에서 온 그녀는 27살, 전라도 촌놈인 나는 21살이었다. 모두 빛나는 청춘의 한 모퉁이를 돌아나가고 있었다.

그해 12월 19일 자로 입영 날짜가 찍힌 통지서가 도착했다. 쪽방에서 짐을 챙겨 떠날 준비를 했다. 어느 날 그녀가 찾아왔다. 손에 무언가를 쥐어 주었다. 그즈음 막 유행하기 시작한 터보형 가스라이터였다. 라이터 선물은 '첫사랑'의 의미가 있는데…. 가슴이 쿵쿵쿵 뛰었다.

첫 휴가를 나와 한달음에 그녀를 찾아갔다. 두어 번 편지를 주고받은 뒤였다. 그녀는 그새 떠나고 없었다. 몸이 안 좋아져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독한 술과 담배가 그녀의 몸을 가만 놔두었을 리 없다. 입대 전, 그녀가 준 라이터를 아는 형에게 맡긴 데 대한 '벌'이었을까. 그녀를 찾아가자 마음만 먹다 첫 휴가를 끝내고 말았다. 짧은 인연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우여곡절 끝에 선배 방에서 시작한 더부살이

서울시내 한 쪽방촌의 모습
 서울시내 한 쪽방촌의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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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후 복학한 해는 1992년이었다. 시기를 놓쳐 기숙사 입사원서를 내지 못했다. 졸지에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다. 겨우 학비를 마련해 등록을 마친 내 손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간신히 학교 정문 앞 골목에 있는 허름한 고시원 방을 구해 들어갔다. 세 평이 채 안 되는 좁은 곳이었다. 큰누나가 사준 손바닥 만한 전기장판 하나로 그해 겨울을 보냈다.

그뒤 1년은 기숙사에서 지냈다. 감방같던 고시원에 비하면 기숙사 방은 호텔이었다. 하지만 4학년이 되면서 퇴사해야 했다. 졸업 학년에게 입사를 제한하는 내부 규정 때문이었다. 방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쉽지 않았다. 학교에서 가깝고, 부엌 등이 딸린 나름대로 번듯한 방은 보증금 200만 원 이상이 기본이었다. 여전히 내 손엔 돈 한 푼 들려 있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한 선배 방에 더부살이를 하게 됐다. 대문이 본채 지붕보다 높은 곳에 있어 계단 열댓 개를 걸어 내려서야 마당에 이르는 집. 친구들은 그곳에 '마당 깊은 집'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시청 공무원이던 주인 아저씨는 포마드 기름 바른 머리를 늘 가지런히 하고 다니던 멋쟁이였다. 주인 아주머니는 주먹 만한 개성식 만두나 커다란 닭 백숙을 준비해 우리를 부르시곤 했다. 가난한 대학생들이라며 챙겨주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마당 깊은 집'을 나와 들어간 집은 그 맞은편의 또 다른 달동네에 있었다. 서울 상도동 달동네들 중에서도 길이 가파르기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부엌도 없는 방은 불편했으나 가난한 내겐 딱 맞았다. 보증금 100만 원에 매달 10만 원만 내면 되었다.

집은 묵은 게딱지처럼 낮고 칙칙했다. 담벼락엔 금이 가고 본채는 한쪽으로 기울었다. 마당만 일없이 넓고 길었다. 비탈진 골목길 옆으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시피 한 녹슨 철문 안쪽에는 '종말'이라 불린 조그만 개 한 마리가 있었다. 드나드는 친구들이 다정다감한 한 선배 이름에 빗대 붙여준 이름이었다.

집주인은 남편을 여의고 홀로 되신 오십대 후반의 아주머니셨다. 주인 아주머니는 말하자면 일종의 프리랜서 요리사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이 없는 날이 훨씬 더 많았다. 50대면 적지 않은 나이다. 내세울 만한 화려한 경력도 없었다. 살림이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비 오던 봄날 저녁이 떠오른다. 종말이의 다정한 환대를 받으며 대문에 들어설 때였다. 청승맞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 마루에 소주병 두어 개가 뒹굴고 있었다.

손짓하는 주인 아주머니 앞에 가 앉았다. 죽은 남편과 말 안 듣는 자식들 얘기를 들려 주셨다. 목소리가 떨렸다. 힘든 생활을 하며 가까스로 일군 집과, 언제 헐릴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그 집을 위태롭게 지켜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셨다. 그즈음 서울의 달동네에는 서서히 재개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처연한 신세 한탄은 아주머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 나는 돈 한 푼 없이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는 이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어떻게 살아가나. 이 한 몸 어디에 눕혀야 하나. 미래는 흑막 뒤에 숨어 어떤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다. 취직과 진학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가진 것 하나 없고 무기력하기만 한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이십대 중반, 그 빛나는 청춘의 한복판에서 나는 좌표를 잃고 비틀거리는 인생 낙오자가 된 듯했다.

다섯 쪽방 식구들이 함께 썼던 수도꼭지

그즈음 나는 거의 매일 악착같이 술을 마셨다. 어느 희부윰한 새벽녘이었다. 동기 두엇과 밤새 술을 마신 뒤였다. 알근한 주기를 못 이긴 채 새근덕거리며 골목길을 올랐다. 맵고 쓴 겨울 도시의 칼 같은 바람이 가시고, 그 저열한 골목에도 한철 찾아오는 갖가지 향긋한 기운들이 무시로 휘돌아가며 드나드는 봄날이었다.

휘청거리며 골목을 오르는 내 눈에 어느 사이엔가 엉버틈한 두 건물의 벽채 사이로 위태로이 서 있는 나무 하나가 들어왔다. 라일락이었다. 연보랏빛 보드레한 꽃송이를 매단 가지가 길 쪽으로 휘늘어져 훈훈한 봄밤의 미풍에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허물어지듯 잦바듬히 주저앉았다. 벽채에 등을 기댔다. 몸에 있는 온갖 구멍으로 라일락의 시릿하면서 달보드레한 향기가 파고들었다. 내뿜는 담배 연기가 진한 라일락 향기와 함께 코를 하비었다.

문득 목젖이 부르르 떨렸다. 좁은 골목의 하수구를 뚫고 올라 온 배릿한 냄새가 콧속을 후볐다. 목구멍이 울컥 했다. 몸속에 있는 것들이 모조리 목을 타고 올라왔다. 몸을 뚫고 들어온 온갖 냄새와 향기가, 위액에 섞인 핏물과 함께 목을 치고 죄다 되올라올 때까지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눈물이 그렁거렸다.

한참 뒤 고개를 들었다. 불씨가 살아 있는 담배가 여전히 두 손가락 사이에 쥐여 있었다. 손가락이 뜨거웠다. 화들짝 놀랐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살아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잡다한 생각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그뒤로도 기나긴 시간을 고심했다. 그러다 진학을 결정하고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원 생활 역시 고난의 연속이었다. 첫 자리엔 늘 주거 문제가 있었다. 부르주아의 한가로운 관심사일 게 분명한 '의식주(衣食住)' 문제가, 영락 없는 프롤레타리아인 내겐 '주식의(住食衣)'의 생존 이야기가 되었다.

신길동의 손바닥 만한 쪽방과 바람 서리 불편한 구로동 옥탑방을 거쳤다. 대학원 마지막 해에는 학교 앞 재래시장 초입 건물에 딸린 지하 셋방과 인연을 맺었다. 원래부터 설계가 그랬을까. 3층짜리 건물 지하 중앙에 널따란 마당(?)을 만들고 그 둘레에 쪽방을 들인 구조가 기묘한 곳이었다.

쪽방은 모두 다섯이었다. 그 다섯 방 식구들이 수도꼭지 하나 달랑 서 있는 수돗가를 함께 썼다. 화장실 역시 공용이었다. 놀랍게도, 화장실 바로 옆에 공사장용 합판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문을 달아 놓은 샤워실이 있었다.

쪽방이 다섯이나 되다 보니 화장실과 샤워실은 눈 앞의 떡일 때가 많았다. 갑자기 뒤가 급해지는 아침이 있었다. 화장실 앞엔 사람 두엇이 서성거린다. 그때마다 근처 사는 후배 자췻집이나 1층의 상가 화장실로 튀었다. 샤워실은 뜨거운 보일러 물이 다 떨어진 후에야 내 차지가 되곤 했다.

한겨울에도 곰팡이 포자가 비산할 정도로 방은 습했다. 머리 위 골목에서는 자전거 체인과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며 패싸움을 벌이던 10대 무리들이 한밤을 공포(!)로 덜덜 떨게 만들었다.

그런 살벌한 곳에서 쪽방 주인들은 각자의 아름다운 밤을 만들어갔다. 늦은 밤, 풀리지 않는 학위논문을 붙잡고 씨름하는 내 옆에서 그들은 진짜 사랑의 '역사'를 일궜다. '밤의 역사'를 창조하며 내는 그들의 숨 가쁜 소리는 전혀 다른 창조를 위해 머리를 쥐어뜯던 내게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곳에서 200쪽이 넘는 논문이 탄생했다. 자유롭게 내 한 몸 눕힐 방 한 칸만 있다면, 그곳이 어떤 곳이 되었든 내 할 일을 뜨겁게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곰팡내 나는 더럽고 초라한 곳일지라도 그곳을 드나들며 내게 끊임없이 힘을 준 선배와 동기와 후배들 덕분이었다.

'사람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그립다

내 곁을 우연히 스쳐간 수많은 집을 떠올린다. 이런저런 이유로 고향을 떠나온 여느 평범하고 가난한 도회인처럼, 몸뚱아리 하나 내려놓을 방 하나를 찾기 위해 서울 이곳저곳을 헐떡이며 돌아다녔다. 한강의 남북과 동서로 난 길들이 두루 나와 함께했다. 그 길들을 걸으며 때론 살아가는 일에 가슴을 치고, 때론 살아내야 하는 일에 입술을 감쳐물었다.

수많은 집과 방들에서 청춘을 보냈다. 중학교 2학년 2학기 때부터 집을 나와 자취를 시작했다. 아버지와 함께 수레에 싣고 간 나무로 밥을 지어 먹으면서 고교 입시 준비를 했다. 고입시가 대입시보다 더 뜨거웠던 전라도의 어느 비평준화 지역이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사글세방에서 자취생으로 지냈다.

내 청춘의 20여 년이 그렇게 흘러갔다. 힘겨웠다. 산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살아내야 하는 고행인지 모른다. 사람이 밟아가는 '생애(生涯)'가 그렇지 않은가. 바람처럼 찾아오는 우연 속에서 우리는 느닷없이 삶의 벼랑[涯]에 내몰린다. 마치 운명처럼.

나도 그랬을까. 다행히 그때마다 벼랑에서 나를 잡아준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손은 대가가 없었다. 소박하고 진실했다. 가난과 궁핍으로 힘들어했던 나에게 그들은 귀한 들무새였다. 나를 낳은 건 부모였으나 나의 청춘을 키운 건 팔 할이 그 '사람의 힘'이었다.

모든 게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이다. 서울같은 대도시에는 이제 '마당 깊은 집'이나 종말이네 같은 곳은 거의 없다. 세 든 고학생을 불러 닭 백숙을 먹이고, 귀한 음식을 만들어 내주는 주인 또한 만나기 힘들 것이다. '마당 깊은 집'과 종말이네가 있던 곳엔 고급스러운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지 오래다.

변치 않은 게 있긴 하다. 진한 라일락 향기가 코를 하비던 어느 봄날, 술에 젖어 절망의 나날을 보낸 나처럼 하루하루 힘겹게 보내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 시절을 '사람의 힘'으로 견뎠다. 그 '사람의 힘'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지금, 그들은 과연 어디에서 힘을 얻고 있을까. 변치 않고 사라지지도 말아야 할 '사람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그립다.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공모 글입니다.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태그:#'나는 세입자다', #자취생, #'주식의'와 '의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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