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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로 답사는 동산파출소 자리, 즉 1919년 <대구 3·1운동 발원지 표지석>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1919년 3월 8일, 당시 대구사람들은 이곳에서 모여 대구경찰서(현재 중부경찰서)까지 간 다음, 다시 종로를 거쳐 대구부청(대구백화점)으로 행진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따라서 표지석에서 출발하여 중부경찰서 쪽으로 나아가자는 말은 '대구3·1운동로'를 따라가며 서문로를 걷자는 뜻이 된다.

 오른쪽에 무영당 건물(부산비닐상사), 왼쪽에 기남상사가 보인다. 달서문 표지석에서 찍은 사진이다.
 오른쪽에 무영당 건물(부산비닐상사), 왼쪽에 기남상사가 보인다. 달서문 표지석에서 찍은 사진이다.
ⓒ 추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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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20년 12월 9일 천황당지라는 못을 메운 곳으로 서문시장을 옮겨버린다. 그들은 동산파출소 터 일대, 즉 3·1운동의 역사가 서려 있는 서문시장이 싫었다. 그래서 일제는 대구사람들이 서문시장에 모여 1919년의 독립만세를 회상하면서 민족 의지를 드높이는 일을 막기 위해 아예 시장의 자리를 현재 위치로 옮겨버렸던 것이다.

 왼쪽에 중부경찰서, 오른쪽에 대구근대역사관이 보이는 풍경. 이 두 건물 앞의 작은 네거리가 대구 최초의 십자로.
 왼쪽에 중부경찰서, 오른쪽에 대구근대역사관이 보이는 풍경. 이 두 건물 앞의 작은 네거리가 대구 최초의 십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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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최초의 소방서였던 대구소방서 자리에 지금은 서문로소방서가 새로 세워졌다.
 대구 최초의 소방서였던 대구소방서 자리에 지금은 서문로소방서가 새로 세워졌다.
ⓒ 추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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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표지석에는 '대구 3·1독립운동은 1919년 3월 8일 오후 2시 큰장 입구에서(표지석 주변) 장날에 모인 군중을 향해 이만집과 김태련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침으로써 시작되었다'라고 새겨져 있다. 

표지석을 떠나면 곧장 회색빛 고색창연한 느낌이 예사롭지 않은 건물 한 채가 왼쪽에 나타난다. 1974년부터 서성로교회 교육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대구 최초의 문학회인 <죽순(竹筍)문학회>가 태동했다.

죽순문학회가 이 건물에서 태동한 것은 이윤수 시인이 명금당이라는 시계점을 해방 직후 이곳에서 운영했기 때문이다. 이윤수, 모윤숙, 이응창, 박목월 등이 활동했던 죽순문학회는 1946년 5월 1일 <죽순> 창간호를 내었고, 지금도 상화시인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대구3.1운동 표지석
 대구3.1운동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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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로교회 교육관은 대구 최대의 포목상 김성재가 1935년에 취득했던 건물이다. 대구 전체 상인을 다 합한 것보다도 더 많은 포목 거래량을 자랑한 거상 김성재는 현재 계성중학교 건물로 사용되는 성재관을 1947년에 지어 기증한 인물이기도 하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면, 역시 지금은 서성로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김성재 고택도 볼 수 있다.

한때 한일은행 서지점 자리였던 건물(현재 덕영치과 사용)을 오른쪽에 두고 달서문 터를 향해 나아간다. 이내 서성로가 길을 가로막는다. 대구읍성의 서쪽 성벽이 있던 자리는 차량이 줄지어 달려가는 큰 도로로 변신해 있다. 1906년 이전에는 대구의 서쪽을 상징하는 달서문이었지만 지금은 횡단보도도 없어 사람은 건널 수 없는 길이 되고 말았다.

'대구부성 달서문터 이곳은 대구부성의 달서문이 있던 자리입니다'가 새겨진 달서문 표지석은 남영사우나 건물 모서리의 자투리땅에 세워져 있다. 이 건물은 한국인들이 1913년에 설립한 대구은행의 본점 용도로 1920년 지어졌다.

 서성로교회 교육관
 서성로교회 교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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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서문 표지석
 달서문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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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서문 표지석에서 경삼감영 방향을 바라본다. 오른쪽에 부산비닐상사 5층 건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1937년 지어진 이 5층 건물은 순수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식민지 시대의 백화점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건물 옥상에 올라 대구 시내 전경을 감상했다고 한다. 개성상인 이근무가 운영한 무영당은 일제가 판매 및 구독을 금지한 책까지 당대 지식인들에게 비밀리에 구해주었다. 그러나 무영당은 해방 이후 폐점했고, 이근무는 창씨개명을 한 채 대구상공회의소 간부로 활동하는 등의 이력 때문에 친일인사로 분류되고 있다.

무영당 건물 맞은편에도 대구의 오랜 향토 기업이 자리 잡고 있다. 1956년 포정동 무궁화백화점 맞은편에서 창업한 문구도매업 기남상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런가 하면, 서문로 1가 50번지 기남상사 바로옆의 51번지는 해방 이후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실현되었을 때 생겨난 수많은 단체 중 하나인 대구시 부인연맹의 둥지로 전해진다. 조금 뒤에 나타나는 대구과학상사(23번지)도 1960년에 창업된 오랜 향토기업으로 대구가 섬유산업으로 이름을 떨쳤던 시대를 증언해주는 화공약품 도매상사이다.

십자로를 향해 천천히 걷는다. 이내 종로초등학교 입구가 나타난다. 학교 정문은 서문로 소방파출소 옆으로 나 있다. 서문로 소방파출소 자리는 1910년 대구 최초의 소방서인 대구소방서가 설립되었던 곳이다. 이 때 높이 21.5m의 망루도 함께 설치되었는데(1928년 30m로 증축) 1978년 헐려버렸다. 이 망루가 지금 남아 있다면 좋은 볼거리가 되었을 텐데 정말 아쉬운 일이다.

소방서 맞은편도 대구 최초의 그 무엇이 있었던 자리이다. 1907년, 인천에 이어 경성, 평양, 대구에 측후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달인 4월부터 명칭이 통감부관측소로 바뀌면서 업무와 권한도 모두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종로초 정문 맞은편의 강제위안부기념관 건축 지점 뒤편에서 만경관극장 사이의 주차장 자리가 바로 기상대가 있던 곳이다. 기상대는 1916년 남산동 적십자병원 뒤편으로 옮겨갔다가 1936년 다시 신암동으로 이전되었다.

 위안부역사관이 지어질 자리로 종로초등학교 정문 바로앞이다.
 위안부역사관이 지어질 자리로 종로초등학교 정문 바로앞이다.
ⓒ 추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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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초등학교 안에는 '최제우 나무'라 이름 붙여진 수령 400년 정도 된 회화나무가 있다. 이 나무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은 동학 교주 최제우가 (종로초등학교 뒤편의 서소문 동쪽과 공북문 남쪽에 각각 있던) 경삼감영 감옥에서 끌려 나와 1864년 3월 10일 아미산 관덕정 아래(동아쇼핑센터 주차장 출구 일원 추정)에서 처형된 데에 착안한 결과이다. 경상감영 관아 앞에서 자라고 있던 이 회화나무가 아마도 최제우가 감옥에서 끌려 나와 처형장으로 이동되는 장면을 지켜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는 말이다. 

1900년, 선교사 아담스가 아소예배당(제일교회) 내에 대남소학교를 열었다. 대구 최초의 사립학교였다. 약전골목 희도맨션 자리에서 시작된 이 학교는 1926년 희도보통학교로 발전했고, 1954년에는 일본인 전문 학교로 1917년 개교한 종로초등학교(대구본정공립심성소학교)를 인수한다. 그 뒤 1955년에는 희도국민학교에서 종로국민학교로 개명한다. 종로초등학교는 대남소학교가 문을 연 1900년을 기점으로 삼아 2000년에 개교 100주년 행사를 열었다.

종로초에서 경상감영 쪽으로 걸으면 작은 네거리가 나타난다. 1909년 개통된 이 네거리는 대구 최초의 십자로라는 역사를 지녔다. 이 네거리에서 직진하면 대구근대역사관과 경상감영을 보게 되고, 우회전하면 종로와 진골목을 거쳐 약전골목을 거닐게 된다. 좌회전하면 대안동과 향촌동에 서려 있는 과거의 영화를 감상하게 된다. 어느 길로 갈까? 그것은 나그네의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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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동학연구회 <모심과 섬김> 대표, <대구경북 역사문화유산답사여행 길잡이> (대구의 길을 걷다 )저자, 도보여행가,향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