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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

가을이다. 흔히들 가을은 조락(凋落)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이는 풀이나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짐을 말한다. "세월은 쏜 화살과 같다"고 하더니, 어느 새 내 나이 일흔이 되었다. 예로부터 일흔은 '고희(古稀)'라 하여, 매우 드물다는 뜻이다. 나도 이제 초목으로 치면 가을을 맞았다. 그래서 이즈음은 언저리를 하나하나 정리해 간다. 얼마 전 명함 집과 편지함을 정리하면서 끝내 버리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것은 주로 교단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 준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연- '가연(佳緣)'은 사제(師弟)간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와 문화는 사제로 이어왔기 때문이다. 이전에 나는 제자들의 초청을 극도로 자제해 왔는데, 이나마 건강할 때 극히 자연스럽게 만나 차담을 나누는 것은 한 훈장으로서 큰 기쁨이요, 아름다운 마무리이리라.  - 기자의 말

어린이박물관 벽에 붙은 자신이 기획한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전래 동화 전시 알림판 앞에선 김미겸 학예사
 어린이박물관 벽에 붙은 자신이 기획한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전래 동화 전시 알림판 앞에선 김미겸 학예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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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제자의 비보

지난 8월 9일, '한번만 더'의 가수 박성신 제자의 비보에 나는 한동안 먹먹했다. 평소 그에게 격려 전화 한 통 못한 것도 무척 미안했고 가슴 아팠다. 그날 밤 울컥한 마음으로 추모의 글을 써서 "고고 제자였던 가수 박성신을 보내며…"라는 글을 올렸더니 꽤 여러 통의 전화와 문자를 받았다. 주로 제자들이었는데 멀리 미국에서도 일부러 전화를 했다.

"평소 '한번만 더' 노래를 좋아했는데 후배였군요. 아직은 더 열심히 살아야 할 나이인데… 선생님의 글 감동이었습니다. 김미겸 올림"

가장 먼저 문자를 보낸 그와 몇 차례 문자와 음성이 오간 끝에 가까운 날 만나기로 했다. 사실 그는 몇 해 전 한 모임에서 만난 후 헤어질 때 나에게 명함을 주며 꼭 자기가 근무하는 국립민속박물관을 들러 달라고 했다. 그래서 이참에 나는 9월 초순에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그는 9월 1일은 아들이 입대한다고, 2일은 화요일로 박물관이 휴관한다고 하여, 9월 3일로 낮 12시로 정했다.

나는 점심시간을 피하고자 오후 2시에서 오후 4시 사이로 고집했으나, 그는 "선생님께서 멀리 서울까지 오시는데 밥 한 끼 대접치 못하면 제 마음이 편치 않을 거예요"라고 아주 예쁘게 말하여 슬그머니 내 고집을 접었다. 사제가 같이 밥을 먹고 차담을 나누면 더 정감이 깊은 대화를 나눌 테지….

그와 만남을 하루 앞둔 2일, 일기예보를 보자 9월 3일은 전국 대부분 지방이 온종일 100~150밀리미터의 폭우가 내린다고 했다. 그에게 며칠 연기하자는 문자를 보내려다가, '야외에 가는 것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미쳐 내버려 두었다.

새벽잠을 설치다

9월 3일 새벽 1시 무렵, 잠에서 깼다. 예사 때면 화장실을 다녀온 뒤 잠을 청하면 곧 깊이 잠들었는데,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첫 담임을 배정받은 1971년 2월 28일 밤이 그랬다. 나는 그날 밤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어떤 학생들을 만날까 하는 설렘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서울 오산중학교 신임교사였는데, 그 학교에서는 공휴일인 3월 1일 개학식도, 입학식도 치렀다. 오산학교를 세우신 남강 이승훈 선생의 삼일운동 의거를 기리려는 후학들의 갸륵한 정성이었다.

입학식 날 운동장에서 만난 70명의 오산중 1학생들이 어떻게나 귀엽든지 나는 첫 녀석부터 끝 녀석까지 그들의 복장을 가다듬어 주고, 뺨을 쓰다듬어 주거나 안아 주었다. 입학식을 마친 그날 밤도 그들 얼굴이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녘에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9월 3일 오전 7시쯤 일어나자 바깥에는 비가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일기예보를 보자 어제와 다름없이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고 하였다. 곧 그에게 문자가 왔다.

"선생님, 빗길 어려우시면 다음 날로 연기해요."

순간 "나는 그의 훈장이었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고, 날씨 때문 만이라면 그대로 강행하고 싶었다. 손 전화 음성 버튼을 바로 누르자 그가 곧장 받았다.

"애초 약속대로 강행하세.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열차를 타고 가기에…."
"알겠습니다. 선생님, 조심해 오세요."

청량리 행 열차를 타다

나는 아내와 아침밥을 먹은 뒤, 안동 발 원주 역 오전 9시 34분 출발 청량리 행 무궁화호 열차를 탔다. 이즈음 나는 서울나들이 때는 거의 열차를 이용하고 있다. 객차 의자에 앉아 차창 밖 풍경을 보면 그 변화무쌍만큼 내 영혼도 매우 자유로워진다. 열차를 타고 가는 동안은 내게 있어 가장 좋은 작품 구상시간이다. 나는 이번 가을 신작 출간 이후 다음 작품 얼개를 머릿속으로 그리는 새 열차는 양평을 지나고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한강 물줄기를 자주 볼 수 있었다. 날씨 탓으로 강 건너 산봉우리에는 짙은 안개로 경치가 선경이었다.

청량리 역에서 내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종로 3가에서 3호선으로 환승했다. 애초에는 안국 역에 내려 옛 모교터도 보며 걸어가려다가 비도 오는데다가 지하철 맨 뒤 칸에 탔기에 조금 더 가까운 경복궁 역에서 내렸다. 그 일대는 고교시절 내가 얼마나 눈에, 발에 익은 곳인가.

삼청동 들머리 민속박물관 정문 수위에게 그의 이름을 대자, 곧 "선생님!"하고 그가 나타났다. 거기서 본 구름이 낀 인왕산, 북악산 경치가 일품이었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 두어 컷 경치를 찍은 뒤 길섶에 놓인 돌장승이 그의 이미지를 닮은 것 같아 지나가는 관람객에게 부탁하여 인증샷 한 컷을 담았다.

국립민속박물관 어귀 돌장승 옆에서(왼쪽 김미겸 학예사, 오른쪽 필자)
 국립민속박물관 어귀 돌장승 옆에서(왼쪽 김미겸 학예사, 오른쪽 필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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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점심시간이라고 화동 서울시립 정독도서관 쪽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옛 경기고등학교가 아닌가. 나에겐 고교시절 아침저녁으로 옆구리에 신문을 끼고 무수히 지났던, 가난과 허기와 남루와 열등감… 등으로 점철된 골목과 거리다. 어떤 날은 신문을 한옥 대문 틈새로 넣다가 셰퍼드에게 바짓가랭이를 된통 물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곳은 아직도 거의 옛 모습 그대로였다.

"어제 아들을 입대시켜 젖 뗀 어미 소처럼 자네 마음이 아프겠네? 더욱이 요즘 군부대 내 구타사건으로 더욱…."
"아니에요, 선생님. 걘 공군학사장교로 입대하기에…. 제 남편은 '든든한 전우들이 옆에서 큰 힘이 될 거다'라고 하더라구요. 그 말을 들으니까 안심이 돼요."

나는 그가 말하는 여러 점심 메뉴 가운데 설렁탕을 말하자, 그는 맛이 짙은 한 설렁탕 집으로 안내했다.

1979. 6. 이대부고 교내 합창대회에서 김미겸 양이 2-1반을 지휘하고 있다.
 1979. 6. 이대부고 교내 합창대회에서 김미겸 양이 2-1반을 지휘하고 있다.
ⓒ 김미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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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끝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나오다

김미겸, 그의 손끝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그가 이대부고에서 3년 재학하는 동안 교내 합창경연대회는 그의 반이 늘 최우수상을 받았다. 아마도 그의 합창단 지휘 솜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제나 이제나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28년간 미션학교를 재직할 수 있었던 것은 예배시간에 드리는 어린 영혼들이 바치는 찬양을 듣는 시간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요, 목사님의 설교도 음미해 보면 인생에 도움이 되는 말씀이기에 그 시간이 그렇게 괴롭지만은 않았다.

나는 모든 종교는 그 나름대로 진리가 있고, 사람에 따라 '호, 불호'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한 작가로, 문학도로, 한 종교에만 몰입하여 글을 쓴다면 그것은 편협한 사고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옛날 얘기를 나눴다. 그의 정확한 직책은 국립민속박물관 내 어린이박물관 교육담당 '에듀케이터(Educator)'이라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나는 자네가 음대에 진학할 줄 알았는데…."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아버지를 따라 국립중앙박물관 고적답사를 자주 다녔어요.  그래서 대학도 국사학과를 선택했나 봐요. 교사가 되고자 대학 입학 후 처음엔 교직 과목을 이수하다가 고교 교사였던 어머니가 너무 힘들어 하시기에 포기했어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어린이 교육담당을 하고 있네요."

우리는 밥을 먹은 뒤 국립민속박물관 내 어린이박물관으로 돌아왔다. 박물관 벽에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전래 동화 전시 알림판이 붙어 있었다.

"선생님, 제가 기획하고 만든 어린이박물관 상설전시예요. 전래 동화를 어린이들이 보고 만지며 즐기는 전시물로 창작했어요."
"그래? 너 정말 대견하다."

어린 시절에 각인된 이미지는...

어린이들이 전시장에서 전시물 놀이에 듬뿍 빠져 있다.
 어린이들이 전시장에서 전시물 놀이에 듬뿍 빠져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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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알림판을 배경으로 그의 이미지를 담았다. 어린이박물관에 입장하자 우중임에도 만원사례였다. 어린이들이 전시장에서 아주 신나게 뛰놀고 있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전래 동화는 모두 서른 장면으로 되어 있는데 몇 장면만 소개해 본다.

10. 호랑이와 게임 한 판 17. 어흥! 산중호걸 호랑이 20. 수수밭과 호랑이 …

그는 전래 동화를 그림과 모형, 영상물로 매우 흥미롭게 꾸며놓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각인된 이미지는 평생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한 화가(천경자)는 어린 시절의 배추 빛깔에 반해 평생 배추 빛깔을 그렸다고 하고, 한 작가(현기영)은 어린 시절에 겪은 제주 4·3사건을 작품화하였으며, 내 고향 경북 구미의 한 의병집안 어린이(허형식)는 어린 시절 일본 밀정에 시달린 나머지, 그 일본 밀정과 평생 맞서 싸우다가 북만주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김미겸 학예사(국립민속박물관 뜰에서)
 김미겸 학예사(국립민속박물관 뜰에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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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저런 얘기를 하며 항일답사 여행 중 일본에서 본 어린이 교육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일본인들은 그들 전래의 민속 문화에 대한 교육이 매우 철저하여 놀이에서도 조상들의 생활습성을 재현할 뿐 아니라, 그들 정신의 뿌리를 온통 일본화 함을 보고 매우 놀랐다. 그래서 일본은 패전국이 되어도 곧장 일어설 수 있었나 보다.

사실 가장 바람직한 한국인은 우리 것이 밑바탕된 가운데 선진 외래문화를 과감히 받아들여, 그것을 새로운 우리 것으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즈음 일부 부모들은 젖먹이시절부터 우리 것을 죄다 외면하고 온통 서구화시키는데 문제가 몹시 심각하다.

그런데 그는 가장 중요한 어린이 교육을 우리 고유문화와 접목시켜 실시하고 있음을 보고, 나는 그가 그 누구보다 대견해 보였다. 괜히 내 어깨조차도 으쓱했다. 어린이박물관 관람 후 바로 옆 민속박물관 전시실로 가 사람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둘러보자 그가 박물관 어귀 커피숍으로 안내했다.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곁에는 참새 무리를 둔 채 마무리 이야기를 나눴다.

화려한 뒷면에는...

나는 그가 아직 10대 소녀로 여기는데 올해 52세라고 했다. 그는 대학졸업 후 1985년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채용된 후 육아로 좀 쉬었다가 1996년 국립민속박물관에 다시 재취업하여 현재에 이른다고 했다.

"요즘은 미술관이나 박물관 학예사 직이 인기직종이라는데, 자네가 학예사를 희망하는 후배를 위한 조언 한 마디해 줄까?"
"최근 저희 직종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진 점은 사실이지만,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매우 고됩니다. 초기에는 박물관 등록 일을 주로 하는데, 육체적으로도 매우 힘이 듭니다. 아무튼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다양한 정보 등, 많이 공부해야 합니다. 화려한 뒷면에는 엄청난 노고가 따라요."

그는 원론적인 얘기를 해 주었다. 그는 학예사인지라 커피를 마시며 내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세 차례 다녀온 얘기를 집중으로 물었다. 나는 한국전쟁 중 가장 고통을 받은 사람은 어린이였다고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진이미지에 대해 물었다. 나는 수집해온 사진 가운데 어린이 이미지가 여러 점 있다고 말하자 그는 한두 컷을 메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즉석에서 그에게 전쟁 중 설날 널뛰는 소녀의 이미지를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어느새 그와 애초 약속한 시간(오후 2시)이 가까워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제야 하늘에 구멍이 난듯 빗줄기가 굵어졌다.

전란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마을 공터에서 민속놀이인 널뛰기를 하고 있다(1953. 2.).
 전란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마을 공터에서 민속놀이인 널뛰기를 하고 있다(1953. 2.).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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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군가? 그의 선생이 아닌가. 그가 나에게 비가 멎으면 가라고 하였지만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치고선 나섰다. 나는 그에게 그만 사무실로 들어가라고 해도, 그는 우산을 받치고 100여 미터가 넘는 박물관 정문까지 배웅한 뒤 거기서 헤어졌다. 이튿날 메일함을 열자 그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선생님...
저도 일흔이 되었을 때 선생님처럼 멋진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즐거운 추석 명절 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미겸 올림

덧붙이는 글 | 관람안내
09:00~18:00 / 휴관일 : 매주 화요일, 1월 1일 / 입장료 : 무료



태그:#사제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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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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