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농구에게 세계의 벽은 여전히 높았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만큼은 부끄럽게 패하지는 않았다.

FIBA 랭킹 31위의 한국은 스페인에서 열리고 있는 2014 농구월드컵 D조 조별리그 3차전에서 랭킹 13위 슬로베니아에 72대89로 졌다. 한국은 앙골라-호주전에 이어 3연패로 D조 최하위에 머물렀다.

패했지만, 부끄럽지 않은 경기

이번에도 결과는 패배였지만 이전의 두 경기와는 완전히 다른 흐름이었다. 유재학 감독이 이끄는 한국은 이날 초반부터 야투가 호조를 띄며 조직적인 플레이를 앞세워 강호 슬로베니아를 상대로 선전했다.

한국은 이날 부상 중인 문태종과 오세근까지 투입하는 강수를 두며 독기를 품은 모습이었다. 경기 시작과 함께 이종현의 중거리슛으로 기분 좋은 출발을 알린 한국은 선수 전원이 볼을 고르게 소유하는 플레이로 공간을 만들어내며 개인기를 앞세운 슬로베니아에 밀리지 않았다.

1쿼터 문태종의 외곽슛에 이어 김선형이 과감한 돌파와 속공으로 여러 차례 좋은 찬스를 만들어냈다. 1쿼터를 21-19로 오히려 앞선 한국은 2쿼터까지도 39-40으로 박빙의 접전을 펼쳤다.

하지만 3쿼터 들어 팽팽하던 경기 흐름은 급격히 슬로베니아 쪽으로 기울었다. 제공권의 우위를 바탕으로 슬로베니아가 드라기치의 페네트레이션과 픽앤 팝에 의한 외곽슛 찬스를 잇달아 만들어내며 대량 득점에 성공했다.

슬로베니아는 3쿼터 종료 약 4분을 남겨두고 순식간에 10점차 이상으로 달아나며 분위기를 가져왔다. 한국은 전반 잘 들어가던 야투가 침묵하면서 공격 루트를 잃고 시간에 쫓겨 조급하게 던지는 슛이 많았고, 잇단 실책까지 겹치며 자멸했다.

4쿼터 들어서도 흐름은 다시 바뀌지 않았다. 한국은 조성민의 자유투와 3점포로 마지막 추격의 희망을 걸었으나 폭발하는 슬로베니아의 외곽 공세에 수비 해법을 찾지 못하고 더 이상 점수차를 좁히는 데 실패했다. 경기 종료 3분여를 남기고 점수차가 20점까지 벌어지면서 승부가 기울었다.

이번 경기는 한국으로서는 다시 한번 앙골라와의 1차전이 생각날 수 밖에 없는 경기였다. 앙골라는 이번 대회 한국의 유력한 1승 제물로 거론되었던 팀이다. 하지만 한국은 1차전에서 한 달간의 실전 공백을 극명하게 드러내며 부진한 경기력 속에 69-80으로 패했다.

앙골라의 전력이나 경기 내용도 그리 좋지 못했기에 더욱 아쉬운 패배였다. 슬로베니아전에서 보여준 경기력이 앙골라전부터 나왔다면 경기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앙골라는 한국전 승리 이후 리투아니아(62-75)와 멕시코(55-79)에 잇달아 무너지며 2연패를 기록 중이다.

젊은 선수들 투혼 보여줬지만, 한계 확인

이전 경기와 슬로베니아전의 가장 큰 차이는 '적응'이었다. 16년 만에 세계 무대에 출전한 한국 선수들은 아시아권 이외의 팀들과 경기해본 경험이 많지 않다. 유일한 농구 월드컵 유경험자인 노장 김주성도 16년전 1998년 그리스 대회 때 거의 출전 시간이 없던 막내였던 탓에 사실상 첫 출전이나 마찬가지다.

선수들은 세계 농구의 높은 벽과 생소한 외국 선수들에 대하여 지레 위축되며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2연패를 겪으며 경기 감각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고, 잃을 게 없다는 마음가짐이 선수들의 투지를 자극했다.

특히 이날 경기에서 눈에 띄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이종현과 김종규, 김선형 등 젊은 선수들의 투혼이었다. 이종현은 이날 12득점을 기록하며 한국 선수중 최다득점을 올렸다. 그동안 국내 경기에서의 습관에 젖어 유재학 감독으로부터 '편하게 농구하려 한다'는 비판도 들었던 이종현은 이날 한국 빅맨중 그나마 가장 적극적이고 과감한 모습을 보여줬다.

김종규 역시 패색이 기운 경기 후반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과감한 덩크슛을 꽃아넣는 등 투지 넘치는 플레이를 보여줬다. 국내 최고의 슬래셔로 꼽히는 김선형의 돌파와 속공은 개인기와 체격이 월등한 슬로베니아 선수들조차 여러 차례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선전에도 불구하고 어쩔수 없는 한계 또한 확인한 경기였다. 투맨 게임과 속공 외에는 마땅한 공격 루트가 없었던 한국은 후반 들어 슬로베니아에 약점이 간파당하며 야투가 침묵했다.

슬로베니아의 강력한 압박과 몸싸움에 힘에서 밀린 한국 선수들은 외곽을 맴돌기 일쑤였다. 고비마다 화려한 돌파와 외곽슛으로 한국 코트를 맹폭한 슬로베니아의 에이스 고란 드라기치(22점)처럼 어려울 때 개인 능력으로라도 활로를 열어줄 해결사의 부재가 뼈아팠다.

문태종과 김주성, 양동근 등 제몫을 해줘야 할 한국의 베테랑 선수들은 아쉬운 플레이를 보였다. 문태종은 팔꿈치 부상에도 투혼을 보였으나 무리한 슛 타이밍이 많았고 수비에서의 실책이 잦았다. 김주성은 여러 차례 쉬운 찬스를 놓치며 공격 템포를 끊기 일쑤였다. 후반에는 사실상 부정확한 3점슛 난사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양궁 농구로 회귀했다.

한국이 자랑하는 조직력과 수비도 월등한 개인 능력을 갖춘 상대들 앞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만 다시 확인했다. 슬로베니아는 이날 전반적으로 경기 내용이 좋지 못했지만 개개인의 기술과 창의성으로 경기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선수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허재, 이충희같이 국제 무대에서도 통하는 테크니션들을 보유했던 1980~1990년대보다 기술적으로는 더욱 퇴보하고 있는 '한국형 농구'의 한계였다.

한국은 이제 조별 리그에서 리투아니아, 멕시코와의 경기만을 남겨두고 있다. 리투아니아는 설명이 필요없는 D조 최강팀이자 이번 대회의 강력한 우승 후보이기도 하다. 또 다른 1승 제물로 거론된 멕시코 역시 한국을 이긴 앙골라를 24점차로 대파하는 등 만만치 않은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1998년 그리스 대회부터 세계 대회 8연패의 사슬을 끊지 못하고 있는 한국 농구가 숙원인 1승 도전에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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