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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300년 된 고택의 복원 준공식이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무민로 39길 89 (대자동 영사정)에서 있었다. 경기도 지정문화재 제157호로 지정된 영사정 준공식이 그것이다. 이 집은 숙종 임금의 장인인 김주신이 300여 년 전인 1709년에 지은 집이다. 영사정은 조선 후기 살림집 연구에 있어 중요한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고택으로 고양시에서는 앞으로 이 집을 역사 체험 공간으로 시민에게 개방한다고 한다.

영사정 준공식에는 최성 고양시장을 비롯한 관계자 100여 명이 참석해 영사정 복원을 축하하고 몇몇 관련자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하는 것으로 식을 마쳤다. 하지만 영사정의 복원이 가능했던 일련의 사실들을 간과하고 식이 끝나 아쉬움이 남는다. 기자는 '영사정 복원'이 있기까지 지난 400여 일간 (2009년 2월 8일부터 2010년 3월 26일) 문화재 지정을 위해 고군분투한 사실을 직접 체험한 시민으로서, 더 나아가 한 무명 건축사의 아내로서 하마터면 한 줌 땔감으로 사라질 뻔한 '영사정의 슬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영사정 복원 준공식을 계기로 이 건물이 세상에 남을 수 있게 된 그간의 경과를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그래서 이 글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앞으로 이 땅의 몰지각한 문화재위원들의 얄팍한 '문화재의식'에 경종을 주고 싶다. 다음 글은 2010년 5월 2일에 무명 건축사의 아내 이윤옥, 즉 기자가 쓴 글이다.

'문화재적 가치 없다'던 영사정...보존 위한 400일간의 사투

남편이 ‘문화재급 300년 된 주택’이라고 안내한 집.
▲ 영사정 복원 되기 전 남편이 ‘문화재급 300년 된 주택’이라고 안내한 집.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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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문화재 수리 설계를 하는 사람이다. 평생 월급봉투 한번 제대로 가져다주진 못하지만 누구보다 문화유산을 사랑하고 한국 전통문화의 깊이를 이해하는 사람이다. 며칠 전 석비(石碑)를 연구하는 그 이의 친구를 안내하기 위해 고양시 대자동 26-1번지를 답사하고 와서는 내게 말했다. "대자동에 문화재급 300년 된 한옥이 있다, 보러 가자"고 말이다.

남편의 안내에 따라나선 2009년 2월 8일은 아직 겨울 코트 옷깃을 여며야 할 정도로 쌀쌀했다. 그린벨트로 묶인 고양시는 말끔한 일산 신도시를 빼면 어딜가나 1960년대 농촌 풍경 그 자체다. 남편이 말한 '300년 된 문화재급 집'이 있는 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길도 구불구불했고 동네라고해야 번듯한 집 하나 없는 시골 마을이었다.

크게 자비로운 동네라는 뜻인 대자동(大慈洞).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싸늘한 2월의 찬 바람만 휑하니 지나갔다. 간신히 차 한 대가 지나가는 마을길에 들어서서 '300년 됐다는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보니 마당에 수북이 쌓아 놓은 한옥용 목재가 눈에 들어온다. '무슨 공사를 하나?' 싶은 마음에 마당에 내려서자 목수들이 부산스레 새로 들여온 나무 깎기에 분주하다.

목수들의 나무 다듬는 전동 기계 소리를 뒤로하고 집 안으로 들어서니 금방이라도 폭삭 주저 앉을 듯한 초라한 집 한 채가 눈앞에 서 있다. 모진 세월 동안 눈, 비, 바람에 시달린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300년 된 기와집'은 그 초라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먼 곳에서 보기보다 가까이에서 보니 제법 한옥을 지탱하는 기둥들이 
 튼튼해 보였다.
▲ 영사정 기둥 먼 곳에서 보기보다 가까이에서 보니 제법 한옥을 지탱하는 기둥들이 튼튼해 보였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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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이에요?"

문화재급이란 말을 듣고 내심 기대했는데 눈앞에 펼쳐진 낡아 빠진 집 한 채는 내 눈과 귀를 의심케 했다. '번듯한 것'에만 익숙했던 나는 실망스러운 듯 그렇게 물었다. 그런 나의 물음에 대꾸도 하지 않고 남편은 나를 뜰 안으로 불러 세웠다. 그리고 이 건물이 한국 전통 건축학적 차원에서 얼마나 가치가 있는 집인가 차근차근 말해줬다. 남편은 저명한 교수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몇 안 되는 문화 재실측설계사로 이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온 데다 남달리 문화유산에 애정이 깊은 사람이다. 나는 그런 남편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남편은 툇마루로 나를 불렀다. 미안한 마음으로 흙발로 툇마루에 올라섰다. 남편은 집안 구석구석을 보여주면서 옛날 기법으로 다듬은 판자며, 옛날 조상들이 사용하던 문선과 벽체를 만든 기법들을 보여주면서 정말 보기 드문 문화재임을 강조했다. 마루 중앙에 세워져 있는 기둥을 어루만지며 그가 말했다.

"훌륭한 후손들이다. 이 집에서 300여 년간 살아온 후손들이 집의 형태를 전혀 변형시키지 않고 상당히 불편했을 여닫이 문 가운데 있는 기둥을 그냥 그대로 보존해왔다."

듣고 보니 대청마루에서 뒤로 나가는 문은 두 짝 여닫이문인데 가운데 또 하나의 기둥이 있어 사람이 드나들 때나 물건들을 들고 나갈 때 무척이나 불편했을법 했다. 조금만 불편하면 뜯어고치는 현대인의 정서에 비해 이 집 후손들은 한옥이 지닌 온갖 불편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300여 년을 내려온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300여 년 전 조선시대의 한옥구조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설명을 듣고 보니 비록 쓰러져가는 집이지만 돈으로 치장한 현대판 고급 기와집보다 훨씬 아름다워 보였다.

남편은 집안 구석구석 기둥 하나 허물어진 벽 한 조각까지 찍느라 한나절을 보내야 했다. 사진을 찍고 보니 점심 때가 다 됐다. 목재를 다듬던 인부들도 모두 사라졌다. 남편과 나는 건물에 대해 뭔가 알아보기 위해 인부들을 기다리다 그만 귀가했다. 집에 와서 우리는 그날 저녁 내내 '300년 된 문화재급 한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부리나케 다시 300년 된 집을 찾았다. 마침 이날은 건물 주인이라는 분이 나와서 목재 다듬는 인부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명함에 적힌 김순경이라는 이름은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을 이름이었다. 70세 정도로 체격이 좋은 분이었다. 자신을 김씨 문중의 대표라고 소개하며 잠시 우리를 빤히 바라보시더니 이 건물을 헐고 새로 짓기 위해 목재를 다듬는 중이라 했다. 남편과 나는 깜짝 놀랐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대청마루 위 천정에는 상량문이 있다. “歲己丑 四月初”라는 문구가 보여 이 집을 지은 때가 1709년임을 알 수 있다.
▲ 영사정 상량문 대청마루 위 천정에는 상량문이 있다. “歲己丑 四月初”라는 문구가 보여 이 집을 지은 때가 1709년임을 알 수 있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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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위해 백방으로 집주인이 뛰었으나 허사

300년 된 문화재급 건물이 눈 앞에서 사라지기라도 하는 양 아찔했다. 남편은 "며칠 전 이 집 옆의 김주신 묘비에 왔다가 이 집을 보고 놀랐습니다. 300여 년 전 건축양식이 잘 보존된 집이더군요"라며 운을 뗐다. 이에 그는 "아유 말도 마슈. 우리도 이 집을 문화재 지정을 하려고 백방으로 뛰어 다녔으나 허사였다우. 문중 회의 결과 건축 허가만 나면 바로 이 집을 허물고 다시 지으려 한다우" 라고 답했다. "아니 어르신, 이 건물은 문화재적 가치가..." 말하는 남편의 말을 듣지 않고 목재 작업장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을 우리는 그의 옷자락을 잡다시피 막아 세웠다. 그날 문중 어르신의 이야기는 대충이랬다.

"이 집은 영사정(永思亭)이란 이름의 집으로 이 집을 지은 조상은 조선후기의 문신인 경은 부원군 김주신(1661∼1721)이다. 아버지 김일진을 선영봉사 하기 위해 제사(祭舍)로 지은 것이다. 1709년에 지어 올해 301년째를 맞이한다. (2009년 2월 8일 당시 기준) '영원히 잊지 않고 생각한다'는 뜻으로 영사정으로 지은 김주신 조상은 부친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갖고 있었다. 그의 딸은 조선 19대 왕 숙종의 9명 부인 가운데 둘째 계비인 인원왕후다. 따라서 이 집을 지으신 분, 즉 김주신은 곧 숙종의 장인이다."

어르신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이러한 선조의 흔적이 배인 집인지라 낡고 허름해졌지만 집을 부숴버린다는 생각은 꿈에도 한 적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집을 보존하기 위해 백방으로 고양시와 협의도 해보고 대학교수라는 분들도 와서는 사진을 찍어 갔지만 모두 허사였다. 지붕도 새고 집이 낡아 도저히 살기 어려워 집을 비워두고 나간 이래 급격히 집이 훼손돼 문중회의를 거듭한 결과 부수고 새로 짓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래서 보다시피 저기서 목재를 다듬고 있는 것이다. 날이 풀리면 곧 이 집을 허물고 새로 집짓기에 착수할 것이다."

대청마루에서 뒤로 나가는 문은 두짝여닫이 문인데 가운데에 또 하나의 기둥이 있어 사람이 드나들 때나 물건들을 들고 나갈 때 무척이나 불편했을 법 했다.
▲ 문 가운데 기둥 대청마루에서 뒤로 나가는 문은 두짝여닫이 문인데 가운데에 또 하나의 기둥이 있어 사람이 드나들 때나 물건들을 들고 나갈 때 무척이나 불편했을 법 했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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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정이 이 지경이 될 정도로 경기도와 고양시는 무심한 세월을 보냈다.
▲ 복원되기 전 영사정 영사정이 이 지경이 될 정도로 경기도와 고양시는 무심한 세월을 보냈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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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집이 헐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문중 어른인 김씨는 그 어떤 사람이 와도 '문화재 말을 꺼내도 안 속는다'는 듯 공사 감행을 단호히 말했다. 또한 이렇게 허물어져 가는 집을 놔두는 것은 조상들께 도리가 아니라고 하면서 조상들 뵐 면목이 없다고 했다. 듣고 보니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문화재적 가치가 많이 남아 있는 집을 왜 국가는 외면하고 방치하는 것일까? 문중 어르신이 백방으로 뛰어다닐 10여 년 전만 해도 지금보다 훨씬 상태가 좋았을 텐데... 우리는 문중 어른 김 씨에게 공사를 시작하지 말아 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문화재 지정'을 해서 건물을 헐지 않고 보존하는 쪽으로 노력해보자고 다짐하고 돌아온 날, 남편은 잠도 자지 않고 밤새 고민하더니 '문화재청장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얼마 뒤의 일이었다. 풀이 죽어 퇴근한 남편은 "300년 된 집이 헐릴지 모른다"고 했다. 문화재청장 앞으로 보낸 편지가 경기도 문화재청 내 관련 부서로 이첩됐고 그곳에 근무하는 담당자라는 사람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고 한다.

남편은 그가 "이보세요, 최 선생! 하시는 업무나 하지 골치 아프게 왜 이런 것을 문화재청장한테 편지를 보냈소"라고 했다며 절망감을 토로했다. "관료사회란 원래 그런 것이니 힘내시라"고 남편에게 위로의 말을 했지만 낙심하는 빛이 역력했다. '300년 된 집'이 아니라 천 년 된 집이라도 절차를 밟아야 한다. 따라서 이 단계에선 문화재 전문위원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관심이 없으면 허사로 돌아가기 십상이다. 우리는 백방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고양신문>에 이 사실을 '300년 된 집 보물인가? 폐물인가?'라는 기고문으로 2월 11일에 기사를 올렸다.

또한 전 고양시 문화원장인 이은만 회장님의 측면 지원도 얻어냈다. 이 회장님은 이 집이 지금보다 덜 훼손됐던 시절부터 '경기도 지정문화재' 지정을 위해 애썼지만 결국 관리들의 주장에 손을 든 상태였다. 또한 한겨레신문과 문화연대 황평우 씨도 현장으로 달려왔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여론화되고 말 한마디라도 거들어주는 사람들이 나타나 다소 힘을 받는가 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낙담스런 일이 벌어졌다.

결정적 힘을 실어 주어야 할 경기도 문화재위원 가운데 한 명이 현장을 방문한 결과 '너무 낡고 훼손이 심해서 문화재보존가치가 없다'는 보고서를 올렸다는 소식이었다. 이렇게 되면 그간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김씨 문중에서도 목수들이 대기 상태라 공사 진행을 할 판이었다. 나는 문화유산에 대한 1%의 애정도 갖지 않고 있는 문화재위원을 찾아가 따지고 싶었다. 이름이 누구인지 공개하라고 경기도 도지사 사무실로 뛰어 들어 1인 시위라도 벌일 태세였다.

이런 무지한 문화재 전문위원의 판단 때문에 남편과 나는 낙담 속에서 또 얼마 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문중 어르신은 잘 참아 주셨다. 공사지연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을 텐데 "조상님의 혼이 밴 집을 어떻게든 헐지만 않고 보존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을 끝까지 지켜준 김 씨 문중 분들은 역시 조선의 뼈대 있는 선비 후예답게 훌륭한 어르신들이었다.

문화재의 문외한인 내가 봐도 300년 된 집의 문화재적 가치는 충분했다. 비록 지붕과 벽 따위가 많이 훼손됐지만 후손들의 노력으로 이나마 보존해온 것을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고 일축한 것은 '문화유산'의 가치를 모르는 소행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문화재전문위원이란 사람이 이런 몰상식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인가! 분노할 일이었다.

선진국에서는 기둥이나 주춧돌만 남아도 문화재적 가치를 높이 사는 판인데 문화 국가를 자처하는 대한민국의 문화재 기준이란 대체 무엇이기에 이 집을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고 보고서를 만든단 말인가. 남편은 또 다른 문화재위원이라는 사람을 수소문해 전화로 협조를 구한 결론은 '문제를 만들기 싫다'였다고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집주인은 지난 10여년 간 '조상의 집'을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 지정 탄원을 수차례 냈지만 그때마다 고양시 관계자와 경기도 문화재위원들, 문화재 관련 학자들의 냉대와 퇴짜에 실망하고 지쳤다. '고양시 유일의 300년 된 고택' 운명은 이제 바람 앞에 놓인 등불이었다. 

하늘이 도운 것인가. 최종 단계의 문화재위원회 심의에서 집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던 것인지 몇 차례의 경기도문화재위원회의 끝에 최종 단계에서 이 건물의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날 남편과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집안 내부에는 300여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제법 반듯한 재료들이 남아있는 집이었다.
▲ 영사정 내부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집안 내부에는 300여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제법 반듯한 재료들이 남아있는 집이었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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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키기 위한 분투...결국 톱질을 멈추게 하다

2009년 2월 8일 처음 만난 '300년 된 집'. 곧 부서질 운명에 놓였다는 사실에 나는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이 아파 '너무나 가슴 아픈 현실, 300년 된 한옥의 운명'이란 제목으로 여기저기 인터넷 매체에 호소를 했다. 또한 내가 알만한 분들께도 제발 도와달라고 알렸다. 그때마다 전문가들이라는 문화재위원들은 다 뭐하길래 나 같은 문외한과 실무 현장에서 일하는 건축사가 이 이 일에 매달려야 하는 것인지, 우리 대한민국의 문화재 의식 수준이 개탄스러웠다. 이것이 우리나라 문화재 정책의 현주소인 것이다.

2010년 3월 23일 경기도로부터 문화재 자료 제157호로 지정. 이날까지 지난 400여 일간의 과정을 지켜본 문화재 수리기술자의 아내인 나는 이번 일의 진행에 남다른 감회를 느낀다. 그러나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이런 집이 어디 하나 둘이랴!  

지역유지와 해당 집주인이 올린 민원만 꼼꼼하게 살폈어도 이번 집처럼 톱질을 멈추게 하는 촌극은 없었을 것이다. 목수들의 대들보 다듬는 톱소리를 멈추게 하고, 동분서주 뛰어다닌 남편의 문화재 사랑이야기는 칭찬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 된다고 두 손 두 발 든 문화재를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는 의지의 승리였음을 알리고 싶어 그간의 상황을 지켜본 아내로서 글을 썼다.

문화유산이란 한번 사라지면 다시 만들기 어려운 것이다. 끝으로 고양시의 '300년 된 집'을 꼭 살려야한다고 호소하던 나의 글에 위로와 관심을 보여줬던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 말씀 드리며 또한 일을 맡았던 대목수가 들고 있던 망치를 오랫동안 내려놓게 하고 이 일의 진행을 말없이 지켜봐 주신 문중 대표인 김순경님께 깊은 감사 말씀을 올린다.


태그:#영시정, #경기도문화재, #최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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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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