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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기는 우리집 진돗개 이름
▲ 아부지와 설기 설기는 우리집 진돗개 이름
ⓒ 김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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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 커피 드리까요? 주스 드리까요?"
"아무래도 커피가 낫제."
"아, 주스 달라고요."

참고로, 우리 집에는 아예 주스가 없다. 평소 웬만한 일에는 별 반응이 없으시고 조금 못마땅한 일이 있어도 묻어두고 지나가시는 시아버님께서 기호 식품만은 확실하게 의사를 밝히신다.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찾아오는 이도 없고 남편은 서재에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고 아버님은 거실 소파에서 밖을 내다보시며 말씀이 없으시다. 그 모습이 무척 심심해 보이기도 하고 나도 심심해서 가끔 아버님을 이런 식으로 놀린다.

며느리(필자)와 죽녹원 구경
▲ 죽녹원 구경 며느리(필자)와 죽녹원 구경
ⓒ 김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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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우리 시아버님 연세 98세. 16개월만 더 있으면 100세가 되신다. 그래도 눈도 귀도 다 정상이시다. 요즘은 다리에 힘이 없다고 투정을 부리시기도 하지만, 허리도 꼿꼿하시고 칠순인 큰 아들보다 훨씬 기억력도 좋으시고 정신도 맑으시다.

동네 이장이 마이크에 대고 안내 방송을 한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도 못 알아들은 척 아버님께 여쭙곤 한다.

"아부지, 이장이 뭐라 그랬어요?"
"마을회관에서 어른들 식사 대접한다고 먹으러 오라고 안그냐."
"점심에요? 저녁에요?"
"점심이라그드만."
"에이, 저녁이라카는 거 같드만."

며느리가 그래도 대꾸 없이 가만히 계시다가 오전 11시 반쯤 되면 지팡이를 짚고 신을 신으신다. 그 기척에 남편이 나와서 아버님을 부축해 모시고 현관문을 나선다. 언제 왔는지 건너편에 사는 사촌 시동생이 현관문 밖에서 남은 한쪽 팔을 붙잡는다. 종형제 간에 아버님을 부축하여 모시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군불 땔감을 만드느라고 톱질하시는 아부지
▲ 톱질하시는 아부지 군불 땔감을 만드느라고 톱질하시는 아부지
ⓒ 김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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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전, 아버님께서 미국에 사는 둘째 아들네 집에서 근 일 년을 계시다 오신 적이 있다. 오시면서 커피를 몇 봉지 가지고 오셨다. 나는 당연히 미국에서 커피를 드신 줄 알고 식사 후에 아버님께 커피를 타 드리려고 했더니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아부지 미국에서 커피 안 드셨어요?"
"야, 그 걸 뭔 맛으로 먹냐? 시커먼 게 한약같이 생겨 가지고 쓰기만 하드만."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이 커피라곤 구경도 못 하신 시골 어른께 블랙커피를 드렸던 것이다. 나는 아버님께서 가지고 오신 커피에 설탕과 크림을 넣어 아주 달달하게 한 잔 타 드리면서 드시도록 권했다. 그 뒤로 아버님께서는 30년을 넘게 하루에 평균 세 잔 이상의 커피를 즐겨 드시게 됐다.

오늘도 아버님은 소파에서 밖을 내다보고 계신다. 시계를 보니 딱 커피를 드실 시간이다. 나는 또 장난기가 발동했다.

"아부지, 며느리가 살러 내려오니까 좋으시지요?"
".... "
"안 좋으신가 보네,.... 아부지, 커피 드리까요? 주스 드리까요?"

소파에서 고개만 돌리고 힐끗 보시더니, 모처럼 얼굴에 미소를 띠우시고 말씀하셨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나."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들어 있음을 나는 안다.


태그:#아부지, #사랑, #믿음,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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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시원한 청량제, 겨울에는 따뜻한 화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쓴 책 : 김경내 산문집<덧칠하지 말자> 김경내 동시집<난리 날 만하더라고> 김경내 단편 동화집<별이 된 까치밥> e-mail : ok_0926@daum.net 글을 써야 숨을 쉬는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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