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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6일, 드디어 산골생활을 시작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산촌의 밤. 사방에서 번지는 적막과, 순례자처럼 찾아드는 산의 정령들. 고요와 그것을 넘어서는 엄정함. 이내 사위에 몰아치는 외로움까지 찾아들었다. 아,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다. 화순군 용암산 기슭의 어느 산골 마을. 이곳 분들은 산골이라고 지칭하는 걸 싫어하실까? 회장님이나 이장님은 아마 그리 싫어하시지는 않을 것 같다.

6월 어느 날, 마을회관에서 노인들을 모시고 점심을 먹은 적이 있다. 그때 처음으로 뵌 회장님은 강직하고 엄격한 느낌이 가득했다. 다소 우락부락하시기도 했다. 그런 인상과는 달리 심성이 여리고 매우 예의 바르신 분이셨다. 무엇이든 도와주려고 이것저것 물어주셔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또 이장님은, 아내 또래의 여성분으로 마을을 위해 애쓰시는데, 어른들의 칭찬이 많았다. 동네 분들과 함께 직접 밥과 반찬을 만들었고 노인들을 마치 부모님 대하듯 하시는 게 자연스러워 인상 깊었다. 그날, 어른들이 우리 부부가 "뒤에서 2~3번째로 애기"라며 웃으셨다. 농촌의 현실이라고는 하지만 아이들의 흔적은 가뭇하고 노인들만 가득한 것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계속된 집 공사로 밤늦게 냄비 밥을 지었고, 밥물이 넘치는 바람에 뚜껑을 열어놓은 뒤 그걸 잊었다. 밑은 눌어붙고 위는 설익은 3층 밥을 앞에 놓고서, 그래도 좋다고 우리는 소주를 따라 건배했다. 아, 행복하다. 행복이 뭐 별거냐. 그토록 꿈꿔왔던 산촌의 밤이 저물고 있다. 사방 천지에서 흘러내리는 산의 정기로 콧구멍이 뻥 뚫리고, 몸이 떠오르는 공중부양하는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으리오.

사실 용암산 자락은 우리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90년, 광주에 맨 처음 정착했을 때 화순의 인접지역에 살기 시작했고, 그런 인연으로 우리는 일찍부터 화순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광주 천변에서 붕어와 거북을 잡던 아이들은 '잡고 놓아주기'를 반복하다 드디어 사평까지 진출, 루어낚시를 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가족은 동복과 이서의 어느 산 귀퉁이에서 공놀이로 시간을 즐겼으며, 봄이면 어머니를 모시고 산 속에 묻힌 고사리와 취를 캐다가 산 안에 잠긴 아름다운 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곤 했었다.

화순(和順)은 한자의 뜻과 관계없이 높고 깊은 산이 많은 곳이다. 백아산과 만연산, 모후산, 그리고 용암산 등의 산이 곳곳에 있다. 특히 용암산은 다른 산들과 달리 등산의 맛이 웅숭 깊은 곳이다. 용암사에서 약수를 담고 풀냄새를 따라 고즈넉한 산길을 오르면 무쇠 솥의 누룽지 같은 흙길의 구수함이 구성지게 펼쳐진다. 산성 길을 따라 걷다가, 암릉 길을 살짝 휘돌아 오르면 소금강으로서의 암벽과 그 척박한 절벽에 뿌리를 흩뿌리고 의연하게 서 있는 나무들의 모습에 감동이 사무친다.

많지도 적지도, 모나지도 둥글지도 않은, 그러면서도 '나는 나'라고 품격을 잃지 않는 산. 그래서 많이 찾았던 곳이 용암산이었다. 그런 곳이었기에 특별히 두 아이가 수능을 앞둔 날 다른 부모들의 백일기도와 같은 심정으로 산 정상에 올라 물 한 잔을 따라놓고 넙죽 절을 올렸다. 비록 간단하고 짧았지만 나름대로 우리 부부는 경건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 내려오는 길에 그런 경건함과 산속에 담긴 풍광을 버무려 한 편의 시를 쓰기도 했었던 곳. 그랬던 용암산의 맨 밑자락이 우리 노년의 황홀한 그루터기가 되어 주실 줄이야. 그런 까닭에 이 아름답고 고마운 인연을 나머지 삶 동안 감사하며 살아갈 것이다.

소주 한 잔과 오래도록 꿈꿔왔던 산촌의 기운, 그리고 슬그머니 산을 타고 내려오는 적막한 어둠이 우리를 감싸 안을 때 20년 전, 귀촌을 그리며 삶의 끈을 다잡던 청년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그래, 세월은 가는 것이다. 그러나 끝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이니 산그늘에 묻혀 과거의 묵은 갈기를 털고 새 삶을 안아보자.

창밖으로 산촌의 밤이 일렁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전남일보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산골일기, #새삶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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