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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부터 6월까지, 혼자 필리핀 팔라완 배낭여행을 했다. 더 '늙기' 전에 떠난 여행이었다. 팔라완의 북부여행은 '바다와 몸', 남부여행은 '바다와 사람들'이었다. 팔라완은 안전하고 아름답고 순수했다. 고되고, 거칠고, 가난하고, 고맙고, 아름답고, 자유로운 여행을 했다. 두 달 만에 얼굴은 새카맣게 탔고 몸무게는 11kg 빠졌다. 팔라완은 이제 내게 꿈에도 잊지 못할 그리운 곳이 되었다. - 기자 말

여행지에서 먹는 김치찌개, 보양식이 따로없다

수상가옥 아이들
▲ 코론 수상가옥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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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가옥 촌 아기엄마
▲ 코론 수상가옥 촌 아기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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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갈까 말까, 망설였어. 쫄았다고? 그건 아니고. 수상가옥 촌을 둘러보려는데 쫄기는 무슨. 아, 구멍 숭숭 뚫린 나무다리가 위험하다? 재수 없으면 바다로 떨어진다? 하긴, 좀 그래 보였어. 떨리긴 하더라. 나무판을 얼키설키 엮어 만든 다리가 좁은 골목길처럼 뻗어 있었어. 이백여 미터, 쭉 바다 쪽으로. 사실, 그보다 구경삼아 이집 저집 기웃거리는 게 무례한 짓 아닐까 싶어 쭈빗댄 거지.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고. 그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 입구 쪽에서 열 살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문밖으로 나왔어. 나를 보자 빙그레 웃는 거야. 카메라를 흔들어 보였지. 여자아이가 곧바로 포즈를 취했어. 엄지와 검지를 펴 턱에 대더라. 미소를 지으며. 그 아이 때문에 용기가 생겼어. 수상가옥 촌으로 들어갔지. 조심조심 나무다리를 타고.'

필리핀 음식
▲ 코론 필리핀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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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여행일지를 쓰고 있었다. 한국식당 '달리달리'에서 김치찌개를 시켜놓고. 배가 몹시 고팠다. 오후 2시가 훌쩍 넘었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달리달리'의 류 사장에게 '배 고파요. 달리달리(빨리빨리) 주세요!' 재촉하려다 말았다.

코론 시내를 오며가며 '달리달리'를 기웃거렸었다. 밖에 걸린 메뉴 사진들을 훑어보며 군침도 흘렸다. 류 사장과는 코론에 도착한 첫날 안면을 튼 사이였다. 밥을 먹으러 들린 건 처음이다. 내 여행경비로는 100페소(2500원 정도) 넘는 음식을 사먹기가 부담스러웠다. 오늘은 큰 맘 먹고 왔다. 허기져서.

나는 현지인이 이용하는 음식점에서 찰기 없는 밥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그런 식당은 입구에 뷔페 식당처럼 음식이 차려져 있다. 메뉴는 거의 고기나 생선요리. 아도보(돼지고기나 닭고기에 간장, 식초, 마늘을 넣고 끓인 스튜 요리로 필리핀 대표요리.) 종류로. 빡삣 같은 야채요리는 어쩌다 보였다. 그 중에서 하나를 고르면 접시에 덜어주었다. 한 접시에 30페소에서 50페소. 생경한 맛은 아니었다. 다만 내 입맛에 짜고 기름졌다. 필리핀 서민들은 1식 1찬의 식사를 했다. 반찬보다 밥을 많이 먹었다. 숟가락 같은 도구를 쓰지 않고 손으로.

김치찌개
▲ 코른 김치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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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김치찌개가 나왔다. 보글보글 뚝배기 한 가득. 돼지고기가 듬뿍 들었다. 국물부터 한 숟가락 떴다. 얼큰하다! 외국에서 먹는 한국음식은 보양식처럼 내게 원기를 불러준다. '음식이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위안거리'라는 쉴라 그레이엄의 말이 맞다. 나는 김치찌개 한 그릇으로 타지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고단함과 긴장감과 주린 배를 위안 받게 됐다. 오늘 나는 지쳤다. 아침부터 코론 시내를 더위 속에서 배회했다. 몇 시간을 걸었나. 카메라 셔터를 바쁘게 눌러대며. 재래시장, 수상가옥 촌, 항구...  코론에 온지 7일째다.

김치찌개를 먹는데 십수 년 전의 여행이 떠올랐다. 태국, 네팔, 인도 여행이었다. 그때가 첫 배낭여행이었다. 현지 음식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빵, 바나나, 찐 달걀, 볶음밥 같은 것으로 간신히 주린 배를 달랬다. 결국 인도에서 김치를 담고 말았다. 시장에서 무, 고춧가루, 소금, 설탕을 샀다. 숙소에서 그릇과 도마, 칼을 빌렸다. 무를 깍둑 썰어 소금에 절였다가 설탕을 뿌리고 고춧가루로 버무렸다. 무늬만 깍두기려니 했는데, 맛이 그럴 듯했다. 손잡이 달린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담아들고 이동하며 먹었다. 나중에는 고추, 오이, 무를 넣고 물김치도 담았다. 서양인이든 한국 사람이든 곳곳에서 만나는 배낭여행자들과 나눠먹었다.

'코알라는 유칼립투스 잎새만 먹고 산다. 팬더 곰은 대나무 줄기만 먹는다. 물개와 바다표범은 물고기만 먹는다. 사자는 육식만 한다.' 그들처럼 그때 나는 밥이랑 김치만 먹었다. 누구는 나의 그 별난 짓을 보고 짝짝짝 박수를 쳐주었다. 깍두기를 한 그릇 덜어갔다. 누구는 현지음식을 경험하는 것이 여행의 참맛이라며, 고집스러운 내 식성을 나무랐다. 내 행동이 여행자답지 않다고 했다. 음식이 자연환경, 문화, 전통, 종교 등 많은 것을 웅변한다며.

인도에서 김치 담가 먹던 여행자, 지금은

다행히 인도여행 한 달쯤 지나자 나도 김치 없이 현지 음식을 먹게 됐다. 내 식성은 역시 잡식성이었다. 바나나 잎 위에 놓인 탈리, 양고기 커리, 도사 등을 맨손으로 집어먹게 됐다. 손으로 먹는 음식이 더 맛있었다. 손에 묻어 있는 세균 때문이라나, 믿거나 말거나. 여하튼 입맛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변한다.

류 사장이 두부부침을 한 접시 내왔다. 서비스였다.

"와우! 두부 좋아하는데... 고맙습니다!"

내 옆의 테이블로 가 앉으며 류 사장이 말했다.

"코론에서 베지테리언 메뉴를 찾기 힘들어요. 고기보다 야채 값이 더 비싸거든요. 그래서 두부요리가 인기 있어요."
"외국 손님들도 오나요?"
"그럼요. 서양 사람들은 비빔밥을 많이 찾아요. 중국 사람들은 의외로 김치찌개랑 떡볶이를 좋아하고요."

한국식당 '달리달리'
▲ 코론 한국식당 '달리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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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사장은 내 질문에 시종 부드럽게 응대했다. 류 사장은 나이 30대 후반의 총각이었다. 주방보다 거친 바다가 어울릴 것 같은 인상. 검게 탄 건강한 얼굴. 근육질 팔뚝의 파도 문신. 실재로 그는 스쿠버 다이빙 마스터였다. 관광객들을 이끌고 자주 바다로 나간다고 했다. 그런 그가 요리를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테이블 몇 개 안 되는 작은 식당의 분위기도 깔끔했다. 필리핀의 오지라 불렸던 팔라완의 코론까지 와서 혼자 살며 요리를 하는 남자에 대해 호기심이 발동했다. 숟가락질을 늦추며 류 사장에게 물었다. 

"코론에 사는 교민이 열 분쯤 되죠?  어떻게 여기서 한국식당을 하게 되셨어요?"
"관광객이 꽤 많이 옵니다. 그리고 코론은 관광지로 개발 중인 도시죠. 필리핀에 와서 처음엔 보라카이에서 살았어요. 2006년부터. 2012년 3월 달에 코론으로 이사 왔죠. 이 식당은, 사실 테이크 아웃 전문점으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요리는... 소싯적에 2년 정도 고기잡이배를 탔는데, 첫해에 밥하던 분이 도망을 가버리는 바람에 얼떨결에 제가 주방을 맡게 됐죠. 그때 열세 명의 밥을... 뱃일도 거들면서요. 바빴죠. 욕 안 먹으려고, 얻어터지지 않으려고 빨리빨리... 그때부터 요리할 때는 빨리빨리..."
"아하, 바다에서 배운 요리군요. 달리달리(빨리빨리)!"

내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결혼은 안 할 거냐고 또 은근슬쩍 물었다.

"결혼은 평생 딱 한번만 하고 싶어요. 그러니 신중해야죠."

그가 농담처럼 흘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금발 청년이 들어왔다. 메뉴도 보지 않고 비빔밥을 주문했다. 류 사장이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여종업원이 반찬 접시를 금발청년 앞에 놓고 갔다. 금발청년이 바로 젓가락을 들더니 배추김치와 암팔라야 피클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나는 밥을 거의 다 먹었다. 배가 불러 숨이 가빠졌다. 그래도 남은 밥을 꼭꼭 씹으며, 금발 청년을 힐끗거렸다. 능숙한 젓가락질, 만족스러운 표정...

드디어 나는 두부부침까지 싹 다 먹어치웠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모처럼 포만감에 빠졌다. 빈 그릇을 물리고 여행일지를 다시 폈다. 오후 세 시쯤 됐나. 식당이 한가한 때였다. 금발 청년은 비빔밥을 열심히 먹고 있고, 류 사장은 창가 테이블에서 노트북을 들여다 보고 있다. 에어컨이 돌아가니 식당은 시원했다. 배가 좀 꺼질 때까지 더 앉았다 가도 되겠다. 여행일지를 쓰면서.

수상가옥
▲ 코론 수상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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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가옥 촌 주민
▲ 코론 수상가옥 촌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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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가옥은 열대지방에서 바다 얕은 곳에 지은 집이야. 말뚝을 박고 바닥에 나무를 깔고 그 위에 집을 세우지. 모기나 해충, 맹수로부터 피할 수 있대. 바닷바람도 시원하고. 바다로 나가 고기 잡기도 쉽고.

난간도 없이 숭숭 구멍 뚫린 좁은 나무다리 통로. 높이가 2미터쯤 될까. 그 아래 물빛이 탁해. 생활오수가 그냥 흘러내리겠지. 다행히 악취는 나지 않았어. 쓰레기 투기한 곳도 못 봤고. 썰물 때 바다로 다 쓸려갔나? 바다 쪽에 작은 방카들이 묶여 있어. 아마 전에는 곧바로 바다가 펼쳐졌겠지만, 지금은 쓰레기 매립지가 동네 앞을 두르고 있어.  

사진 볼래? 자자 봐. 백 마디 설명보다... 그치? 집들이 참 허술해 보이지? 그런데 집집마다 빨래가 꽃처럼 널려 있어. 깡통화분에 화초를 키우고, 플라스틱 화분에 예쁜 꽃들이 피었어. 부유한 삶은 아니지만 뭔가 여유와 향기가 느껴져. 주민들? 추레해 보이지 않았어. 궁색한 표정들도 아니었고. 빈민촌 맞나?

그렇다니까. 카메라를 들이대도 피하는 사람이 없었어. 카메라를 바라보며 모두 미소를 지었어. 입구에서 만난 그 소녀처럼 말이지. 사리사리(구멍가게) 앞에 앉아 있던 젊은 아기 엄마랑 뚱뚱한 아줌마, 숯불로 생선을 굽고 있던 아저씨, 카메라 앞에서 장난치던 개구쟁이 두 소년, 고추를 달랑달랑 내놓고 뛰어다니던 사내아이, 수탉에게 물을 주고 있던 소녀, 빨래를 하고 있던 아주머니... 모두 내게 미소를 보냈어. 나를 반기듯 또, 조금은 수줍은 듯. 영어가 잘 안 통해 가볍게 인사 정도만 나눴지만. 기분 참 좋았어. 나중엔 통로를 무람없이 건너다니며 이집 저집... 집안까지 구경했어. 소박한 살림살이들과 벽에 걸려있는 성모마리아 사진들... 

부엌을 한참 들여다봤어. 나무나 숯으로 불을 펴 음식을 익히는 화덕, 설거지대, 물통, 식기... 부엌세간이 단출해. 누군가가 저기서 식구들이 먹을 밥을 하고 생선을 굽겠지. '악인은 먹고 마시기 위해 살고, 선인은 살기 위해 먹고 마신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맞는다면, 그들은 '선인' 일거야. 그치? 문득, 그 밥상에 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필리핀 현지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어. 어딜 가도 나를 당기는 건 화려한 문명이 아니라, 오염되지 않은 자연이거나 순박한 사람들의 살림이야. 이 여행 중 언젠가는 그런 기회가 오겠지. 아, 그런데 너무 짜게 먹었나? 목  마르다!'

물을 마시려고 여행일지에서 눈을 뗐다. 언제 나갔는지 금발 청년은 안 보이고, 그 자리에 언제 들어왔는지 젊은 유럽인 남녀가 앉아 있었다. 나도 그만 나가야겠다. 석양을 보러 타피야스 전망대를 올라가야겠다. 계단이 724개라던가.


태그:#코론, #팔라완, #배낭여행, #수상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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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2017년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출간. 유튜브 <은경씨 놀다>. 네이버블로그 '강누나의깡여행'. 2019년부터 '강가한옥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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